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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39년(2009)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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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典經』속 역사인물 : 박팽년(朴彭年)

박팽년(朴彭年)


교무부

 

▲ 박팽년 위패를 모신 서묘와 숙모전

 

 

  “…공주 동학사(東鶴寺)에 이르렀도다. 이 절의 경내에 동계사(東祠) 삼은각(三隱閣)과 단종왕의 숙모전(肅慕殿)이 있고 생육신과 사육신을 추배한 동묘 서묘가 있으니 신라 고려 조선의 삼대 충의 지사를 초혼한 곳이로다. 이곳의 관리자는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팽년(朴彭年)의 후손이고 정기적으로 청주에서 내왕하면서 관리하고 있었도다.…” (교운 2장 57절)

 

 

  우리에게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으로 익히 알려진 박팽년(1417~1456)은 조선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순천(順天), 자(字)는 인수(仁)이다. 평소 가야금 타기를 즐겨 스스로 호(號)를 취금헌(醉琴軒)이라 하였다.

  1417년(태종 17) 충남 회덕(懷德)에서 이조판서를 지낸 아버지 중림(仲林)과 동지중추원사를 지낸 안동김씨 김익생(益生)의 딸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박팽년은 1432년(세종 14)에 생원이 되었고, 1434년(세종 16)에는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그는 집현전의 정9품 정자로 제수되면서부터 이후 21년간의 관료 생활을 했는데, 그 중 18년간을 당대 학문의 중심지였던 집현전에서 학사로 활동하였다. 집현전에서 최고 실무관인 부제학까지 역임하면서 그는 각종 사서 편찬사업에서부터 훈민정음의 창제와 번역에 이르기까지 집현전과 관련된 모든 일에 공헌했다.

  박팽년은 경술과 문장 그리고 필법이 모두 뛰어나 집현전 학사들로부터 집대성(集大成)이라는 칭호로 존경을 받았다. 특히 필법은 매우 탁월하여 위진남북조시대의 종유(鍾繇, 151~230)01와 왕희지(王羲之, 307~365)02에 버금갔다고 전하여지고 있다.

  1450년, 박팽년이 집현전에서 직제학을 역임하고 있을 당시 세종(世宗, 1397~1450)이 붕어하자 세자 시절부터 섭정(攝政)을 하였던 문종(文宗, 1414~1452)이 즉위하였다. 그러나 문종은 왕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몸이 쇠약해져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장차 홀로 남게 될 어린 세자의 안위를 걱정하기에 이른다. 이에 문종은 자신이 신임하던 집현전 학사인 박팽년과 성삼문 등을 불러 어린 세자인 단종(端宗, 1441~1457)의 보위를 지켜 줄 것을 당부하였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문종이 걱정한 대로 수양대군이 종친들의 수장이 되어 조정의 실세로서 모든 권력을 장악하여 결국 1455년(단종 3) 윤 6월 11일 단종의 선위(禪位)로 임금이 되었다.

  일이 이에 이르자 청렴한 유학자로서 민생을 살피며 꼿꼿하게 관직 생활을 해오던 박팽년은 더 이상의 울분을 참지 못하고 경회루 연못에 뛰어들어 자살하려 하였다. 이를 본 성삼문(成三問)이 “…왕은 지금 상왕(上王)으로 계시니, 우리는 죽지 말고 그대로 뒷일을 도모해야 할 것이오. 만일 도모하다가 성공을 못할 때 죽어도 늦지 않을 것이오. 오늘의 일은 국가에 무익할 뿐이오.”라고 하며 만류하니 박팽년은 충의지심(忠義之心)에 분루(糞瘻)를 삼키며 그의 말을 따랐다. 이후 그는 단종 복위를 위한 뜻을 세웠다.

  박팽년은 이듬해 내직인 형조참판이 된 후 성삼문, 유성원(柳誠源), 이개(李塏), 하위지(河緯地), 유응부(兪應孚), 김질(金) 등과 함께 은밀하게 거사를 모의(謀議)해 나갔다. 그렇게 때를 기다리던 중 기회가 찾아왔다. 세조가 즉위하고 1년이 지날 무렵 명나라로부터 왕의 책봉을 승인하는 고명(誥命)이 오기로 된 것이다. 박팽년은 천우신조라 여기고 창덕궁에서 세조가 상왕인 단종을 모시고 명나라 사신들을 위한 만찬회를 열기로 한 날〔1456년 6월 1일〕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그리고 연회장에 왕의 호위역인 운검(雲劍)으로 성승(成勝, 성삼문의 아버지)과 유응부가 서도록 조치한 뒤 신호에 따라 세조와 추종자들을 일제히 처치하고 그 자리에서 단종을 복위하기로 계획하였다.

  그러나 이날 아침 세조는 연회장소인 전내가 좁다는 이유를 들며 갑자기 운검들의 시위(侍衛)를 폐지하였다. 이에 유응부 등은 거사를 그대로 밀고 나가려고 하였으나 상황이 불리하다고 판단한 박팽년과 성삼문의 만류로 거사는 연기되고 말았다. 이렇게 계획이 어긋나자 사태의 불리함을 보고 김질은 자기의 목숨이라도 보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지, 고위 관직에 있던 장인인 정창손(鄭昌孫)을 찾아가 그 동안에 밀모했던 모든 사실을 낱낱이 실토했다. 다음날 정창손은 사위인 김질과 궁궐로 달려가 “성삼문이 김질에게 ‘상왕의 복립(復立)을 창의(唱義)한다면 그 누가 따르지 않겠는가?’ 하며 세조를 죽이자 했다”고 고변하였다. 이렇게 허무하게 거사는 발각되었고 상왕 복위기도 사건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분노한 세조의 명으로 관련자들은 잡혀왔으나 아무도 잘못했다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육신록(六臣錄)』은 잡혀온 박팽년이 “내 임금(단종)의 신하지 어이 나으리(세조)의 신하리오”라고 말했고, 이개는 “충신이 두 임금을 섬기리까.”라고 항의했다고 전한다. 유응부는 성삼문 등을 돌아보며 “사람들이 ‘서생(書生)들과는 함께 일을 모의할 수 없다’고 하더니 과연 그렇구나”라고 탄식하며 고문을 받고 죽어갔다. 목숨은 내주어도 마음은 주지 않았던 충신들의 최후였다. 1456년 6월 7일, 박팽년의 나이는 40이었다.

  박팽년은 죽은 후에도 다른 모의자와 함께 능지처사(凌遲處死)의 형벌을 또 당하게 된다. 그러나 이 모습을 보며 세조는 “팽년 등은 당세의 난신이지만 후세의 충신이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만고에 이름을 남긴 충신이지만 당시엔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면치 못했다. 세조는 관련자의 부친과 형제, 아들들을 모두 죽여 대를 끊었다. 박팽년의 집안 역시 아버지는 능지처사되고, 동생 대년(大年)과 아들 헌(憲), 순(珣), 분(奮)이 참형되어 삼대(三代)가 참화를 입었다. 이와 함께 그의 어머니, 처, 제수 등도 대역부도(大逆不道)의 가족이라 하여 공신들의 노비로 끌려갔다. 이때 대구 관아의 관비가 됐던 순의 아내 이씨가 아들을 낳았다. 때마침 친정 여종이 딸을 낳아 아이를 바꾸게 되었고 외할아버지에 의하여 박비(朴婢)라는 이름으로 비밀리에 키워졌다. 박비가 17세가 되었을 때, 그의 이모부이자 경상도 관찰사로 재직 중이던 이극균(李克均)이 처가에 들렀다가 성장한 그를 알게 되어 자수할 것을 권하였다. 그리하여 성종은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크게 기뻐하면서 특사령을 내리는 동시에 이름도 일산(壹珊)으로 고쳐 주었다. 이로써 사육신 중 박팽년의 가문만은 대(代)를 이을 수 있었다.

  단종 복위 사건이 일어날 무렵에 나이가 어렸던 남효온(南孝溫)03이 성장하여 이 사건의 많은 피해자 중 충절과 인품이 뛰어난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 등 여섯 사람을 골라 그 행적을 소상히 적어 후세에 남기니, 이것이 『추강집(秋江集)』의 「사육신전(死六臣傳)」이다. 「사육신전」은 이후 조정에서 금지령을 내렸으나 집집마다 간직하여 외우다시피 하였다 한다. 이처럼 사육신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충신으로 꼽혀왔으며, 그들의 신원(伸寃)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노력해온 결과 마침내 1691년(숙종 17)에 이르러 관작(官爵)이 회복되게 되었다.

  박팽년은 1758년(영조 34)에 다시 자헌대부(資憲大夫)의 품계를 받아 이조판서에 증직(贈職)되었고 장릉(莊陵)04의 충신단(忠臣壇)05에 배향되었다. 또한 과천 민절서원(愍節書院), 홍주 노운서원(魯雲書院), 영월 창절서원(彰節書院) 등에서도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정(忠正)이고, 묘는 서울 노량진 사육신묘역에 있다. 그의 묘에는 그저 박씨지묘(朴氏之墓)라고 새겨진 표석(表石)만이 있다. 이 묘역은 1978년 사육신공원으로 단장되었다.

 

 

 

◈ 참고자료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9』, 웅진출판사, 1995
• 이현희, 『이야기 한국사』, 청아출판사, 2000
• 최영성, 『한국유학통사 上』, 심산출판사, 2006
• 이덕일, 事思史; 조선왕을 말하다.

 

 

 


01 중국 삼국시대 위(魏)나라의 정치가이자 서예가(書藝家).

02 중국 동진(東晉)의 서예가. 해서, 행서, 초서의 각 서체를 완성함으로써 예술로서의 서예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03 1454년(단종 2)부터 1492년(성종 23)까지의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의령. 자는 백공(伯恭), 호는 추강(秋江)·행우(杏雨)·최락당(最樂堂)·벽사(碧沙)이다. 아버지는 생원 전()이다. 김종직(金宗直)·김시습(金時習)의 문인이다.

04 사적 제196호로 영월에 있는 단종의 무덤이다. 위치는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산133-1이다.

05 조선조 제22대 왕인 정조 15년(1791)에 어명으로 건립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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