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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39년(2009)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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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의 발자취를 찾아서(31) : 솥이 들썩이니 미륵불이 출세하리라

솥이 들썩이니 미륵불이 출세하리라

 

 

글 대순종교문화연구소

 

▲ 개문납객 기수기연(여주본부도장 포정문)

 

 

  1902[壬寅]년 김형렬이 상제님을 모시고 있을 때 그의 집 형편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형렬이 집에 식량이 떨어져 다른 손님이 오는 것을 괴롭게 여기자 상제님께서는 “개문납객(開門納客)에 기수기연(其數其然)01이라 하나니 사람의 집에 손님이 많이 와야 하나니라.”고 충고하셨다.

  형렬은 상제님께 보리밥을 올리는 등 공궤(供饋)02가 소략함을 근심하고 있었는데, 가뭄 때문에 밭에 심은 채소도 잘 안 되어 더욱 걱정하게 되었다. 그 사정을 아신 상제님께서 “산중에 별미가 있는 것이 무엇이리요. 채소의 별미라도 있어야 할 터이니라. 걱정 근심을 말라.”고 하시더니 과연 이후부터 가뭄에도 불구하고 채소가 잘 자라 형렬이 한결 근심을 덜 수 있었다.

  추석이 다가오자 형렬은 음식을 장만하기 위해서 쇠 솥을 팔기로 작정하였다. 이를 보신 상제님께서는 “솥이 들썩이니 미륵불(彌勒佛)이 출세하리라.”고 이르셨다.

  상제님께서는 강세하시기 전에 전라도를 대표하던 사찰인 금산사(金山寺)03 미륵금불에 30년간 임어해 계신 적이 있으셨다. 그 미륵금불은 천여 년 전인 766년경 진표율사(眞表律師)04가 건립한 것이다. 그런데 그 금산사 미륵불은 용추(龍湫=龍沼)05를 숯으로 메우고 ‘솥’을 올려놓고 나서 봉안되었다. 대개의 경우 불상 밑에는 좌대(座臺)인 연화대(蓮花臺)가 있기 마련인데, 금산사 미륵불처럼 불상 밑에 솥이 있는 것은 매우 희귀한 경우이다.

  원래 이 미륵불은 협시불(挾侍佛)이 없는 독존불(獨尊佛)이었다가 1597년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고, 1627년 미륵전을 중건할 때 흙으로 빚어 만든 소조상(塑造像)에 도금을 한 불상으로 다시 만들어졌다.06 이때는 좌우에 협시불 하나씩을 두어 ‘山’ 글자 형태를 띤 삼존불07이었다. 바로 이 미륵장륙상(彌勒丈六像)08에 상제님께서는 30년간 영(靈)으로 머무르셨던 것이다.09

  미륵불이 솥 위에 올라있는 이 모습은 상제님이신 증산(甑山)과 도주님이신 정산(鼎山), 양산(兩山)의 진리를 암시하여 도의 근원을 밝혀놓은 것이다.10 다시 말해 도의 연원(淵源)은 증산(甑山)·정산(鼎山) 양산이며, 미륵이 중생을 제도하는 즉 천하창생을 건지는 진리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상제님께서 솥이 들썩이니 미륵불이 출세하리라고 하신 말씀에는 바로 이러한 배경이 있었다.

  가을이 되자 상제님께서 형렬에게 “풀을 한 곳에 쌓고 쇠꼬리 한 개를 금구군(金溝郡) 용암리(龍岩里)11에서 구하여 오라. 또 술을 사오고 그 쌓아놓은 풀에 불을 지피고 거기에 쇠꼬리를 두어 번 둘러내라.”고 이르시고 다시 형렬에게 “태양을 보라.”고 말씀하셨다. 형렬이 햇무리가 나타났음을 아뢰자 상제님께서는 “이제 천하의 형세가 마치 종기를 앓음과 같으므로 내가 그 종기를 파하였노라.” 하시고 형렬과 같이 술을 드셨다.

  선천은 인간 사물이 모두 상극에 지배되어 세상이 원한이 쌓이고 맺혀 삼계를 채웠으니 천지가 상도(常道)를 잃어 갖가지의 재화(災禍)가 일어나고 세상은 참혹하게 되었다. 상제님께서는 이것을 세상이 종기를 앓음과 같다고 비유하시고 종기를 짜내는 공사를 통하여 이를 치료하신 것이다.

  한편 형렬의 집이 있던 하운동은 원래 산중이라 길이 매우 좁고 험하여 다니기 매우 불편하였다. 상제님께서는 언제나 출타하시기 전에 먼저 글을 써서 신명에게 치도령(治道令: 길을 닦으라는 명령)을 내리셨으니, 여름에는 나무에 내린 이슬이 바람에 떨어지고 겨울에는 진흙 길이 얼어붙기도 하고 쌓인 눈이 녹기도 하였다고 한다.

 

▲ 형렬이 살았던 전북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하운동에는 그의 선산과 재실(齋室)인 영사재(永思齋)가 있다. 1902년 형렬은 이곳 혹은 이 주변에서 상제님을 모시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지도에서 알 수 있듯이 이곳은 산중이어서 길이 좁고 험하여 다니기 불편하다.

 

 

 

 


01 문을 열어 손님을 맞아들이니 그 수(數)가 그러하다. 이 말은 최수운이 지은 『동경대전(東經大全)』 「수덕문(修德文)」의 한 구절이다. 胸藏不死之藥弓乙其形 口誦長生之呪 三七其字 開門納客其數其然肆筵說法其味其如冠子進退若有三千之班童子拜拱倚然有六七之詠年高於我是亦子貢之禮歌詠而舞豈非仲尼之蹈{가슴에 불사약을 지녔으니 그 형상은 궁을이요, 입으로 장생하는 주문을 외우니 그 글자는 스물한 자라. 문을 열어 손님을 맞아들이니 그 수가 그러하고, 자리를 펴놓고 법을 베푸니 그 맛이 그럴 듯하다. 어른들이 나아가고 물러가는 것은 마치 삼 천 제자의 반열 같고, 어린이들이 읍하고 절하는 것은 육칠의 읊음[옛날 공자가 제자들에게 “각기 가슴에 담고 있는 뜻을 말해 보라.”고 하니, 증석(曾晳, 증자의 아버지)이 말하기를, “갓을 쓴 어른 오륙 인과 어린이 육칠 인을 데리고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 : 기우제를 드리는 단)에서 바람을 쐬고 시를 읊으며 돌아오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즉 수운이 문답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편 것을 바로 옛날 공자가 문답을 통하여 가르침을 편 것에 비유하여 이른 말임]이 있는 것 같도다. 나이가 나보다 많으니 이 또한 자공의 예와 같고, 노래 부르고 춤을 추니 어찌 공자의 춤과 다르랴}

02 음식을 조심스럽게 바침.

03 금산사는 조선후기까지 전라도를 대표하는 절로서의 위격을 가지고 있었다. 일제시대에 위봉사의 말사로 강제로 배속되는 등 사세가 위축되었지만 해방이 되고 나서 다시 그 위격을 회복하였다.(김광식, 「일제하 금산사의 寺格」, 『근현대불교의 재조명』, 민족사, 2000 참고)

04 진표율사의 자세한 생애는 「진표율사와 미륵신앙」(김성수, 『상생의 길』 제3호, 2005, pp.8~25) 참고.

05 물 웅덩이. 연못.

06 한국불교연구원, 『한국의 사찰 11, 금산사』, 민중서관공무국, 1994, pp.67∼70

07 가운데 미륵불상(11.8m)을 중심으로 좌측의 협시상(挾侍像)은 법화림(法花林) 보살이고 우측의 협시상은 대묘상(大妙相) 보살이며, 두 보살의 높이는 8.8m이다.

08 장륙상(丈六像)이란 보통의 불상보다 훨씬 큰 규모인 1장 6척(열여섯 자, 4.8m)의 거대한 불보살상을 지칭하는 말이다.

09 현재 금산사에 있는 미륵금불은 1934년 원인모를 화재로 불에 타서(미륵전과 옆의 두 불상은 타지 않았음) 1938년 당시의 조각가 김복진에 의해 다시 조성되어 새로 모셔진 것이다. 이 역시 도금소조상(塗金塑造像)이다. 그 후 양 옆으로 두 구의 보살상이 추가로 봉안되어 전체적으로 ‘出’ 글자 형태가 되었다.(각주 6의 서적 참고)

10 『대순지침』, p.15

11 現 전북 김제시 금산면 쌍룡리 금평 저수지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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