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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44년(2014)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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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수(宿) 신명 : 미(尾) 별을 관장하는 진준(陳俊) 신명

미(尾) 별을 관장하는 진준(陳俊) 신명
 
 
 
글 대순종교문화연구소
 
 
 
미수(尾宿)
  미수(尾宿)는 28수 가운데 여섯 번째 별자리이다. 그리고 각항저방심미기(角亢氐房心尾箕), 즉 동방(東方) 청룡(靑龍) 칠수(七宿) 가운데서도 여섯 번째 별자리이다. 이 별자리의 주된 별(主星)은 9개로 동물은 호랑이다.01 미수는 동방 청룡 칠수 전체를 용으로 볼 때 꼬리에 해당함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미수를 의인화하여 동방미화호성군(東方尾火虎星君)이라 부르는데 손에는 대도(大刀)를 지닌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후한의 창업공신 진준
  미(尾) 별을 관장하는 진준(陳俊,?-47)은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 BCE 2-CE 58)를 도와 후한(後漢)을 세우는데 큰 공을 세운 창업공신이다. 진준의 자(字)는 자소(子昭)로 남양(南陽) 서악[西鄂, 하남성(河南省) 남양(南陽) 북]사람이다. 그는 어려서 군(郡)의 관리가 되었다.
  당시의 정세를 잠시 살펴보자. 전한(前漢)을 타도한 왕망(王莽, BCE 45-CE 23)이 신(新, 8-23)나라를 세웠지만 그의 복고적 개혁정책에 실망한 민심은 한나라의 부흥을 기대했다. 게다가 왕망이 이러한 민심의 이반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면서 시국은 악화일로로 치달았고, 중국 전역에서 일어난 반란이 왕망 정권을 위협할 정도로 확대되었다. 이 시기 하강(下江)과 신시(新市)에서 일어난 농민군이 주축이 되어 유현(劉玄, ?-25)을 옹립하니 이가 곧 경시제(更始帝)이다. 농민군이 유현을 옹립한 것은 한나라의 부흥을 기대한 당시의 민심에 따른 결과였다. 경시제가 즉위하여 종실(宗室)인 유가(劉嘉, ?-39)02를 태상장군(太常將軍)으로 삼았는데 진준은 그의 장사(長史)03가 되었다.
  경시제가 즉위하면서 많은 사람들은 신나라 말엽에 발생한 혼란이 종식되고 새로운 치세가 전개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경시제와 그를 추대한 이들은 집권 세력으로서의 책임감과 실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 내부의 권력 투쟁에 몰두하며 당대의 혼란을 더욱 가중시킬 뿐이었다. 이렇게 하여 정국은 더욱 혼란해졌고, 경시제는 서서히 자신의 세력 기반을 상실하였다. 이때 유가의 휘하 장수였던 진준과 가복[賈復, 심(心) 별을 관장]이 동시에 유가의 추천서를 갖고 유수를 찾은 것도 경시제의 세력이 축소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실례의 하나였다. 그리고 경시제의 부하 장수에 불과했던 유수에게는 계속해서 인재들이 모여들었다. 경시제는 유수를 대사마에 임명하면서 하북(河北) 평정을 지시했는데, 유수로서는 자신만의 세력을 키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은 것이었다.
  유수의 입장에서 보면 진준이나 가복과 같이 자신을 찾아오는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이 중요했다. 합당한 자리를 주어 자발적으로 찾아오는 인재들을 수용하고, 이들에게 후한 상을 내려 제대로 대우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계속적인 인재의 유입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런 인재들을 수용하는 것은 자신의 역량을 드러내는 일이기도 했다. 유수는 진준을 알아보고 그를 자신의 주변에 두고 중용하고자 했지만 진준의 전직(前職)을 감안할 때 그런 자리에는 이미 해당자들이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곡양(曲陽, 河北省 保定에 있는 현)의 장(長)에 임명하면서, 유수가 진준에게 의사를 물었다.
  “그대를 나의 좌우에 두고자 했다오. 그런데 작은 현의 관직에 만족하시겠소?”
  진준의 입장에서 보면 이미 관직의 고하(高下)는 문제가 될 수 없었다. 진준이 유수를 따른 것은 그가 난세를 평정하고 새로운 치세를 열 적임자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지 높은 관직을 원해서가 아니었다. 애초에 관직의 고하를 따질 일이었다면 유가에게 있는 편이 나았다. 그는 자신에게 수여된 곡양 장의 인수(印綬)04를 즉석에서 반납했다. 이후, 유수는 진준을 안집연(安集掾)으로 삼았는데 연은 하급 관리를 의미한다. 진준의 이런 모습은 “한마음을 정(定)한 바엔 이익(利益)과 손해(損害)와 사(邪)와 정(正)과 편벽(便辟)과 의지(依支)로써 바꾸어 고치고 변(變)하여 옮기며 어긋나 차이(差異)가 생기는 일이 없어야 하며 ….”라는 대순진리회의 삼요체 중 하나인 ‘신(信)’을 떠오르게 한다.05
  진준은 유수를 따라 청양(淸陽)에서 동마적(銅馬賊)을 격파하고 진군하여 포양(蒲陽)까지 이르렀다. 유수는 진준의 공노를 치하하여 강노장군(彊弩將軍)에 임명했다. 진준은 전투에 나서면 물러설 줄 모르는 용맹한 장수였다. 진준이 안차(安次, 하북성 안차현)에서 오교적(五校賊)과 싸울 때의 일이다. 그는 전투 중 말에서 내려 손에 짧은 칼을 들고는 진격하였다. 닥치는 대로 격파하여 20여 리까지 추격하다가 그 두목을 베고서야 돌아오니, 유수는 멀리서 진준이 싸우는 모습을 보고서 찬탄하며 말했다.
  “싸우는 장수마다 모두 이와 같다면 무슨 걱정이 있을까!”
  진준은 전투에도 능했고 지략 또한 갖추고 있었다. 그의 지략을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당시에 오교적이 퇴각하면서 어양[漁陽, 북경시 밀운현(密雲縣)]에 들어갔는데 지나는 곳마다 노략질을 하였다. 이에 진준이 유수에게 다음과 같은 전략을 제시했다. 
  “도적들은 치중(輜重)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마땅히 가벼운 기병(騎兵)을 내보내 적들의 길목을 지키게 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각기 굳게 지키게 하여 그들이 먹을 식량을 끊어버리면 싸우지 않고도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치중(輜重)은 무거운 짐을 뜻하는데 단적으로 치중이 없다는 것은 별도로 준비된 식량이 없어서 해당 지역에서 이를 조달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노략질로 양식을 보충해야 하는 도적에게 노략질 꺼리가 없다면 이미 끝난 싸움인 것이다. 진준은 이 점을 지적하였고 유수도 그와 같은 생각이었다. 유수는 진준에게 경기병(輕騎兵)을 이끌고 선봉에 서도록 명령했다. 또한, 보루와 성벽이 견고하여 안전한 곳은 명령을 내려 굳게 지키게 하고, 들에 있는 곡식들은 모두 거두어들이도록 했다. 도적들이 이르러 보니 취할 것이 없어서 마침내는 흩어져 달아날 수 밖에 없었다. 진준이 군대를 이끌고 돌아오자 유수가 그의 계책을 칭찬했다.
  “저 도적들을 지치게 만든 것은 장군의 계책이었소.”
 
 
광무제의 즉위와 진준의 활약
  25(건무 1)년 유수가 장수들의 추대를 받아 후한의 초대황제로 즉위하니 이가 곧 광무제이다. 광무제가 즉위한 후 진준을 열후(列侯)에 봉했다.
  26(건무 2)년 봄에 진준이 광성적(匡城賊)을 공략하여 네 현을 함락시켰는데 이에 광무제는 그를 다시 신처후(新處侯)에 봉했다. 또 진준이 군대를 이끌고 돈구(頓丘)를 공격하여 세 성을 함락시켰다. 그 해 가을에 대사마 오한[吳漢, 저(氐) 별을 관장]이 광무제를 대신하여 진준을 강노대장군(彊弩大將軍)에 임명하고 하내의 금문적(金門賊)과 백마적(白馬賊)을 공격토록 하였다. 진준은 이들을 격파하여 자신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28(건무 4)년에 진준이 군대를 돌려 여양(汝陽)과 항(項)을 굴복시키고 또 남무양(南武陽)을 함락시켰다. 이때에 태산(太山) 주변에는 장보(張步,?-32)06가 가장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오한이 광무제에게 보고했다.
  “진준이 아니면 어느 누구도 이 군(郡)을 평정시킬 수 없습니다.”
  오한의 보고를 받은 광무제는 진준을 태산태수에 임명하고 대장군의 일을 맡도록 했다. 장보가 이를 듣고 그 휘하의 장수를 보내 진준을 공격했다. 양 세력은 영(嬴)에서 맞붙었는데 진준이 크게 이겨 그 승세를 몰아 제남(濟南)까지 추격했다. 이 과정에서 관리들의 인수(印綬) 90여 개를 취하고 여러 현을 차례로 공략하여 마침내 태산을 평정하였다. 29(건무 5)년에 진준은 건위대장군(建威大將軍) 경감[耿弇, 기(箕) 별을 관장]과 함께 장보를 격파했다.
  이때에 낭야[琅邪, 산동성 제성현(諸城縣)]가 아직 평정되지 않았다. 광무제는 태산태수였던 진준을 낭야태수로 삼고, 장군의 직위는 그대로 두었다. 이 지역에는 평소에 진준의 명성이 자자했다. 진준이 이곳의 태수로 부임하게 되자 그의 임지인 낭야와 그 주변 지역의 도적떼는 모두 사라졌다. 진준이 군대를 이끌고 공유[贛楡, 강소성 동해현(東海縣)]에서 동헌(董憲)을 치고 계속해서 진격하여 구적(朐賊) 손양(孫陽)을 쳐 평정시켰다.
  32(건무 8)년에 장보가 다시 반란을 일으켜 낭야로 돌아오려 하자 진준이 쫓아가 토벌하고는 그를 베었다. 광무제가 그 공을 가상히 여겨 진준에게 청주(靑州)와 서주(徐州)를 다스리게 했다. 진준은 무장으로서 전쟁에도 능했지만 행정 관료로서 다스림에도 큰 성과를 드러냈다. 그는 가난하고 병약한 사람들을 돌보고 의로운 자를 표창하였으며 휘하의 관리들과 군대를 엄격하게 단속하고 통제하였다. 이렇게 하여 진준이 다스리는 지역에서는 관리들과 군대로 인한 다툼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도적이 소탕되고 관리들과 군대에 의한 소란이 일어나지 않게 되니 이 지역 백성들은 평온한 세상이 온 것을 노래했다.
  청주와 서주가 어느 정도 안정을 회복하자, 진준이 조정에 글을 올려 아직 평정되지 않고 있던 농(隴)과 촉(蜀)의 정벌에 나서겠다고 자청했다. 광무제가 진준의 글에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려 회답했다.
  “동주(東州)가 갓 평정된 것은 대장군의 공이다. 동주는 바다를 등지고 하(夏)07를 어지럽히는 도적들이 출몰하는 곳으로 나라에서 아주 염려하고 있는 지역이다. 그러니 방어에 힘쓰고 백성들을 잘 돌보라.”
  37(건무 13)년에 진준의 식읍을 더 늘려 축아후(祝阿侯)에 봉했다. 이듬해에 진준은 봉조청(奉朝請)하게 되었다. 봉조청은 조정에서 의식을 행할 때에 만들어지는 임시관직으로 조정의 일에 참석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47(건무 23)년에 세상을 떠났다.
 
 

01 萬民英(明) 原著, 『圖解 星學大成 第一部: 星曜神煞』, (北京: 華齡出版社), 2009, p.411.
02 자(字)는 효손(孝孫). 남양(南陽) 채양[蔡陽, 현재 호북성(湖北省) 조양(棗陽) 서남] 사람. 광무제 유수의 족형(族兄). 경시제(更始帝) 유현(劉玄)과 장안(長安)에서 같이 수학하였다. 왕망(王莽) 말년에 유현을 따라 병사를 일으켰는데, 유현이 경시제가 되자 편장군(偏將軍)에 임명되고 흥덕후(興德侯)에 봉해졌다. 경시제가 장안에 도읍한 이후 한중왕(漢中王)에 임명되었다. 26(건무 2)년 광무제에 항복하여 이듬해 낙양에서 천승태수(千乘太守)에 임명되었고 37(건무 13)년 순양후(順陽侯)에 봉해졌다.
03 한(漢)나라 때는 승상(丞相) 또는 삼공(三公)의 속관(屬官). 위진(魏晉) 이후에는 왕공부(王公府)의 속관. 후세는 자사(刺史)의 부관(副官).
04 관직에 임명될 때 수여되는 도장과 끈. 벼슬아치가 그 자리에 임명되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증표이다.
05 『대순진리회요람』, p.17.
06 자(字)는 문공(文公). 낭야(琅邪) 불기[不其, 현재 산동성(山東省) 노산(嶗山)] 사람. 왕망의 신(新)나라 말엽에 수천의 무리를 모아 반란을 일으켜 주변 군현(郡縣)을 공략하여 자칭 오위장군(五威將軍). 경시제(更始帝) 유현(劉玄)이 왕굉(王閎)을 파견하였으나 이기지 못했다. 이후 양왕(梁王) 유영(劉永)이 그를 보한대장군(輔漢大將軍), 충절후(忠節侯)에 봉해 청주(靑州), 서주(徐州)를 관할케 했다. 이후, 그의 영역은 확대되고 병력도 증대되었다. 26(건무2)년 유영이 광무제에게 항복하자 27(건무 3)년 광무제가 장보를 동래태수(東萊太守)에 임명했으나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를 제왕(齊王)이라 했다. 29(건무 5)년 광무제가 친정(親征)에 나서자 다시 투항하여 안구후(安丘侯)에 봉해졌으나 32(건무 8)년 처자를 데리고 임회(臨淮)로 도망가 자신의 옛 무리를 모았는데 낭야태수(琅邪太守) 진준(陳俊)에 의해 진압된 후 참형(斬刑)에 처해졌다.
07 중국을 의미한다. 중하(中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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