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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37년(2007)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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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코너 : 다 하지 못한 숙제

다 하지 못한 숙제

 

 

흥덕 3방면 평도인 이주원(대진대학교 대순종학과)

 

  어느덧 성인식을 치른지도 8년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학교에 입학한지도 8년이 지났다는 사실이 조금은 안타깝기도 하고, 참 오래 산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그다지 평탄한 인생을 살지 않았기에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오늘은 제가 처음으로 도문에 발을 들여놓은 일을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조금 오래된 이야기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 같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 1986년 가을이었습니다. 저희 집은 청주에 있었는데, 제법 괜찮게 살고 있었습니다. 40평이 넘는 2층으로 된 단독주택, 그리고 마당에는 단풍나무와 철쭉, 소나무가 정원을 이루고 있었고, 진입로라고 부를 수 있는 작은 길목엔 장미와 나팔꽃, 그리고 딸기를 심어놓았습니다. 1층은 방이 4칸이었으며, 거실과 방마다 책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책을 정말 애독하셔서, 그 모습을 배운 저희 3남매는 어릴 때부터 책들과 친숙해 있었습니다. 저녁 때면 하숙생들과 저와 동생들이 거실을 매웠고, 할아버지, 할머니께서도 함께 사셨습니다. 단란하고 화목한 평범한 가정이었습니다.

  그 어린 시절 중에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제게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매일 아침마다 치르는 일례행사 덕분에 한의사이신 할아버지께 침과 한약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일례행사란 말하기 부끄럽지만 이불에 지도를 그리는 일입니다. 어머니께서는 그런 저 때문에 애를 많이 먹으셨습니다. 커가면서 일례에서 주례로 주례에서 월례로 바뀌어지긴 했지만 시료반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한동안 더 반복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중2 겨울에 포천도장에 시료반이 생겼을 때 일주일간 다녀왔었는데, 그 뒤로는 이불에 실례를 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원래 남자아이들은 자기 전에 수분을 많이 섭취하고 잠들면 자는 사이에 조절이 잘 안 되어 어릴 때에는 대부분 겪는다고 하지만, 제 경우는 남들보다 빈도수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집에서 이쁨을 듬뿍받고 있었습니다. 특히 할머니의 애정은 지금도 그리울 정도로 각별했습니다. 저도 할머니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는데, 그해(1986년) 봄에 할머니께서 88세의 연세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그래도 아직 어린아이라 금새 잊혀졌던 것 같습니다. 슬플 때면 생각이 많이 났었지만, 그래도 학교에서 친구들이 자꾸 생겨서 전 즐거웠습니다.

  그렇게 할머니를 보내고 반년 정도 시간이 흐른 뒤의 일입니다. 밤이 되면 아버지 어머니께서 손을 꼭 붙들고 어디론가 나가셨다가, 우리 세 자매가 모두 잠들고 나서야 들어오셨습니다. 전 그때 우리 부모님께서 열애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밤마다 분위기 있는 밤거리에서 무드를 잡으시고 계신 모습을 당시에 상상하지는 않았지만, 너무 보기 좋았습니다.

  한번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오시는지 너무 궁금해서 돌아오실 때까지 잠을 안 자기로 했습니다. 나가신 시간은 9시경인데 자정이 넘어도 돌아오시지 않는 것입니다. 시간은 계속 흘러서 새벽 2시가 다 되어서야 두 분의 얼굴에 활짝 핀 미소를 볼 수 있었습니다. 잠에서 깬 척 눈을 비비며 현관을 막 들어오시는 두 분께 “데이트 잘 하고 오셨어요?” 라고 묻자 아버지께선 말없이 웃으셨고, 어머니께서는 어서 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눈치 없이 전 두 분 사이에 서서 손을 꼭 잡고 “저도 갈래요.” 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어머니께서 웃으시며, “우리 주원이도 갈래?”라고 말씀하시며, 아주 좋은 데라고 그러셨습니다. 전 신이 났습니다. 왠지 모를 벅차오름도 느꼈고, 새로운 곳에 간다는 설레임에 들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떼를 쓰는 바람에 어딘가에 가야 할 시간이 늦어 버렸나봅니다.

  부모님은 뛰어가자고 제 손을 잡고는 적당히 빠른 속도로 달리셨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손을 잡고 10분 정도를 달리다가 아버지께서 갑자기 절 안아 올리셔서 무등을 태우셨습니다. 하도 오랜만이기에 전 더 신이 나서 “어디로 가는 거에요?” 라고 계속 여쭤봤지만 두 분은 특별히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다만 보기 좋게 웃으셨습니다.

  그렇게 20분 가까이 걸려 도착한 곳은 조금 오래된 건물 2층이었습니다. 우리 집보다 작은 입구와 노란페인트가 칠해져 있던 곳, 제가 처음으로 발을 디딘 청주 봉명동 연락소였습니다. 전 잠시 할 말을 잊고 두 분 뒤를 종종걸음으로 쫓아갔습니다. 두 분은 어느 넓은 방에 들어가셔서 두 손을 모으고 ‘읍’을 하고 계셨습니다. 당시에 무협영화를 좋아해서 이런 장면에 익숙하지 않았다면 금새 따라하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없이 그렇게 따라하고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나쁘지 않았습니다. 왠지 숙연해 지면서 편안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전 아무 말없이 부모님께서 뭐라고 말씀해 주실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그때 들은 말들을 전부 기억하긴 어렵지만, 잊을 수 없었습니다. 신선처럼 날 수 있다는 것과 5만 년이나 사람이 살 수 있다는 이야기, 그리고 지금과는 다른 세상이 열린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금새 믿기 힘든 이야기란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왠지 그것이 진짜처럼 들렸습니다. 제가 세상에서 제일 믿고 따르는 부모님의 얼굴에서 전 믿음이란 것이 생겨버렸습니다. 그때부터 매번은 아니지만 종종 두 분을 따라나서게 되었고 난생 처음 기도라는 것을 모셨습니다. 선감께서는 아직 때가 아니라고 안 된다고 하시는 것을 제가 생떼를 부리는 바람에 저녁기도를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조금 아찔합니다.

  보통은 말없이 따라가서 교화를 듣고 계시는 동안에 ‘봉신방’이나 ‘화평의 길’ 그리고 연락소 내수분들의 옛날이야기를 들으며, 알 수 없는 환타지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기도시간 때 밖으로 ‘주문’ 소리가 들려오면 속으로 주문을 따라 하였습니다. 대부분의 도인자녀들이 그렇듯이 저도 역시 특별히 주문을 외우려고 노력한 적이 없습니다. 그저 자연스럽게 입으로 따라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떼를 쓴 것은 그것이 어느 정도 익어갈 무렵이었던 때였습니다. 안 된다고 만류를 하시는 선감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전 괜찮아요. 저도 할 수 있어요.”라고 계속 고집을 부렸습니다. 정말로 하고 싶었습니다. 단순히 부모님께서 하시니까가 아니라, 마음속에서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그때 기도를 안 모시면 죽을 사람처럼 굴어서인지, 선감께서는 기도시간에 임박해서 허락을 해주셨습니다.

  “원래 아직 때가 되지 아니하여 아이들에게는 기도를 모시게 하지 않지만, 오늘은 특별히 모시게 할 테니, 만에 하나 이상한 기운이 느껴지면 그땐 내가 데리고 나올 것이다.”라는 알 수 없는 말을 하시고,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어릴 적엔 굉장히 무서우신 분이셨습니다. 그런 분이 승낙을 해주신 데 대해 고마운 마음 반, 설레임 반으로 기도방에 들어갔습니다.

  조용하고 엄숙한 분위기가 되기 전에 어머니께선 기도 전에 행하게 되는 간단한 의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기도는 부모님과 저를 포함해 전부 네 사람이 모셨습니다. 전 오른쪽에서도 제일 끝자리에 앉았고, 왠지 이상한 기운을 느꼈습니다. 자리에 앉았을 때부터 땀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주문 낭송이 이어지고, 전 자연스럽게 밖에서 노래처럼 흥얼거리던 주문을 힘있게 따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이었습니다. 주문의 어느 부분이었는지도 모르게 전 의식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눈을 감은 채로 제가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계속 하늘 위로 붕 뜨는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어릴 적 할머니를 따라 자주 절에 갔던 탓이었는지 그것은 제법 익숙하고 편안한 기분이었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전 위로 올라가는 기분을 느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제 몸이 위로 확 올라가는 것을 느꼈을 때 전 깜짝 놀라 눈을 떴고, 제 몸은 그대로 방을 빠져나가 선감께서 계시는 방으로 와 있었습니다. 잠시 놀란 눈으로 선감께서 앉아 계신 곳과 선감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습니다. 전 선감 품에 안겨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 근엄한 표정으로 앉아 계시던 선감께서는 말이 없으시다가 약간의 시간을 두신 후 온화한 표정을 지으시더니, 괜찮냐고 물어보셨습니다. 전 아무래도 약간 몽롱한 상태였던 것 같습니다.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고, 이상하게도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10월 중순이었는데 옷은 온통 땀범벅이 되어있었습니다. 그래도 마음은 편안했습니다. 잠이 들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선감께서도 제가 당황하거나 동요하지 않고 편안한 얼굴로 눈만 크게 뜨고 있는 것이 안심이 되셨는지 잠시 더 안정을 취하게 두셨습니다.

  그러다가 조용한 목소리로 제게 물어보셨습니다. “기도 모시다가 뭐가 보이거나 하진 않았니?”라고 물어보셨습니다. 아마 더 길게 말씀하셨는데 아무래도 제 기억력으로는 이렇게 간단한 문장으로 밖에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전 제가 겪은 그대로를 말씀드렸습니다. “절에서 본 것 같은 3신상이(부처님상 같은) 점점 하늘로 올라갔구요. 왠지 허공에 뜬 기분이었어요.”라고 말씀드리는 순간 조금은 심각하게 되신 것 같았지만, 그냥 웃어보이셨고, 제 등을 토닥이셨습니다.

  얼마 후 기도가 끝나고 부모님과 한 분의 도인이 선감 방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선감께선 큰일이 날뻔 하셨다며, 세 분께 말씀하셨습니다. 방안에 있던 사람들은 다들 놀란 표정을 하였고, 선감 말씀은 계속 이어지셨습니다. 아이들은 주문의 기운을 이겨내지 못하고, 영이 하늘로 떠버리는 수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조금 전까진 몰랐습니다. 선감께서 앉아계시는데 이상한 기운을 느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달려오셔서 저를 낚아채듯 안고 그대로 기도방을 빠져나오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전 방밖으로 내보내져 다른 방에서 안정을 취하였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하였지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전 그때 신명계를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말입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전 그분을 생명의 은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선감께서 그렇게 잡아주지 않으셨다면, 지금 제가 이렇게 글을 쓰기도 어려웠을지도 모릅니다.

  바로 이 일이 있고 나서, 부모님께서는 도에 깊이 심취하셨고, 그 뒤로 계속해서 평범한 사람이 겪기 힘든 일들이 이어졌습니다. 아무래도 제 경험이 계기가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두 분의 믿음에 부채질을 한 것이 바로 저란 사실을 알아버린 것은 성인이 되어서였습니다. 종교란 원래 선험적인 경험이 있을 경우 그 믿음이 몇 배로 강해진다고 책에서 보았습니다. 어린 저는 그때의 그 경험을 곧잘 잊어버리곤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시간이 흘러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도 저희 부모님은 꾸준한 믿음으로, 항상 ‘구세제민’의 뜻을 품고 도를 닦고 계십니다. 지금도 물론 열심히 하고 계십니다.

  저는 잠시 잊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의 제 모습을 말입니다. 어릴 적엔 같은 방면 도인들을 따라 포덕을 다니게 해달라고도 하고, 아직 어려서 슬프다고도 이야기했던 제 모습을 생각하면 그저 씁쓸한 웃음이 나오긴 합니다. 그로부터 13년 후인 1999년 2월 비로소 전 조금은 적극적인 도인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대진대학교 대순종학과에 입학하고 말았습니다. 처음엔 그저 궁금했습니다. 왜 그토록 부모님께서 도를 닦는 일에 매진하셨던 것인지, 그리고 저도 그 긴 시간을 함께 해왔지만 제대로 알지 못한 부분에 대해 늘 많은 의문점이 있었고, 그것들은 제게 적당한 미스테리로 숙제처럼 남아 있었습니다. 입학을 한지 8년이나 지난 지금에도 아직 다 못한 숙제를 하고 있습니다. 다른 많은 이들이 겪는 시행착오를 저는 조금 많이 겪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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