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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27년(1997)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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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수 신명의 생애 : 구순(寇恂) 神明열전

구순(寇恂)

            

          

  광무제가 남쪽으로 하내(河內)를 평정하자 갱시제(更始帝)의 대사마(大司馬) 주유(朱鮪)등이 군대를 성하게 하여 낙양(洛陽)에 근거하였다. 그러나 병주(幷州)가 아직 평정되지 않아서 광무제는 그곳을 지키기 어렵기 때문에 등우에게 자문하였다.

  여러 장수들 가운데 누가 하내를 지킬 만한가?

  등우가 대답하였다.

  옛날 고조(高祖)가 소하(蕭何)에게 관중(關中) 땅을 맡겼을 때, 다시 서쪽에는 돌아볼 만한 우환이 없어서 고조는 산동(山東)에만 정력을 쏟을 수 있었기 때문에 마침내 대업(大業)을 이룬 것입니다. 지금 하내(河內)는 하수(河水)를 끼고 있는 견고한 요새이고 인구도 풍부하며 북으로 상당(上黨)과 통하고 남쪽으로는 낙양(洛陽)에 가깝습니다. 구순은 문무(文武)가 겸비되어 있고 사람들을 다스리고 병사들을 제어할 재목으로서 이 사람이 아니면 시킬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자 광무제가 구순을 하내태수로 배수하고 대장군의 일을 하도록 하였다.

  광무제는 구순에게 말하였다.

  하내는 부유하고 견고하여 내가 장차 하내로 말미암아 일어나리라. 옛날 고조(高祖)는 소하(蕭何)를 남겨 관중(關中)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나는 이제 공에게 하내를 맡기니 굳게 지키고 군비를 운반하여 군량을 지급하고 사병과 병마를 훈련시키고 다른 군대를 막아서 북쪽으로 넘어오게 하지 않으면 된다.

  광무제는 이어 다시 북쪽으로 연(燕) 대(代)를 정벌하였다. 구순은 현(縣)들에게 서한을 돌려서 병법과 활쏘기를 익히게 하고 기원(淇園)의 대나무를 베어다가 화살 백여 만 개를 만들게 했으며 말 이천 필을 기르고 곡식 4천만 말을 거두어 군대에 공급하도록 하였다.

  주유(朱鮪)는 광무제(光武帝)가 북쪽으로 정벌가서 하내(河內)가 고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토난장군(討難將軍) 소무(蘇茂), 부장(副將) 가강(賈强)으로 하여금 3만여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공하(鞏河)를 건너서 온현(溫縣)을 공격하게 하였다. 격문(檄文)이 이르자 구순은 즉시 병사를 이끌고 달려나와 돌아다니면서 현에게 고하기를 병사를 일으켜 온(溫) 땅 아래에서 모이라고 하였다. 군리(軍吏)들이 모두 간언(諫言)하기를,『지금 낙양(洛陽)의 군대가 하수(河水)를 건너 끊이지 않고 몰려오니 다른 군대들이 다 모이기를 기다려서 출병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러나 구순은, 온현은 군(郡)의 방파제이므로 온현을 잃게 되면 군을 지킬 수가 없다』고 하면서 마침내 그들을 향해 달려갔다. 그 다음 날 아침 맞붙어 싸우는데 편장군(偏將軍) 풍이(馮異)가 여러 현들을 구조하려고 파견한 병사들이 때마침 이르러 군대가 사방에서 모여드니 군기가 들을 덮을 정도였다. 구순은 보병을 시켜 성에 올라가 북을 두드리면서 크게 소리를 질러 『유공(劉公)의 병사가 도착했다』고 알리게 하였다. 소무의 군사들이 그 소식을 듣고 군진이 동요되어 구순은 그 기회를 틈타 진격하여 그들을 대파하고 낙양(洛陽)에까지 따라가서 드디어 가강(賈强)을 목베었다. 소무의 병사들 중 스스로 하수(河水)에 빠져 죽은자가 수 천이고 생포한 자는 만여 명이었다. 구순은 풍이와 하수를 건너 돌아왔다. 이 이후로 낙양에서는 두려움에 떨어서 대낮에도 성문을 굳게 닫고 있었다.

  그 때 광무제는 주유가 하내를 치려한다는 소식을 들은 지 얼마 안되어 구순의 승전보가 이르자 크게 기뻐하면서 말하였다. 『내가 구자익(寇子翼)이 적임자임을 알게 되었다!』 여러 장군들이 축하하면서 왕의 존호(尊號)를 바치자 이에 광무제가 즉위하였다.

  그때 군량이 급히 궁핍해져서 구순은 손수레, 말이 끄는 수레를 동원하여 군수품을 끊이지 않고 운반토록 하니 상서(尙書)는 분량을 헤아려 백관(百官)에게 나누어 주었다. 왕은 여러 번 책명(策命)을 내려 구순을 위로하였다.

  구순의 동문생(同門生)인 무릉(茂陵)의 동숭(董崇)이 구순에게 말하였다.

  『주상께서 새로 즉위하시어 사방이 아직 평정되지 않았으나 군후께서는 이럴 때 큰 군(郡)에 근거하시어 안으로 인심을 얻고 밖으로 소무(蘇茂)를 깨뜨려 위의가 이웃 적들을 떨게 하고 공명이 널리 드리워졌으니 이것은 참소(讒訴)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고깝게 보아 원망과 화를 입을 수 있는 시기라는 뜻입니다. 옛날 소하(蕭何)가 관중(關中)을 지킬 때 포생(鮑生)의 말에 깨달은 바가 있어 고조(高祖)가 기뻐하였습니다. 지금 장군께서 거느리시는 것은 모두 종족형제들이니 선인들을 경계로 삼지 않은 것입니다.』

  순은 그의 말을 옳게 여기고 병을 핑계대고 일을 보지 않았다.

  왕이 장차 낙양(洛陽)을 공략하려고 하여 먼저 하내(河內)에 이르자 구순이 종군(從軍)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왕은, 『하내를 아직 떠날 수 없다』고 하였다. 구순이 여러 차례 간곡히 청하였으나 왕이 들어주지 않자 형의 아들 구장(寇張) 누이의 아들 곡숭(谷崇)을 보내 돌격대를 이끌고 선봉군이 되게 하였다. 왕은 그를 어여삐 여겨 그들을 모두 편장군(偏將簞)으로 삼았다.

  건무(建武) 2년 구순은 옥중에서 상소한 자에게 연루되어 면직 당했다. 이때 영천(潁川) 사람 엄종(嚴終)조돈(趙敦)등이 만여명의 병사를 모아 밀(密)지방 사람인 가기(賈期)와 함께 연합하여 노략질을 하고 있었다. 구순은 면직된 지 수 개월 후에 다시 영천(穎川)의 태수로 배수받아 파간장군(破姦將軍) 후진(侯進)과 함께 그들을 공격하였다. 그 후로 수개월 만에 가기(賈期)의 머리를 베니 군(郡)이 모두 평정되었다. 이 일로 구순은 옹노후(雍奴侯)로 배수받고 식읍이 만 호에 이르렀다.

  집금오(執金吾) 가복(賈復)이 여남(汝南)에 있었는데 그의 부하 장수가 영천(穎川)에서 살인을 해서 구순이 그를 체포하여 투옥하였다. 그 때는 아직 법제가 세위지지 않아 군대에서 법을 어겨도 대부분 용서해주는 것이 상례였으나 구순은 그를 저자거리에서 처형하였다. 가복은 그 일을 부끄럽고 한탄스럽게 여겨서 영천을 지나는 길에 주위 시중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구순과 같은 서열의 장수인데 지금 그에게 수모를 당했으니 대장부가 어찌 이처럼 수모를 당하고도 결단을 내리지 않겠는가? 이제 구순을 보기만하면 반드시 내 손으로 그를 목 베리라』

  구순은 그의 모의를 알고 만나려고 하지를 않았다. 곡숭(谷崇)이 구순에게 말했다.

  『제가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칼을 차고 옆에서 시중들겠습니다. 갑자기 변이 생겨도 막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구순이 대답하였다.

  그럴 것 없다. 옛날 인상여(藺相如)는 진왕(秦王)조차 두려워하지 않았거늘 염파(廉頗)에게는 굴복했는데 그것은 오직 나라를 위해서였다. 보잘 것 없는 조(趙)나라조차 이러한 의(義)를 가졌는데 내가 어찌 그것을 잊을 수 있겠는가?』

  구순은 속현(屬縣)들에 칙명을 내려 그릇에 가득 술과 고기를 담아 집금오의 군대가 오면 대접하도록 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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