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너별 보기
   daesoon.org  
대순140년(2010) 2월

이전호 다음호

 

도전님 훈시 신년사 종단소식 시론 상제님의 발자취를 찾아서(40) 인물소개 금강산 이야기 『典經』용어 『典經』민속자료 28수 별자리 온고지신(溫故知新) 답사기 수기 독자코너 독자사연 대학생코너 상생의 길 알립니다

시론 : 경인년(庚寅年) 새해에 찾아온 백호(白虎)

경인년(庚寅年) 새해에 찾아온 백호(白虎)

 

 

글 교무부

  2010년 경인년 새해가 백호의 우렁찬 포효와 함께 힘차게 밝았다. 올해는 60년 만에 돌아오는 백호랑이 해. 경인년이 백호(白虎)의 해인 것은 오행론에 따라 십간(十干) 중 ‘경(庚)’이 서쪽을 가리키는 금(金)에 해당하고 금은 곧 흰색을 뜻하기 때문이다.01 우리민족은 이 백호랑이를 청룡, 주작, 현무와 함께 사신(四神)의 하나인 든든한 수호신으로 여겼고 백호가 나타나면 천하가 태평해진다고 믿었다. 사신 중 유일하게 실재하는 동물인 백호는 유전적 돌연변이에 의해 털빛이 하얗게 변한 것인데, 전 세계적으로 약 200마리 정도밖에 없는 것으로 추산되는 매우 희귀한 동물이다.

  한편 호랑이는 십이지신(十二支神)의 하나로서 방위로는 동북동, 시간으로는 오전 3시~5시, 달로는 음력 1월을 지키는 방위신이자 시간신이다. 이 호랑이에 대한 우리의 최초 기록은 『삼국유사』 고조선조의 단군신화에서 찾을 수 있다.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호랑이는 곰과 함께 인간이 되기 위해 토굴에서 쑥과 마늘로 연명하다가 참지 못하고 뛰쳐나갔지만, 우리민족에게 곰보다 더 큰 사랑을 받아온 동물이다. 옛날이야기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대상 중의 하나가 호랑이인 것을 보면 그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비록 문학작품에서 해학과 질타의 대상일 때도 있지만, 날쌔고 강인하며 용맹성과 민첩성을 지닌 호랑이는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에게 두려움과 관심의 대상이었다. 한국의 민담과 전설, 신앙에서 호랑이는 산중의 제왕을 넘어 사악한 것을 물리치고 인간을 훈계하는 산신(山神)이나 산신의 사자(使者)로 신성시 되었다. 이런 호랑이가 일찍부터 한반도에 많이 서식하여 우리나라는 ‘호랑이의 나라’로 일컬어졌던 것이다.

 

 

호랑이의 어원과 생태

  호랑이는 흔히 ‘범’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옛 문헌은 대부분 한자로 되어 있어 ‘虎’라고 표기되어 있을 뿐이다. 이 외에도 산군자(山君子), 산신령(山神靈), 황맹(黃猛) 등 다른 별칭들이 많이 있었으나 우리말로는 보통 ‘호랑이’나 ‘범’이라 부른다. 오늘날에는 호랑이라는 표현이 더 일반화되었지만 사실 이것은 ‘호(虎)’의 우리말과는 약간 거리가 있는 말이다. 원래 ‘호랑이’는 ‘호랑(虎狼)’에서 온 것으로 ‘범 虎’와 ‘이리 狼’에 접미사 ‘이’가 더해져 마치 고유어처럼 변한 말이다. 중국 고문헌에는 ‘호랑’이란 말이 범과 이리를 뜻하는 용맹스럽고 흉포한 짐승의 총칭으로 쓰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이것이 ‘호랑이’로 바뀌어 범을 뜻하게 되었다.02

  호랑이는 500만~200만 년 전에 시베리아와 중국 북동부 및 한반도 등 동북아시아에서 처음 나타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로부터 천 년 동안 먹잇감인 초식동물들이 기후의 변화로 남하함에 따라 그들의 분포지역은 남쪽과 남서방면으로 확장되었다. 호랑이는 고양이과 표범속에 속하는 동물 가운데 가장 큰 맹수로서 몸길이는 3m, 몸무게는 300㎏ 가량 되는 거구이다. “호랑이는 한 골짜기에 한 마리만 산다”는 말이 있을 만큼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며 사는 동물이다. 서식하는 지역과 줄무늬에 따라 8개의 아종으로 나뉘는데 현재는 다섯 종만이 남아있다. 이중 최대 아종인 시베리아 호랑이에 속하는 한국 호랑이는 중국동북부의 소흥안령과 아무르강 유역, 러시아 연해주, 백두산 등지에 주로 분포하고 있다.

  세계야생동물기금(WWF)은 지난 1세기 동안 야생 호랑이가 95%나 줄어들어 현재는 전 세계 극소수 보호구역에서 약 7천여 마리만이 서식하고 있다고 보고한 바 있다.03 우리나라 호랑이의 경우 백과사전류인 『증보문헌비고』에 따르면 “조선 순조 12년(1812) 정월에 경희궁에 호랑이가 들어왔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한반도에서 호랑이를 발견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호랑이는 조선총독부의 해수구제(害獸驅除) 정책에 따라 군과 경찰, 포수 등 수만 명이 동원되어 곰ㆍ표범ㆍ늑대 등과 함께 이십여 년 가까이 집중적으로 포획되었다. 그 결과 호랑이 97마리, 표범 624마리가 포획되었는데 그중 1923년 한 해에 전국적으로 포획된 호랑이 수는 32마리였으나, 1940년에는 1마리에 불과하였고 이것이 한국 호랑이에 대한 마지막 기록이었다.04 통계나 기록에 없는 것까지 합하면 그 수는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해방 이후 남한에서는 더 이상 야생 호랑이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북한에서는 북부 고산지대에 열 마리 정도가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민족과 호랑이

  우리나라는 다른 동북아지역에 비해 국토의 대부분이 산으로 이루어져 있어 호랑이가 서식하기에 좋은 환경이었다. 선사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인 바위그림에서 종종 호랑이가 발견된다는 점은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바위그림은 그 시대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우리나라 바위그림에서 가장 자주 다루어지는 주제는 호랑이, 곰, 사슴, 멧돼지 등인데 울산 대곡리 바위그림에는 호랑이가 14마리나 나온다. 여기서 호랑이는 사냥 중인 인간과 더불어 먹이를 노리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는 호랑이가 당시 한반도에 매우 많았으며 사냥감이 아닌 사냥에 행운을 가져다주는 신성한 영물로 여겼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05

  우리민족과 호랑이의 관계는 중국 문헌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산해경(山海經)』 「해외동경(海外東經)」에 “군자국 사람들은 의복, 모자를 단정하게 걸치고 허리에는 보검을 찼다. 그들은 아름다운 털을 가진 큰 호랑이 두 마리를 길러서 심부름을 시킨다”라고 적고 있다. 또 고대의 문물ㆍ인물에 대한 그림을 찾아보기 위한 책인 『삼재도회(三才都會)』에도 군자국 사람이 호랑이와 함께 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 있어 호랑이가 우리민족에게 대단히 친숙한 존재였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인지 한국의 민담과 전설에는 호랑이 이야기를 빼면 성립할 수 없다고 할 만큼 많은 호랑이 이야기들이 전래되고 있다. 일찍이 육당 최남선은 우리나라를 ‘호담국(虎談國)’이라 일컬으면서 “범이 많기로 조선만한 데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이야기를 모아서 『천일야화』나 『태평광기』, 『데카메론』류의 책을 꾸밀 나라는 세계가 넓다 해도 오직 조선이 있을 뿐이다”라고 할 정도였다.

  실제로 “옛날 옛적에”,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로 시작하는 옛날이야기에는 으레 재미있는 호랑이 이야기가 등장한다. 힘세고 날래지만 한없이 어리석어 사람에게는 물론 토끼나 여우, 까치 등에게 골탕 먹는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들이 있다. 반면 호랑이가 신통력을 지닌 영물로 사람이나 짐승으로 변신도 하면서 미래를 내다보고 영웅의 보호자나, 창업의 조력자로 등장하고, 때로는 약자와 효자, 의인(義人)을 도우며 부정을 물리치는 신비스러운 동물로 등장하는 교훈적인 이야기도 있다.06 이처럼 호랑이는 우리민족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온 동물이다. 중국의 대문호이며 사상가인 노신(魯迅, 1881~1934)은 조선인만 만나면 호랑이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졸랐다고 하니 호랑이가 우리네 삶 속에 얼마나 깊게 자리하고 있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한편 호랑이가 한반도에 많았던 만큼 그로 인한 피해도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조선 초기부터 조정에서는 호랑이로 인한 인명의 손상과 가축의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착호갑사(捉虎甲士)라는 특수부대를 편성하고, 호랑이를 잡는 자에게 각종 포상을 하는 제도까지 마련해 놓았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호랑이의 숫자가 줄지 않아 호환(虎患)은 조선 말기까지 계속되었다.07 호랑이로 인한 피해는 산간 지역이 대부분인 북쪽의 평안도와 함경도에 특히 많았지만 도시나 도성(都城)도 예외는 아니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도성 밖은 물론 도성 내의 궁궐에도 호랑이가 출몰해 수백 명의 군졸들이 동원되기도 하였다. 이런 피해들도 일제의 한국 정기 말살계획의 일환으로 추진된 대대적인 호랑이 사냥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소멸되고 말았다.08

 

민속과 호랑이

  일찍이 호랑이가 많이 서식한다고 하여 ‘호랑이의 나라’로 일컬어지던 한반도에서 호랑이는 용맹하고 날렵한 백수의 제왕이었다. 우리민족에게 이런 호랑이는 두려움의 대상을 넘어 우러러보는 대상으로까지 신성시 되었다. 동예(東濊)09에서는 “호랑이를 신으로 모시고 제를 올렸다[祭虎以爲神]”라고 하는 기록10이나, 조선 후기의 백과사전류인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호랑이를 산군(山君)이라 하여 무당이 진산(鎭山)에서 도당제(都堂祭)11를 올렸다”라고 하는 기록에서도 호랑이를 산신(山神) 그 자체이거나 산신의 사자로 숭배해 제사를 지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깊은 산에 사는 호랑이에 대한 숭배와 신앙은 비단 동예지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한반도 전체의 보편적인 신앙이었다. 그래서 호랑이에게 변을 당하는 호환은 신의 섭리에 따른 운명적인 사건이라 여겨지기도 하였다.

  호랑이는 또한 백수의 제왕으로서 사악한 잡귀를 물리칠 수 있는 영물로 인식되었다. 매년 정초가 되면 나쁜 귀신의 침범을 막고자 궁궐을 비롯해 일반 민가에서 호랑이의 그림을 그려 대문에 붙이는 풍습이 있었다. 이러한 벽사(邪)의 염원은 호랑이 삼재부(三災符)에도 잘 나타나 있다. 정초에 수(水)ㆍ화(火)ㆍ풍(風)의 삼재(三災)로 인한 재난을 면하기 위해 삼재부를 붙이는데 보통은 매 세 마리가 그려진 부적을 쓰지만 호랑이가 함께 그려져 있는 것이 호랑이 삼재부이다. 호랑이 삼재부는 호랑이의 용맹성을 부적 속에 도입하여 부적의 효능을 증대시킨 것으로, 재난을 방지하고 귀신을 쫓으려는 벽사의 의미가 뚜렷이 드러난 것이다.

  귀신과 병을 막고 자신의 몸을 지켜 주는 영험한 존재로서 호랑이에 대한 신앙은 일상생활 곳곳에서도 드러난다. 새색시가 타는 가마에는 옛날부터 나쁜 것을 막고자 호피를 씌웠고, 호랑이 발톱모양으로 장식한 노리개를 여성의 수호신으로 삼았다. 그런가 하면 잡귀를 막고 나쁜 꿈을 꾸지 말라는 의미에서 베개와 베갯모를 호랑이로 장식하였다. 이밖에도 호랑이 모양의 연적, 호랑이로 장식한 벼루, 필통, 인장 등 일상 용품에서도 다양하게 쓰였다.  

  한반도의 모습을 호랑이처럼 그린 이런 형태의 그림이 세상에 드러난 것은 한국의 근대적 종합잡지의 효시가 된 『소년』의 창간호를 통해서였다. 육당 최남선은 일본이 한반도를 유약한 토끼 모양으로 나타낸 것에 반대해 한반도를 대륙을 향해 포효하는 기세 찬 호랑이의 모습으로 표현해 놓았다.12 한반도에서 서식해 온 호랑이는 건국신화에도 등장할 만큼 오랜 세월 우리민족과 함께한 동물이다. 호랑이에 대한 두려움과 공경은 문학과 설화 속에서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냈고, 민간신앙에서는 호랑이를 신앙의 대상이자 벽사의 영물로 믿었다.

  우리 조상들은 한민족의 위대한 기상을 자주 호랑이에 견주곤 하였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야생 호랑이를 찾아볼 수는 없지만 다행이 한국 호랑이의 종자가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13 이 호랑이가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동물로 인식되어 지난 88서울올림픽 때는 ‘호돌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친숙하고 귀여운 이미지로 전 세계에 소개되었고, 축구대표팀의 유니폼에 호랑이 문양을 넣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호랑이, 그것도 서방의 수호신이자 태평과 번영의 뜻을 지닌 백호랑이의 해를 맞아 다사다난했던 지난 한 해의 어려움을 뒤로 하고 호랑이의 우렁찬 기상과 위엄을 한껏 발휘할 수 있는 새해가 되기를 염원해 본다.

 

 

 

 


01 십간 중에서 갑을(甲乙)이 목(木)에, 병정(丙丁)이 화(火)에, 무기(戊己)가 토(土)에, 경신(庚申)이 금(金)에, 임계(壬癸)가 수(水)에 각각 배당된다.

02 정연식 저, 「조선시대의 호랑이와 호환」, 서울여자대학교인문과학연구소, 2004, pp.128~130 참고.

03 김두희 저, 『과학동아』 「과학에 헌신한 십이지 띠 동물」, 동아사이언스, 2003, p.102

04 조선총독부의 자료에 의거한 수치이다.(엔도키미오 저, 이은옥 역, 『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 이담, 2009, pp.315~335 참고)

05 천진기 저, 『운명을 읽는 코드 열두 동물』, 서울대학교출판부, 2008, pp.75~76.

06 천진기, 『한국동물민속론』, 민속원, 2004, p.138

07 차선근, 『상생의 길』 제3호 「호랑이에 대한 小考」, 대순진리회 출판부, 2005, pp.36~39 참고.

08 『전경』 교법 3장 19절을 보면, 상제님께서 일찍이 손바래기 시루산에서 호둔을 보시고 호랑이로 인한 인명의 피해를 줄이시고자 종자를 전할 만큼만 남겨두고 번성치 못하게 하는 공사를 보셨는데 그것이 일본인들에 의해 실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09 오늘날의 원산(元山)ㆍ안변(安邊) 일대에서 경상북도 영덕에 이르는 동해안 지역과 강원도 북부지방에 거주하였던 고대 종족. 인구는 2만여 호로 혼인ㆍ장례 등의 풍속과 언어가 고구려와 비슷하였다 한다. 대략 2세기 후반에는 고구려의 세력 하에 복속되었다.(『파스칼 세계대백과사전』, 동서문화, 2002)

10 『삼국지(三國志)』 「위지동이전(魏志東夷傳)」 濊傳.

11 동네 사람들이 도당(都堂)에 모여 그 마을의 수호신에게 복을 비는 굿.

12 16세기 조선 명종 때의 풍수지리학자 남사고(南師古)는 『산수비경(山水秘境)』에서 최초로 한반도의 형상을 호랑이로 언급한 바 있다.

13 88올림픽을 기념하기 위해 지난 1986년 호돌이, 호순이를 비롯한 5마리의 시베리아 호랑이가 한국서울대공원에 들어와 20마리 이상으로 번식했다.

 

 

 

관련글 더보기 인쇄

Copyright (C) 2009 DAESOONJINRIHOE All Rights Reserved.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 강천로 882 대순진리회 교무부 tel : 031-887-9301 mail : gyomubu@daesoon.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