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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40년(2010)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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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사연 : 새해가 다가오는 이맘때면 생각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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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다가오는 이맘때면 생각나는…

 

 

금릉15 방면 교감 노창심

 

  한 해를 마무리하며 새해를 기다리는 이맘때면 어린 시절 바람 불고 추운 겨울밤 뜨뜻한 방바닥에 몸을 녹이며 먹던 메밀묵이 생각납니다.

  어릴 적 부모님께선 공장일로 설날 전날까지 바쁘셨고 명절 후에 바로 할아버지 제사가 있어서 부모님은 주로 제삿날 큰집에 가셨고 설날은 공휴일의 혜택을 받는 학생인 제가 큰집에 갔습니다. 학교 마치면 바로 부산을 출발해서 시골집으로 들어가는 막차시간에 겨우 맞춰 큰집에 도착하면 항상 큰어머니께서 “우리 일꾼 왔나.” 하며 반기십니다.

  우선 도착한 날은 일찍 쉬고 다음날 새벽부터 전 부치고, 생선 찌고 할 일이 많습니다. 사촌 형제들은 다른 지방에서 직장을 다녀서 명절 전날 밤 늦게 오기 때문에 큰어머니랑 저랑 제수를 장만합니다. 어릴 적부터 해온 일이라 큰어머니랑 저는 손발이 척척 맞습니다. 음식 재료가 어디에 있다고 말씀해 주시면 제가 찾아다가 썰고, 계란이며 식용유며 밀가루 챙겨다가 방 안에 신문지 깔고 전기 팬을 꺼내 혼자서 전을 부칩니다. 고기며 파에 무까지 썰고 끼워서 꼬치도 만들고 어전, 부추전, 동그랑땡, 고구마전, 떡국에 쓸 지단 등 제사상에 쓸 것은 예쁘게 담아 두고 나머지는 손님 대접할 음식으로 챙겨 둡니다.

  제가 방에서 그러는 동안 큰어머니는 부엌에서 생선 찌고, 고기 삶아 육수 내고, 탕거리 장만하시고는 오랜만에 집에 오는 식구들을 위한 특별 간식으로 겨울철 별미 메밀묵을 준비하십니다. 돈 몇천 원이면 사먹을 수 있는 것이 메밀묵이지만 집에서 만들려면 여간 정성이 들어가는 게 아닙니다.

  메밀을 갈아서 물에 불려 베주머니에 넣고 곱게 걸러 그 물을 가마솥에 붓고 끓입니다. 베주머니에 묵물을 거르는 일은 팔이 빠질 만큼 힘듭니다. 구멍이 성긴 주머니는 묵 맛이 거칠어지니까 고운 천을 쓰는데 여간해서 잘 안 됩니다. 이리저리 뒤집어가면서 거르는데 물이 너무 많이 들어가면 잘 굳어지지 않고 맛도 없습니다. 또 주걱으로 젓는 걸 소홀히 하면 대번에 바닥이 눌어붙어 타 버립니다. 이래도 저래도 팔 빠지는 막노동입니다. 그러니 큰어머니는 저를 일꾼이라 부르십니다. 저 없으면 묵은 쑬 생각도 못한다 하시면서요.

  그렇게 묵이 완성되면 집에 있는 온갖 그릇들이 다 동원됩니다. 큰 그릇에 먼저 담아내고 양푼이며 국그릇까지 다 담고 나면 가마솥에 물을 부어 솥바닥에 남은 묵을 숭늉처럼 해서 먹습니다. 한참 힘을 썼기에 목도 마르니 한 그릇 먹어줘야 다음 일을 할 힘도 납니다. 이렇게 쑨 묵은 사먹는 것보다 메밀 향이 진하고 찰지면서도 씹는 맛은 부드럽습니다. 자식들을 생각하는 큰어머니의 정성이 더 진한 맛을 내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묵까지 쑤고 한숨 돌리면 사촌 언니랑 오빠들이 차례로 집에 옵니다. 식구들은 저녁 대신 양념장을 얹은 묵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고 “엄마, 진짜 맛있게 먹었다. 바쁜데 묵까지 우찌 다 했노.” 합니다. 그러면 큰어머니께선 “저 일꾼 안 있나. 쟈 없었으면 내 몬한다.” 하십니다. “올해도 심이 덕분에 맛있게 잘 먹었다.” 하는 사촌 언니와 오빠들의 한마디에 피로가 풀립니다. 큰어머니는 이런 맛에 힘들어도 손수 묵을 쑤시나 봅니다.

  세월이 지나 나이 먹고 설날 큰집에 가는 횟수가 줄었습니다. 사촌 오빠들이 결혼하고부터는 올케 언니들이 있으니 더 안 가게 됩니다. 그리고 큰어머니 돌아가시고는 더 이상 메밀묵 쑬 일꾼이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요즘은 간식거리들이 많아 다양하게 사 먹을 수 있으니 정성 담긴 음식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사 음식도 돈만 주면 다 갖춰진 세트로 배달된다고 하니 간식은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바람소리 윙윙대는 이 겨울밤 간절한 것은 어쩜 메밀묵이 아니라, 힘들지만 묵 쑬 준비를 하시던 큰어머니의 마음이 아닐까요? 이번 설엔 큰집에 조카들이라도 보러 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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