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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38년(2008)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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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테마기획 : 가을은 독서의 계절 Ⅰ『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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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독서의 계절 Ⅰ

『퇴계 고봉, 편지 쓰다』 읽고

 

선산1 방면 교감 이청섭

 

  전에 인류학과 학생을 만나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전경』과 『요람』을 바탕으로 인륜도덕을 강조하며 치성 교화를 하는데, 냉소적인 표정으로 듣고 있다가 던진 그의 말에 기막혀 했던 기억이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다. “충효열이 왜 중요하지요? 그건 다 기성세대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예요. 다들 그런 것에 세뇌당하고 있는 겁니다. 이젠 그것을 인식하고 버려야 해요.”

  상제님께서 세상에 충효열이 없어 병들었다는 말씀이 정말 맞구나 새삼 인식하며 그를 탓했었지만, 국가통치이념으로서 권력과 연결된 유교는 그 예법의 오용과 남용으로 계층간의 불화를 조장하며 여러 가지 폐해를 낳은 게 사실이다.

  유교가 가지는 의미가 이 정도로 땅에 떨어졌지만, 그럼에도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사회 속에서 여러 인간관계나 질서를 의미하는 ‘인륜’은 유교적 예법과 동떨어져 생각할 순 없다고 본다. 그러나 경상애하(敬上愛下) 없이 권위만 강조하여 형식에 치우치는 예법은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조선 유교사회속의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과 고봉 기대승(高峯 奇大升, 1527~1572)의 서신왕래에서 보여지는 모습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본다.

  퇴계는 조선 제일의 성리학자였다. 조선은 통치이념으로 유교를 내세웠으나 퇴계와 율곡에 와서야 비로소 독자적인 조선 성리학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중국의 근대 사상가인 양계초(梁啓超)는 그를 공자와 같은 칭호인 이부자(李夫子)라며 성인급으로 보았고, 일본의 근세 유학을 열은 야마자키(山崎闇齋)는 그를 주자의 직제자요 조선 제일이라고 치켜세웠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가난한 살림속에서 거의 독학으로 공부한 그가 어떻게 이런 경지까지 올라올 수 있었을까? 저자는 책에서 손자 제자뻘에 해당하는 고봉, 율곡으로부터도 배우길 부끄러워하지 않는 그의 끝없이 열린 자세라고 보았는데, 나는 여기에 그런 자세를 가능케 했던 그의 ‘경(敬)’에 대한 실천을 더 추가하고 싶다.

  경상도 안동에 퇴계가 있다면, 전라도 광주에는 고봉이 있었다. 고봉은 약관의 나이에 이미 성리학에 일가를 이루었다는 평을 받았다. 당시에는 고봉이 퇴계보다 못하다고 생각한 사람이 없었다고 하며, 퇴계도 고봉이 자신보다 학덕이 높음을 칭송했다고 한다. 고봉이 죽은 후, 선조는 그가 생전에 경연(逕筵)01하고 강의한 내용을 수집하여 《논사록(論思錄)》으로 엮어 정치에 참작케 하였다니 그의 역량을 짐작할 만하다. 그러나 임금 앞에서도 당당하고, 간신의 횡포를 주장하는 그의 과격한 논조와 예리함은 실권자와의 대립을 빈번히 일으켜 결국 정치개혁의 꿈을 이루지 못하게 된다. 고봉 스스로도 자신을 ‘…완고한 성품이 이미 굳어 순하게 잡기 어려워…’, ‘…기운을 드러내어 변론을 마음대로 하여 남 업신여기고 꺾어내림이 저의 고질병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성정의 고봉이 32살 때 이제 막 과거에 합격한 처지에서 성균관 대사성까지 지낸 58세의 노대가에게 찾아가 거침없이 퇴계의 이론에 반론을 제기하였던 것이다.

  당시는 사화(조광조가 연류된 기묘사화-1519년)로 인해 사회 분위기가 매우 경색되어 있었고, 권위주의에 입각한 학풍이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퇴계는 이런 그를 무시하거나 멀리하지 않고 학우(學友)로서 존중해주며 받아들인 것이다. 퇴계의 인품이 대단했다고는 해도 그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고봉을 대하는 퇴계의 태도가 선뜻 이해되질 않았다. 퇴계가 일평생 중하게 여겼다던 ‘경(敬)’을 염두에 두고서야, 고봉과의 서신 속에서 일관되게 보이는 그의 태도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사상이 다르면 적으로 몰아 당쟁과 사화를 일으켜 숙청시켰던 시대상황 속에서, 서로 사회적 지위나 사상적 배경에 현격한 차이가 있음에도 퇴계가 죽을 때까지 13년간 이어져 내려온 그들의 관계가 참으로 신선하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서로를 어떻게 생각하고 대하는 지는 그들이 서로 나누었던 서신을 통해 엿볼 수 있다. 몇 구절만 인용해 보겠다.

 

 

<퇴계의 서신>

- 어려운 시절 몸을 더욱 아끼고 학문의 성취를 게을리 말아

시대의 소망에 부응하기를 바라며...

- 지난 날 마음 속 의심이 열에 아홉은 풀렸으니,

이런 식으로 공통점을 찾아간다면 일치할 때가 오리라 봅니다.

- 책을 보다 모르는 것이 있어 별지에 적습니다.

- 늙어서 이런 고견을 듣게 되었으니 이보다 큰 행운이 어디 있으리요?

- 큰 어리석음, 심한 병, 헛된 명성, 과분한 임금의 은혜는덕을 키우는 데 좋을 게 없고 나라에 해가 되니...

- 혹 새로 드러난 것이 있으면 주저 말고 보내주어 늙은이의 어둡고 막힌 생각을 씻어주길...[퇴계가 종명(終命)02하는 그해에 한 말]

- 원하는 배움은 아직 얻지 못했는데도 사람들이 성현으로 대우하니 이를 두려워할 줄 모르고 성현을 자처한다면, 이름과 실제가 맞지 않는 곳을 꾸미거나 덮힘으로써 자기도 남도 속이게 되어 결국 실패하게 됩니다.

 


<고봉의 서신>

- 우러르는 마음 날로 깊어갑니다.

- 속마음을 보이시며, 더불어 저를 이야기 상대로 여기신 거지요? 송구스럽습니다.

- 전에 사단칠정에 대해 비루하고 막혀 통하지 않음을 헤아리지 않고 좁은 소견을 다 말함은 오로지 가르침을 받아 진실로 옳은 것을 얻고자 함입니다.

- 교서를 짓는 것이 저의 본분입니다. 멋대로 선생님께 유리하게 지을 순 없습니다.

- 나를 이루어 주신 분의 은혜는 나를 낳아주신 분의 은혜와 같다고 봅니다.


 

  이같은 편지 글귀를 통해서 상호존중 속에서 나타나는 경상애하의 모습과, 상통하는 문답으로 장벽을 제거하는 모습, 윗사람이 마음의 문을 열어 심복(心腹)을 얻는 것, 항상 반성하여 바르게 하고 공사를 구분하는 것, 자모지정(慈母之情)과 은사지의(恩師之義)의 심정으로 통심정 하는 것, 정도를 넘는 일 없이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이는 것, 부족한 일이 있을 때는 서로 물러나 뉘우쳐 깨달아야 체계를 확립할 수 있다는 『대순지침』의 말씀을 엿볼 수 있다. 체계가 제대로 확립되려면 먼저 사람들간의 상종(相從) 관계가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존경하고 조심할 줄 아는 마음자세가 먼저 밑바탕에 깔려 있어야 된다고 본다.

  퇴계의 ‘범행필독경(凡行必篤敬, 행실은 돈독하고 공경히 한다), 경이직내일용제일(敬以直內 日用第一, 경건함을 가지고 마음 속을 곧게 만듦을 일상생활에서 제일로 삼는다)’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일상생활에서 항상 정성스럽고 조심스러워했다. 고봉을 대하는 모습에서, 경을 바탕으로 상대를 함부로 대하지 않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예법을 실천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01 고려·조선 시대에, 임금이 학문을 닦기 위하여 학식과 덕망이 높은 신하를 불러 경서(經書) 및 왕도(王道)에 관하여 강론하게 하던 일. 또는 그런 자리. 왕권의 행사를 규제하는 중요한 일을 수행하였다.

02 목숨을 다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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