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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40년(2010)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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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코너 :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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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금릉11 방면 교감 박병만

 

 

  세종대왕(재위 1418년~1450년)은 조선 제 4대 왕으로 아버지 태종이 이룩한 왕권강화를 바탕으로 유교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여러 정책들을 시행하여 유교정치의 기틀을 확립하고각종 제도를 정비해 조선왕조의 기반을 굳건히 했다. 또한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창제를 비롯하여 조선시대의 문화 융성에 이바지하고 과학기술을 크게 발전시키는 한편, 축적된 국력을 바탕으로 국토를 넓히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중에서도 1997년 10월 1일 유네스코에서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전 세계의 많은 언어학자들로부터 가장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며 독창적이라는 찬사를 받은 훈민정음을 창제한 것은 우리 한민족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과일 것이다. 당시 조선은 명(明)에 사대적인 입장으로 조선의 문자를 가진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최만리 등 사대주의 관료들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지만, 그는 박팽년·최항·신숙주·성삼문 등의 집현전 학자들의 도움과 백성을 진심으로 위했던 일심으로 이러한 정치적 장애들을 극복하고 마침내 1443년에 완성하여 1446년(세종 28) 9월에 훈민정음을 반포하게 된다.

  세종은 왕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지어 훈민정음의 실용성을 시험해 보았다. 한편, 1446년 3월 소헌왕후 심 씨가 세상을 떠나자 고인의 명복을 비는 의미에서 아들 수양에게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한문으로 엮은 『석가보(釋迦譜)』를 기초로 『석보상절(釋譜詳節)』을 국문으로 마련하게 했다. 다음 해 7월 산문으로 된 『석보상절』이 완성되고, 세종은 이 책을 읽고 감동하여 최초의 한글 찬불가인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지었다고 한다. 지은이가 세종으로 되어 있기는 하나 김수온 등이 참여했을 것으로 보이며 간행 시기는 1447년 또는 1450년경으로 추정된다. ‘월인천강지곡’이란 말은 ‘부처가 화신(化身)으로 백억 세계에 모습을 드러내 교화하는 모습이 마치 달이 여러 강에 비치는 것과 같다’는 뜻이며,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읊은 종교성과 문학성을 조화시킨 장편의 불교서사시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이해하기 어려운 역사의 아이러니가 있다. 당시 조선은 불교를 숭상하던 고려를 부정하고 새롭게 세운 왕조이다. 불교는 본래 철저한 개인주의적 실존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한 종교로서 태조 이성계가 생각하기에 질서 있는 조직국가를 만드는 데는 부적합한 것이었다. 이성계는 불교를 비판하면서 엄격한 윤리와 도덕을 지향하는 주자학을 선택했으며, 가족적이고 선조를 숭상하는 수직적 가치관을 추구하며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을 국시(國是)로 삼게 된다. 한편 세종은 태조 이래의 억불숭유 정책을 계승해 이를 정치이념이나 정치제도뿐만 아니라 사회윤리의 측면에까지 확대했으며 『효행록』·『삼강행실도』·『주자가례』를 간행 보급해 유교적인 사회질서의 확립을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 하에서 백성들이 널리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할 의도에서 만든 한글로 어떻게 불교서적을 편찬할 수 있단 말인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역사의 아이러니 중 하나이다.

  당시 조선의 정권은 억불숭유를 국시로 유교적인 이상들을 실현하고자 노력하였지만 백성들의 삶 속의 문화는 여전히 불교적이었다. 다시 말해 정권은 바뀌었지만 민중의 문화는 바뀌지 않은 상태였다. 수많은 백성이 불교와 무속, 명리학, 음양사상 등에 의존하여 정신적인 안정을 얻는 것은 현실이었다. 백성들의 삶속에 녹아들어 친근한 불교의 서적을 한글로 편찬함으로써 보다 효율적으로 그리고 빠르게 한글을 보급할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아마도 이것이 불교서적을 편찬한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그리고 세종은 국가 통치이념을 유교로 바꾸어 나가면서도 ― 당시의 유신들은 극단적인 불교전폐론을 주장하기도 하였지만 뜻을 같이 하지 않았다 ― 백성들의 삶속에 스며있는 문화의 다양성을 엄연한 현실로 받아들였다. 임금으로서 유교적 이상이라는 큰 틀을 그리면서 백성의 현실을 소중히 여기고 그들을 위해 불교서적을 편찬한 것은 문화의 다양성을 추구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월인천강지곡』을 편찬한 아이러니한 이유라고 필자는 생각하며, 이런 점에서 조선왕조 최고의 성군으로서 위대성이 돋보인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다양한 생각과 문화, 그리고 종교를 가진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나와 다른 생각 등을 가지고 있다고 배타하거나 무시해서는 끊임없는 갈등과 분열만이 조장될 뿐이다. 남이 있으므로 내가 있고, 내가 있으므로 남도 있는 것이다. 항상 타인을 존경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상대를 진심으로 이해하고자 노력할 때, 나아가서 남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는 상생의 이념을 실천해 나갈 때 이 사회는 화합되고 살기 좋은 세상으로 발전해 나갈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사회의 일련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보듬어 안아야 한다.

  도전님의 뜻하신 바가 포덕천하(布德天下)이다. 대순진리회의 도인으로서 우리는 잠시라도 그 뜻을 받들어 행해 나가는 데 게을리 할 수 없다. 그 뜻을 받들기 위해서는 이 사회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그 바탕 하에서 대순의 진리를 잘 이해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월인천강지곡』 편찬에 깃든 세종대왕의 마음은 도전님의 뜻하신 바를 최일선에서 받들어야 하는 우리 도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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