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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이야기 : (100) 금강산으로의 여정[上] - 이방인의 눈에 비친 금강산

(100) 금강산으로의 여정[上]

  - 이방인의 눈에 비친 금강산

 

글 교무부

 

  1880년 개항 이후 조선을 다녀 간 서양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경험하고 관찰한 기록과 사진을 모아 출판했다. 영국 여성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 1831~1904)은 1894년 겨울부터 1897년 봄 사이 네 차례에 걸친 조선 방문을 통해 보고 듣고 느낀 점들을 1898년에 자국에서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원제: Korea & Her Neighbours)』이란 제목으로 출간하였다. 이 책은 1890년대 중반의 조선에 대한 학문적 조사와 관찰 내용을 담은 대표적인 조선여행기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가장 많이 알려져 있으며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을 정도로 인지도가 높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영국 왕립지리학회 최초의 여성회원으로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한 의지와 지성을 겸비했던 19세기 여성 여행가’로 평가받고 있다.01 생전에 그녀가 출간한 여행기들이 유럽 사회에서 큰 성공을 거둠에 따라 그녀는 유럽 여성들의 우상이 될 정도로 명망이 높았다. 당시 유럽의 다른 저자들이 남겨놓은 아시아 관련 저서들은 대부분 식민주의적 침탈을 위한 조사서이거나 아시아의 미개함을 극대화한 서구 편향적 시각에서 쓰인 것이었다. 그녀의 서술태도 또한 그러한 시각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다른 저자들과 달리 자신의 순수한 지적 탐구심을 바탕으로 치밀한 관찰과 조사 및 객관적인 평가를 위해 노력한 점들은 인정해줄 만하다.02
  다음에 소개하는 내용은 이사벨라가 쓴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중에서 금강산(金剛山)과 관계된 부분을 발췌하여 실은 것이다. 여기서 그녀는 이국인의 시각에서 바라본 금강산의 모습과 사찰에서의 경험을 섬세한 필치로 묘사해 놓았는데, 이를 통해 19세기 말 금강산의 풍경과 사찰의 모습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금강산으로 가는 길
  1894년 수로를 이용해 한강 일대를 여행하던 이사벨라는 춘천에서 배를 버리고 북한강 상류를 따라 육로를 통해 금강산으로 향했다. 교통의 불편이 가장 심한 곳 중의 하나인 춘천에서 원산까지의 길을 조랑말을 타거나 걸어서 여행을 시작한 것이다.

 

  사방거리03에서 출발한 지 이틀 만에 서낭당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다이아몬드 마운틴(Diamond Mountain)’이라 알려진 금강산 방향으로 접어들었다. 이 길의 초입은 백합이 카펫처럼 깔린 숲이 우거진 계곡을 통과하여 추파령(해발 396m)으로 가는 좁은 길이었다. 길을 따라 이어진 논은 비에 젖어 있었고 두 이랑마다 옥수수가 두 줄씩 심어져 있었다. 논 속에는 아주 아름답고 활기찬 개구리들이 폴짝폴짝 뛰며 개골개골 울어댔는데 그 개구리들은 푸른 껍질 위에 검은 점이 박혀 있었으며 다리와 몸통 아래는 심홍색이었다. 이들은 하얗고 붉은 따오기의 먹이가 되곤 했다.
  두 번째 대로에서 내리막길로 접어들면 금산강[금성천(金城川)의 별칭]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 금산강은 ‘방평’04이란 마을로 가는 비옥한 농업지대의 강이다. 그리고 방평에서는 33리 떨어진 북쪽에서 채광되고 제련된 철로 말먹이를 끓일 때 쓰는 아주 거친 모양의 큰 쇠솥을 만들고 있다. 이곳에 도착한 뒤 이틀간 연이어 끔찍한 비바람이 몰아닥쳤다. 두 번째 날의 비바람은 우리가 바로 협곡의 꼭대기에 있을 때 불어 닥쳤다. 짧은 시간 동안 우리에게 집중적으로 휘몰아쳐 주위의 나무들을 성냥개비처럼 부러뜨리고 조랑말들을 거의 날려버릴 뻔한 엄청난 폭풍우였는데, 얼마 후 쥐죽은 듯한 고요가 찾아왔다.
  깎아지른 듯 치솟은 산봉우리 너머의 푸른 하늘에는 구름이 마치 강가의 제방과 같은 모양으로 붉게 빛나며 덩어리를 이루고 있었다. 산의 개울들은 우르르 소리를 지르고 방울방울 부서져 물거품을 일으키며 흘러내렸다. 조용한 숲은 더욱 청신해진 녹음의 생기와, 빗물에 흩뿌려진 희고 노란 꽃잎들로 눈을 즐겁게 해주었고, 그들이 풍기는 짙은 향기는 저녁의 대기를 살찌우고 있었다.
  이 같은 순간들, 그리고 또 다른 몇몇 순간들에서 나는 ‘조선’이라는 나라가 한번 그 나라를 본 사람이면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고유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 아름다움은 봄이나 가을에, 그리고 우리가 관습적인 가치판단을 벗어날 때만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예의 그 흰옷을 입고 신중하게 걷는 남자들과 함께 활달하게 걷고 있는 아낙네들의 모습은 한번 본 이방인이 결코 이 땅을 떠나고 싶지 않게 만드는 정경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가 ‘마릿개(Mari-Gei)’05라는 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번갯불이 번쩍이고 날이 어두웠다. 그래서 다음 날 오르기로 한 ‘단발령’에서 약 3.2km쯤 떨어진 그 마을에서 하룻밤 묵고 싶었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이 지금 쌀도 콩도 다 떨어져 길손을 받을 수 없다며 우리를 마을로 들이려 하지 않자 마부들과 실랑이가 벌어졌다. 하기야 늦은 봄이었으니 그럴 법도 한 일이었다. 결국 11시간 동안 별빛에 의지해 마릿개 뒷산의 정상에 당도해서야 조그마한 마을에서 얼마 동안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 겸재 정선(鄭敾)의 장안사, 『신묘년풍악도첩』,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금강산의 여러 사원들

 

장안사(長安寺)
  금강산의 서쪽 경계선인 단발령(斷髮嶺: 해발 834m)을 넘기에는 아주 화창한 날씨였다. 영국 영사 캠벨(Campball) 씨는 단발령을 넘어본 몇 안 되는 유럽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글에서 단발령 고갯길은 짐을 실은 말이 통과할 수 없을 정도여서 짐꾼을 고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계속 말을 타고 갔으며 나의 조랑말은 그 바윗길로 짐을 지고 가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했다. 산비탈에는 뒤틀린 소나무들 사이사이로 산재한 떡갈나무, 밤나무, 사시나무를 비롯해 여러 종류의 단풍나무들이 있었고, 바닥이 이끼로 뒤덮인 계곡에는 벚꽃과 백합이 피어 있었다.

 

 ▲ 장안사

 


  이곳에서 금강산의 정상을 올려다보면 가슴이 사무치도록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진다. 굽이굽이 이어진 숲의 물결, 시냇물의 아스라한 반짝임, 구릉의 완만한 선들, 그 뒤로 해발 1,638m에 달하는 금강산 최고봉인 비로봉(毘盧峯)이 높게 솟아 있었다. 아! 나는 그 아름다움, 그 장관을 붓끝으로 표현할 자신이 없다. ‘진정 약속의 땅이구나, 진정으로!(A fair land of promise, truely!)’
  단발령은 이 산의 무수한 사찰과 암자 중의 한 곳에서 일생을 묻으려고 금강산을 찾는 사람들에겐 우리 식으로 말해 하나의 ‘루비콘 강’이었다.06 이 봉우리의 이름부터가 한국 불교사 초창기의 유서 깊은 전설이 담긴 단발(斷髮)로 ‘머리카락을 자른다’는 뜻이다. 산사에서의 수도생활을 선택한 사람들은 여기서 자신이 기혼자임을 표시하는 상투나 미혼임을 표시하는 댕기를 자름으로써 세상 버림을 표현한다.
  단발령 동쪽 기슭은 숲과 다양한 양치류의 군락을 지그재그로 통과하는 좁은 비탈길의 연속이었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는 길, 물살이 휘몰아치는 깊은 여울, 메밀을 재배하고 있는 층계식 밭이 있는 계곡의 마을들, 갈라진 틈마다 소나무와 감나무의 작은 숲이 생긴 거대한 회색 바위들이 온종일 이어졌다. 물이 조랑말의 등까지 차오르는, 물살이 센 여울과 싸우면서 늦은 오후에야 골짜기로 접어들어 승려들이 만들어 놓은 넓고 평탄한 도로를 만날 수 있었다. 그 길은 요란한 소리를 내는 시냇물을 굽어보며 멋진 전나무와 소나무 숲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저녁 무렵에 내금강면 정양동(正陽洞)에 이르자 벌어진 나뭇가지들 사이로 저녁노을에 붉게 물든 화강암 암벽과 봉우리가 보였다. 붉게 물든 나무와 짙어가는 석양이 침엽수의 푸른 그림자를 비추고 있었다. 그 밑으로 요란하게 흐르는 급류에는 부서지는 물방울들의 반짝거림이 있었고 소나무의 싱그러운 향기를 담은 이슬이 무겁게 떨어졌다. 계곡이 점점 좁아지고 침엽수의 푸른 그림자가 길어짐에 따라 경치는 점점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워졌다.
  승려들이 길을 닦기는 했으나 다리까지 마련하지는 않아서 건너기 어려운 개울들이 곳곳에 있었다. 개울을 건널 때 마부들은 외나무다리를 밟고 일찌감치 건너가 버리고 조랑말들은 오로지 혼자의 힘으로 분투해야 했다. 깊은 물에 들어서자 나는 물 온도가 거의 얼음처럼 차갑다는 것을 알았다. 가장 혹독한 개울을 건너자마자 금강산의 서쪽에 위치한 오래된 고찰 장안사가 보이기 시작했다. 심하게 곡선을 그린 지붕을 가진 엄청난 규모의 종교적 건축물들이, 골짜기의 가장 좁은 협곡 중의 한 곳, 키 작은 풀들이 촘촘히 자라난 고원에 밀집해 있었다. 그곳은 1년 중 4개월이 눈 때문에 외부로부터 단절되었으며, 불교도들에게 평화로운 피난처를 제공하는 산들이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절 정문 앞의 시내를 건너 조선에서 왕실 수호를 상징하는 ‘붉은 화살의 문’이란 뜻의 홍살문을 통과하자 우리는 어느새 장안사 경내로 들어와 있었다. 장안사에는 종교적 드라마들의 무대를 이루는 크고 작은 건물들, 종각(鐘閣)과 비각(碑閣), 참배객들의 조랑말을 위한 마구간, 방들, 승려들의 숙소, 승려들을 위한 요사채(식당), 절의 하인들과 새내기 승려들을 위한 숙소, 큰 부엌, 넓은 응접실, 여승방 등이 있었다. 이러한 것들 외에도 절름발이, 청각장애인, 시각장애인, 장애인, 그리고 과부, 고아, 극빈자 등 괴로운 사람들을 받아들여서 돌보는 숙소도 따로 있었다. 이런 식객들이 백여 명에 달했는데 절에서 잘 대접받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승려들, 절의 불목하니07들, 승려의 길을 걸으려 하는 동자승들 사이에 l00~120명가량 되는 비구니들이 있었다. 이 비구니들은 소녀로부터 87세에 이르는 노파까지 모든 연령층을 포괄하고 있었다. 이 많은 수의 사람들은 산 아래 있는 사원 토지의 임대료와 생산물, 절을 찾는 신도들의 헌금, 그리고 일종의 종교적 수행으로 멀리 서울의 사대문까지 탁발(托鉢)하러 다니는 승려들이 모아온 시주로 부양되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승려들이 사대문 안에 들어선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으나 명성황후의 포고령에 따라 최근에는 점점 출입이 자유로워지고 있다.
  장안사의 첫인상은 숲 속에 자리한 규모의 엄청남이었다. 그런데 그 숲 속에는 널빤지의 각재와 판재들이 꼿꼿한 소나무와 커다란 전나무 아래 잔뜩 쌓여 있었다. 40명의 목수가 거기서 톱질을 하고 먹줄을 치고 망치질을 하고 있었으며 50명쯤 되는 노동자들이 커다란 통나무들을 거친 장단의 노랫소리에 맞춰 끌어당기고 있었다. 한국인들의 종교적 열정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 거대한 사원의 보수공사는 거의 절을 새로 짓는 것과 맞먹는 대역사(大役事)처럼 느껴졌다.
  금강산의 절경과 더불어 금강산에 종교적인, 인간적인 분위기를 더해주는 55개의 사원과 암자들 가운데 장안사는 3대 대찰(大刹)의 하나이며, 의심할 바 없이 가장 오래된 고찰(古刹)이었다. 한국의 역사를 인용한 캠벨 씨의 고증에 의하면 장안사는 신라왕 법흥(法興)의 통치기인 515년, 진표(眞表)라는 승려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신라는 한국사에서 가장 중요한 고대 왕국으로 후일 고려에 통합된다.
  장안사의 가장 큰 본전(本殿)은 원(元)나라 불교사원 양식의 영향을 받은 것 같은 고색창연하고도 운치 있는 건물이다.08 무거운 기와를 얹은 14.6m 높이의 직사각형 지붕과 화려하게 채색된 기둥에 떠받쳐진 처마를 가지고 있다. 정교하게 얽혀진 지붕은 그 내부에서 섬세하게 조각되고 거대한 대들보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 채광창의 역할을 겸하여 법당 안에 ‘희미한 신성의 빛(dim religious light)’을 조성하는 정문의 문틀은 대담한 솜씨의 격자 세공품으로 화려한 금색으로 채색되어 있었다.
  실제 불당들의 지붕은 반경 91cm 정도 되는 통나무 기둥이 떠받치고 있었고 천장은 갖가지 색상과 금빛의 복잡다단한 모양새로 치장되어 있었다. 힌두 양식임이 분명한 외양을 갖춘 불상이 형언할 수 없는 심원한 표정으로 정교한 그물코 모양의 목재 차양 아래 놓여 있었다. 앞에는 제단이 있어 놋향로와 불경, 그리고 정기적으로 시주를 올리는 망자들의 명단이 얹어져 있다. 불당 주위에는 상당히 고급스러운 비단으로 짠 여러 개의 깃발이 걸려 있었다.
  사성전(四聖殿)에는 각기 다른 자세로 묵상하거나 정관(靜觀)09하고 있는 세 부처를 모셔놓았다. 또 거기에는 놀랍게도 부처와 그 행자들을 비단 금실로 훌륭하게 수놓은 그림이 하나 걸려 있었는데 승려들은 그것이 14세기의 작품이라고 주장했다. 옆벽을 따라서 수없이 많은 요괴와 동물 그림이 그려진 이곳을 ‘열 판관의 사원[冥府展]’이라 하였다. 사람들이 자주 들락거리는 탓에 향내와 촛불이 자욱했지만 각 판관 뒤쪽에 걸린 그림들은 지옥에서의 고통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어 꽤 볼만했다. 그 그림들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무섭고 지옥 예술에 관한 천재들의 전시품 같아서, 주산군도(舟山群島) 정해(定海)10에 있는 관음사의 지옥화(地獄畵)를 떠올리게 했다.
  성전과 일반 객실 외에도 관광차 장안사로 오는 관리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지어놓은 관사(官舍)도 있었다. 장안사에서 내가 묵을 만한 곳을 찾기 힘들었을 때 어느 친절한 고승(高僧)이 자신의 거처를 내주었다. 불행히도 그곳은 식객들이 쓰는 부엌 옆이어서 방 밑으로 아궁이의 열기가 그대로 흘러들어와 나는 섭씨 33.5도의 온도에서 거의 타죽을 지경이었다. 상상할 수 없는 그 위험성을 아무리 호소해도 소용이 없어서, 나는 문과 열린 창문 옆에서 꼬박 밤을 새워야만 했다. 그 방에 갖춰진 가구라면 불단과 선반 위에 얹힌 관음상 정도였고, 책이 몇 권 있었는데 내가 아는 바로는 불교의 고전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 책들은 나중에 내가 묵은 방에 있었던 것처럼 두껍지는 않고 성스러움을 일깨워주는 내용과는 거리가 먼 그림들이 잔뜩 그려져 있었다. 옆방도 마찬가지로 뜨거웠고, 공기가 통할 만한 조그만 틈새도 없이 닫힌 채로 서른 명의 객들이 밤새 이리저리 뒤척거리고 있었다.
  여기서 밤 아홉 시는 한밤중이다. 새벽 네 시가 되면 승려들이 기침해서 종을 치는데, “둥! 둥!” 하고 종이 울리면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염불 소리가 들린다. 명랑하다가도 금세 생기 없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예비승려들은 영리하고 날렵한 10살에서 13살에 이르는 장안사의 많은 고아 소년들이다. 그들은 아직 수행자이지만 언젠가는 정식 승려가 될 사람들이다.
  천국에서 이틀을 보낸 듯한 장안사의 아름다움에 대해 조금은 아껴서 적는 것은 양보의 미덕이라 해야겠다. 저 나지막하고 푸른, 반달 모양의 고원을 뒤로하고 물러서는 언덕은 흡사 군대의 조용한 퇴각처럼 느껴졌다. 뒤쪽이나 옆쪽이나 거의 수풀 옷을 입은 암벽이 성처럼 둘러싸고, 앞쪽으로는 건널 만한 다리도 없는 급류다. 분홍빛이 도는 거대한 화강암 바위 사이를 급류가 시원하게 천둥소리를 내면서, 주저하고 얼쩡거리는 모든 것을 몰아내며 달리고 있었다. 새벽의 장밋빛 속에서, 저물녘의 황혼빛 속에서 혹은 긴 한낮의 희미한 금속성의 푸른빛 속에서나, 한결같이 이 산맥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 중의 하나인 왼쪽 봉우리의 거대한 암벽은 끝없는 감탄을 자아냈다. 수직으로 솟은 거대한 갈비뼈 모양의 저 위용은 파이프 오르간의 발음부(發音符) 기둥에 비유될 만한 데, 이런 파이프 오르간의 형상은 이 산맥에서 드문 것이 아니다.
  골짜기와 암붕(岩棚)의 중간쯤에 미쳐서는 환상적인 침엽수림과 철쭉이 뿌리를 내리고 있고 더 아래로 가면 짙푸른 숲에 뒤덮여 모든 형상이 묘연해졌다.(다음 호에서 계속)

 

 


01 사실 이사벨라는 우울증과 어지럼증에 시달리던 허약한 여성이었다. 이런 그녀가 세계 여행을 시작하게 된 것은 의사가 배를 타고 장거리 여행을 하라는 처방을 내렸기 때문이다.(최성일 저,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 3』,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2006, pp.131~132 참조)
02 〈문화콘텐츠닷컴〉, 근대초기 한국문화 과거로 가는 시간여행-비숍의 조선여행, 2012, 한국콘텐츠진흥원 참조.
03 현재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 산양리 지역이다. 금강산으로 가는 길목인 화천과 철원의 중간지점에 위치해 있다.
04 강원도 김화군 원동면 방평리.
05 김화군 동구면 통화리의 마을.
06 “루비콘 강을 건너다”는 표현은 “돌이킬 수 없는 정도로 진행된 일을 그대로 밀고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의 뜻으로 쓰였다. 기원전 49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주사위는 던져졌다”고 외치고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군했다. 당시 카이사르가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는 것은 로마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되었다.[네이버 지식백과 - 루비콘강(시사상식사전, 2013, 박문각)]
07 절에서 밥을 짓고 물을 긷는 일을 맡아서 하는 사람.
08 장안사의 대웅보전, 사성전, 명부전, 신선루, 수정각 및 여러 요사들은 고려 충혜왕 때 고려 출신으로 원나라 순제(順帝)의 정실이 된 기(奇)황후가 관원과 금 천 정(錠)을 고려에 파견하여 고려인 굉변(宏卞)의 감독 아래 중건한 건물들이다. 그 뒤 여러 차례 화재와 복구를 거듭했으나 이 시기 양식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09 무상한 현상계 속에 있는 불변의 본체적ㆍ이념적인 것을 심안(心眼)에 비추어 바라보는 것.
10 중국 절강성(j折江省) 북동부 항주만(抗州灣) 밖 동중국해에는 4백여 개의 작은 섬들이 있다. 해상교통의 요충지인 이 섬들을 주산군도(舟山群島)라 하며, 그 중심에 있는 도시가 정해(定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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