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 : 대진대학의 현장 포천군을 찾아서
대진대학의 현장 포천군을 찾아서
이 고을에는 옛부터 "왕방대학가자"는 말이 전해 오기도 해
<연구실>
▲ 청산녹수(靑山綠水)의 고장인 포천군 전경
포천의 연혁
즉, 마홀(馬忽)이라는 명칭이 그것이며 명지라는 별호도 이때부터 생겼다. 고구려때 부르던 마홀이라는 명칭은 삼지연에 의하면 사독문자(史讀文字)방식에 의한 표기로 물골(水城) 즉, 물이 많은 골을 借音한 것이라고 한다. 馬는 물의 옛말 「물」또는 이것의 옛말 「매」를 차음한 것이고 忽은 고대 지명에 흔히 붙은 접미사로서 「골」을 차음한 것이다. 견성(堅城)은 통일신라시대의 진흥왕 때에 새로 이 성을 쌓고 방어의 거점으로 삼았다는 연유로 명명되었으며 경덕왕 때에는 청성(靑城)이라고 불렀다. 고려 초에 와서는 포주(抱州)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다가 고려 성종때에는 별호(別號)로써 청화(淸化)라고도 하였으며 조선 태조 13년(1413년)에야 비로소 포천(抱川)이라 부르게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지금의 포천이라는 명칭은 물이 외부로부터 흘러 들어오는 것이 없고 외부로 흘러 나가기만 한다고 하여 抱(안을 포), 川(내 천)으로 이름하였다고 한다.
포천은 주변지역과의 관계에서 볼 때 다른 8개의 시군과 교통이 원활할 뿐만 아니라 특히 서울 북부 지방을 연결하는 중요한 길목에 위치한다. 그래서 「동국여지승람」에서 『서울에서 북쪽으로 가는 자는 양주를 지나서 반드시 여기에 머문다』라고 하였으니 현재 서울-원산을 잇는 43번 경원국도가 서울에서부터 의정부시를 거쳐 포천 중심부를 관통하고 있으며 앞으로 남북한 자유 왕래가 있게 되면 서울에서 금강산으로 들어가는 모든 차량은 반드시 포천을 지나야 하므로 그 위치가 매우 중요하다 하겠다.
이처럼 험준하고 높은 산이 많은 포천은 자연적으로 깊은 계곡과 맑은 물이 없을 수 없다. 백운산(白雲山)에서 출원(出源)하여 동쪽으로 흐르는 영평천의 맑은 물과 관인면(官仁面), 영북면(永北面)을 거쳐 유유히 흐르는 짙푸른 한탄강이 합류하여 임진강의 상류를 이루고 있으니 실로 청산녹수(靑山綠水)한 고장이라 하겠다. 이 물줄기를 따라 옛 시인과 묵객이 오고 간 흔적이 도처에 남아 있는가 하면 벼슬하던 양반들이 만년(晩年)에 은거하던 승지(勝地)들도 많이 있다. 포천의 명승가운데 국민 관광지로 지정된 산정호수(山井湖水)를 비롯하여 포천팔경(일명 永平八景), 한탄강변의 충암절벽, 백운동 계곡, 현등산등의 명산대천은 포천의 산명수려한 가치를 한결 돋보이게 한다. 이중 고래로부터 잘 알려진 영평팔경(永平八景)의 명승으로는 화적연(禾積淵), 금수정(金水亭), 창옥병(蒼玉屛), 와룡암(臥龍岩), 낙귀정지(樂歸亭址), 백로주(白鷺州), 청학동(靑鶴洞), 선유담(仙遊潭)등이 있다.
이 산은 신라말엽인 872년경에 도선국사가 정업(淨業)을 닦을 때 국왕이 친히 행차하여 격려하였다 하여 왕방산(旺方山)이라 이름하였고 그 절을 왕방사라 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절터에 30여년전 청매화상(淸梅和尙)이 현 보덕사(普德寺)를 복원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태조가 왕위를 물려주고 함흥에 있다가 서울로 환궁하는 도중 왕자들의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쟁의 소식을 듣고 그 아픈 마음을 달래기 위해 이 산에 있는 사찰을 방문 채류하였다 하여 왕방산이라 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면 왕방산은 해룡산(海龍山) 남쪽에 이태조가 잠저(왕이 되기전)할 때 논밭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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