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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44년(2014)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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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문예 : 단청에 대한 나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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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청에 대한 나의 생각
 
 
 

금릉 7-10방면 정리 유현정

 
 
 
 
  나에게 수도한 기간과 단청한 세월은 거의 같을 정도로 단청을 많이 한 것 같다. 지금에 와서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보면 각 회관을 지으면서 있었던 일들과 장면이 아직도 생생한데…. 시간은 참 빨리 흐른다. 내가 처음 단청을 했을 때가 7살 때인 걸로 기억한다. 단청이라기보다는 집 벽에다가 온갖 낙서로 도배하는 일이었다. 사람, 나무, 새 등등 거의 집안 벽이란 벽에는 다 나의 세상을 그려 넣었다. 몇 개 빼고는 거의 무엇인지 알아볼 수 없는 오로지 나만이 알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런 일이 계속 반복되자 부모님께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는지 “피아노 학원 갈래? 미술학원을 보내줄까?” 하며 나를 설득하셨고 집안 형편이 어려워 그중에서 한 가지를 선택해야만 했다.
  힘든 결정이었다. 왜냐하면 둘 다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피아노가 너무 갖고 싶었고 텔레비전에서 피아노 치는 광경이 너무나 환상적으로 보였기 때문에 피아노를 선택했었다. 그러나 아버지 친구의 동생이 미술학원 원장이라는 이유로 그 선택이 온데 간데없이 사라지고 결국 미술학원을 다니게 되었다. 마치 우연이 아닌 필연이나 되듯이 하고 싶었던 것이 많았던 나에게 미술은 끊이질 않고 계속되었다. 낮과 밤 그렇게 1년, 2년, 3년 쭉….
  초·중등부까지는 순수미술을, 고등학교 들어가서는 디자인이라는 것을 접하게 되었고 이 둘은 정말 어울리지 않았지만 열심히 했다. 즐겁다, 좋다, 적성에 맞아, 이거 아니면 안 돼, 많은 단어가 있지만 당시 입시 스트레스에 학교 다니는 게 피곤했고 이 길을 너무 많이 와버렸기 때문에 별수 없이 학교생활을 해야만 했다. 대학도 그렇게 들어갔다. 그럭저럭 대학생활에 익숙해지고 온갖 노는 것에 날개를 달고 여기저기 쏘다니던 시절을 보냈다. 그러던 중 학기 최고의 계절 4월에 또 다른 거대한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바로 대순진리회에 입도한 일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마치 정해진 일처럼 느껴지지만  그 당시 나를 처음 본 포덕소 도인들은 ‘내일이면 안 나올 거다.’라고 확신을 했다고 한다.
  입도의 시작과 함께 단청이라는 것을 접하게 되었지만 업보도 많은지라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일들을 겪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동안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내가 배운 그 모든 것들이 단청에서는 모두 중요하게 쓰였다. 단청은 몇몇의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초실조, 그림조, 선조, 금조, 채색조, 마무리조, 빵빵이까지 다양한 부서와 인원이 동원되어야 할 수 있는 작업이었다. 일도 많고 사람도 많기 때문에 그 사람의 적성에 맞는 적절한 인원 배치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 과정이 잘 이루어져야 일의 성과와 효율을 올릴 수 있다.
  시작부터 초실조에 갔다 그림조에 갔다 하는 그런 반복되는 과정 속에서 마음이 분란스러워 울기도 하였다. 나에게 있어서 단청은 그 자체가 수도였다. 지나고 나서야 잘할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초실조는 이것저것 하고 싶었던 게 많은 나에겐 최고의 부서였다.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덕분에 컴퓨터로 견본 뜨는 게 즐거웠고 가끔 단청장이 바쁘실 때 초도 내보내곤 했었다. 물론 매와 같은 단청장의 눈은 한 번도 쉽게 통과시키지 않았다. 그땐 왜 그렇게 마음이 씁쓸했던지,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사람의 마음이 쉽게 교만해진다는 교훈을 배웠다. 그러면서도 어떻게 하면 선감처럼 한 번에 선이 나올까 고민하고 노력을 많이 했다.
  요행을 바란다면 낭패다. 계속 그리고 지우고 반복하다 보면 골팽이 모양이든 뭐든 무엇 하나는 나온다. 어느 것에 구애받지 않는 점에 무한한 매력을 느끼며 마음껏 단청을 했다. 물론 중간 중간에 밤도 새면서 연마했지만 늘어나는 실력과 함께 찾아오는 복마도 만만치 않았다. 조그만 부주의해도 물감을 쏟는가 하면 철근에 머리를 부딪히고 떨어지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평소 잘 하지 않던 반성이 저절로 되곤 했다.
 
 
  예전 종교 지도자 대회 준비를 위한 단청을 할 때 철근 구조물 위에서 떨어진 적이 있었다. 아프진 않았는데 놀래서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물감은 시뻘겋게 바닥에 엎질러지고 옷에도 튀었다. 주변에서 그 광경을 보던 사람들은 더 놀랐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많이 창피했다. ‘사회에 있었으면 최소 전치 몇 주나 식물인간이 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누군가가 다치지 않게 받쳐준 것 같아 상제님의 덕화에 감사했다. 이런저런 사고를 치고 혼도 나고 그러면서도 울고불고 그러다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웃으면서 신 나게 일을 했던 기억들은 지금 생각하면 새내기 시절 그때가 참 순수했고 너무 좋았다. 지금은 그때보다 일은 더 잘할지 모르겠지만 마음은 좀 덜 순수한 느낌이다. 가끔 그때의 밝고 순수했던 마음이 그립고 그 마음으로 되돌리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현장에서 일을 하다 보면 높은 사다리 위를 오르내리며 일하는 경우가 종종있다. 매번 사다리를 오를때 마다 손발이 오글거리고 무섭기도 했지만 그 덕에 잊을 수 없는 소중한 경험도 많았다. 함안 회관 집회실 단청 때 한복을 입고 사다리를 오르락내리락 하다가 창문 넘어 해가 떠오르는 신비스러운 광경을 본 적이 있다.(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지인들과 일출을 보기 위해 정동진을 갔을때에도 그동안 못 잔 잠만 쿨쿨 자고 왔던 나였다.) 아련한 기억속이지만 그때의 벅찬 감동은 아직도 가슴속에서 언제든지 느낄 수 있을 정도이다.
  단청의 시작과 끝도 역시 초실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말이 초실이지 사실은 오만 일을 다한다. 제일 먼저 와서 준비를 하고 각조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고민한다. 그뿐만 아니라 갖가지 심부름도 도맡아 처리한다. 마무리 작업이 끝나게 되면 부족하거나 실수한 부분이 없는지 여기저기 꼼꼼히 확인하는 완벽한 검증작업을 거친다. 그런 속에서 몸은 고되지만 마음은 더 풍족해짐을 느낀다. 다양한 일을 하면서 너무 좋았고 신나게 일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하늘의 보살핌 덕분에 지금껏 단청일을 할 수 있었음을 느낀다. 또 모든 것은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인연에 따라 일어남을 알게 되었다. 좋은 일도 있었지만 갈등도 많았다. 그럴 때는 내가 잘 풀고 잘 했었어야 했는데 많이 부족했던 것 같다.
  대순진리회에서 단청을 하게 된 후 사회에서도 단청 일을 맡게 된 적이 있었다. 그 때 우리 단청과 사회 단청의 차이점을 느낀 적이 있었다. 포덕을 하면서 만난 인연자가 사회 단청 기술자라서 어찌어찌하다가 사회 단청이라는 것도 경험 삼아 한번 해봤지만  도와 사회가 정말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들어가는 가장 기본이 되는 색도 우리와 다르고, 금분도 다르다. 안료에 들어가는 접착제 등등 재료 선택 부분에서도 차이가 있었다. 물론 그들이 쓰는 황도 더 어둡다. 재료와 모든 비율에도 차이가 있지만 작업하면서 항상 느꼈던 건 아무리 어수룩한 도인들이라도 근본적인 마음엔 신도와 공덕의 개념으로 작업에 들어온다. 기본 바탕 마음자리에 늘 정성으로 공사를 받드는 마음이 있지만 사회는 정말 간단하다. 모든 것이 다 돈과 관련짓고 만다. 마음이 다 돈으로 꽉 차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의 단청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가업으로 물려받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단청이라는 개념이 정성을 들이는 부분보다는 그들에겐 삶 자체이고 생업이자 직업이다. 그러다 보니까 하루하루 들어가는 식비며 숙박비 등등 모든 것이 다 돈이고 비용 또한 만만치 않다. 나는 여태껏 그런 걱정을 하면서 단청을 해 본 적이 없다. 상제님의 덕화에 감사하고 대순에서 단청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인가를 새삼 다시 느낀다. 함께 일함에 있어서도 미소를 잃은 굳은 얼굴들을 보면서도 약간 삭막했지만 그래도 얘기를 해보면 개개인은 정도 많고 나쁜 사람은 없었다. 그들에게서 배울 점이 있다면 일이 정말 빠르다는 점이다. 신속하고 쉽게 쉽게 하는 것이 뭔가 우리가 모르는 기술을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웬만큼 친하지 않고선 잘 알려주지 않는다. 목기 연 개판이라든가 찌검질이라 해서 간단한 문양 같은 도안은 바탕선이 없어도 그냥 슥슥 나온다. 정말 신기했고 그런 점은 배울 만했다. 선을 긋는 부분에서도 자 하나 없이 엄지와 검지 사이에 붓을 끼고 고정시켜 팔 자체만으로 그대로 선을 그어 버린다. 자를 잰 것처럼 아니 자보다 더 반듯하고 정확하게 선이 나온다. 아마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눈이 휘둥그레지지 않을까 싶다.
 
 

  선을 긋거나 마무리하는데 주로 주홍이나 희분이 말썽이다. 물론 이 문제도 해결할 수 있었다.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사실 몰래 습득한 것 같다. 잘 가르쳐 주지 않아 알아내기가 꽤 힘들었지만 지금은 잘 나온다. 단청 분야는 인맥의 끈끈함이 다른 곳보다도 강한 것이 특징이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불교계의 거장이셨던 유형문화제인 만봉스님, 그의 수제자 홍창원 씨, 양용모 씨 등등 그 밖에도 많은 유명한 사람들이 있고 거기의 수제자들과 또 그의 제자들이 문화재며 여러 굵직한 단청공사를 거의 다한다. 그러나 보수적인 건지 웬만해서 어떤 특별한 노하우라든가 비법 같은 건 잘 가르쳐 주질 않는다. 한국을 대표하는 미(美) 중에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고 많은 외국인들이 체험하고 싶어 하지만 폐쇄적인 분위기 때문인지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널리 알려야 함에도 개방적이지 못하다. 그 부분은 안타까웠다.
  우리야 워낙 화려한 양식의 단청 중의 최고봉! 금단청이지만 가칠 단청이라고 바탕칠만 하는 단청도 있다. 바탕칠은 광범위하지만 절대 튀지 않고 모든 색을 뒷받침해 준다. 미묘한 색의 차이에서도 결과가 많이 달라지기 때문에 그만큼 적절한 색을 내는 것이 어렵고 중요한 작업이다. 모든 물감의 제조와 붓들의 관리를 맡는 부서는 물감 창고에서 이루어진다. 실제로 붓들고 단청을 하진 않지만 단청색의 연구와 질 좋은 물감을 만들기 위해서 늘 노력을 하고 있다. 그래서 어떨 땐 존경스럽다.
  그동안 해왔던 단청을 보면 도인들의 땀과 정성이 베어 있는 것 같다. 지금의 단청은 너무나도 아름답고 훌륭하다. 도인들이 노력한 결과이다. 채색 조의 채색은 점점 빠르고 정확해 그 정확함은 누구도 흉내내기 힘들고 마무리 조의 작업 역시 그 실력이 많이 늘었다. 지금은 단청하는 도인들이 그 분야에서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이 없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우리의 단청이 여기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발전하고 도는 물론 사회에도 많은 이바지가 되어서 덕화 선양이 되었으면 한다. 우리의 단청이 우리의 도가 진실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감동을 주는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것이 포덕의 지름길이 되고 많은 사람들이 동참하고 수도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니 그야말로 너무나도 큰 영광이고 보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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