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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38년(2008)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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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典經』속 역사인물 : 김봉곡(金鳳谷)

김봉곡(金鳳谷)

                                                     
교무부

 

  상제께서 전주 봉서산(全州鳳棲山) 밑에 계실 때 종도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시니라. 김봉곡(金鳳谷)이 시기심이 강한지라. 진묵(震)은 하루 봉곡으로부터 성리대전(性理大典)을 빌려 가면서도 봉곡이 반드시 후회하여 곧 사람을 시켜 찾아가리라 생각하고 걸으면서 한 권씩 읽고서는 길가에 버리니 사원동(寺院洞) 입구에서 모두 버리게 되니라. 봉곡은 과연 그 책자를 빌려주고 진묵이 불법을 통달한 자이고 만일 유도(儒道)까지 통달하면 상대할 수 없게 될 것이고 또 불법을 크게 행할 것을 시기하여 그 책을 도로 찾아오라고 급히 사람을 보냈도다. 그 하인이 길가에 이따금 버려진 책 한 권씩을 주워 가다가 사원동 입구에서 마지막 권을 주워 돌아가니라. 그후에 진묵이 봉곡을 찾아가니 봉곡이 빌린 책을 도로 달라고 하는지라. 그 말을 듣고 진묵이 그 글이 쓸모가 없어 길가에 다 버렸다고 대꾸하니 봉곡이 노발대발하는도다. 진묵은 내가 외울터이니 기록하라고 말하고 잇달아 한 편을 모두 읽는도다. 그것이 한 자도 틀리지 않으니 봉곡은 더욱더 시기하였도다. (공사 3장 14절)

 

 

  김봉곡(金鳳谷: 1575년 선조6~1661년 현종2)은 조선 후기의 문신(文臣)으로 전주(全州)에서 생원인 아버지 김희지(金熙止)와 남원양씨 부위(副尉) 공신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다. 본관은 광산(光山)이며, 이름은 동준(東準), 자(字)는 이무(而武), 호는 봉곡(鳳谷)이다. 1617년(광해 10)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김봉곡은 위풍이 당당하였으며, 인격이 뛰어난 인물로 경사(經史)와 역학(易學), 칠서(七書)를 비롯하여 음양(陰陽), 방술(方術)에 이르기까지 모두 정통하였다고 한다. 그의 스승인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 1548~1631) 역시 그의 학문적 깊이를 인정할 정도였다. 자료에 의하면 그는 유학자였지만 성리철학자가 아닌 예론가로 분류되고 있었다. 아마도 이는 스승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여겨진다.

  김봉곡이 살았던 당시 16~17세기의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정치·윤리 등 사회적으로 많이 피폐되었고, 경제적으로는 국가 재정의 결핍과 세금의 과다징수로 인하여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있던 시기였었다. 이에 국가의 기강을 바로 세울 수 있는 철학이 요구되기 시작하던 때였다. 조선시대의 학문과 사상은 성리학과 예학으로 대변되는데 성리학은 도(道)와 덕(德)의 실천 근거를 연구하는 학문이며, 예학(禮學)은 도와 덕의 실천 방법을 연구하는 학문이었다. 당시 분파간 당쟁으로 인해 성리학만으로는 그들이 추구하는 이상정치를 펼 수 없음을 깨닫고 사계 김장생을 비롯한 일부 도학자(道學者)들은 성리철학의 내면적인 것보다는 실천인 예(禮)를 통해서 정치적, 사회적 혼란을 치유하고자 하였다. 이를테면 예가 다스려지면 국가가 다스려지고 예가 문란해지면 국가가 혼란해진다고 하여, 예를 국가 치란(治亂)의 관건이라고 보았던 것이었다. 결국 김장생은 예의 실천을 통하여 인간의 선한 본성을 더욱 계발하고 그렇게 하여 사회 전체 구성원이 모두 자기 본성의 선함을 타인에게 베푸는 이상사회를 달성하고자 하였다.

  김봉곡의 스승인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은 이러한 사회 문제를 인식하고 사회질서 정립이라는 차원에서 예론(禮論)을 넓게 연구한 인물로 유명하였다. 그 스승과 그 제자라는 말처럼 김장생의 문인들은 사상과 처세면에서 김장생에게 큰 영향을 받았음은 당연하였다. 그들은 죽음도 불사하고 공도(公道)와 대의(大義)를 지키는 정신, 시속(時俗)과 타협하지 않는 기개와 청렴결백한 인품은 스승 김장생으로부터 받은 유산이었다. 특히 예를 통한 덕성함양을 강조한 김장생의 가르침으로 인해 춘추대의정신과 독자적인 예의 확립에 기여하였다고 한다.

  김봉곡 역시 스승 김장생의 영향을 받아 예학(禮學)에 관심이 많았음을 알 수 있는데 김봉곡의 예학에 관해 저술한 『대례곤집록(戴禮集錄)』·『의례문혜』 등을 볼 때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사승(師承)관계는 단순히 스승으로부터 지식만 전달 받는 것이 아니라, 후학은 선현의 학풍과 큰 뜻을 사모하여 도의를 높이고 예절과 겸양을 숭상하여 빈빈(彬彬: 문체와 바탕이 잘 갖추어져 훌륭함)한 사군자의 풍도(風道)를 익히도록 하는 것임을 볼 때 김봉곡이 예론가로 분류되어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 여겨진다.

  인조 때 김봉곡은 스승 김장생의 추천으로 의금부도사, 사헌부 감찰 등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병자호란 때는 인조의 남한산성 피난을 호위하였으며, 이후 강화가 성립되자 그는 강한 불만을 토로하고 향리(鄕里) 로 돌아가 후학을 양성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고 한다. 난(亂)이 평정된 이후에도 조정에서는 그의 뛰어난 능력을 인정하여 벼슬을 주어 수차례 정치에 끌어들이려고 하였으나 추호도 절의를 굽히지 않았다. 게다가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인 인목대비를 유폐할 때, 이를 찬성하는 상소를 올리려 하는 사람들에게 죽음을 무릅쓰고 반대를 할 정도로 강단이 있었다고 한다.

한편 문헌상의 기록과는 다르게 민간에서 전해져오는 김봉곡의 인품은 ‘시기심’이 많은 인물이며 진묵과 대립의 관계에 있는 인물로 전해지고 있다. 그 이유는 김봉곡은 진묵의 크나큰 포부를 무참히 좌절시킨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진묵은 부처의 화신으로 불릴 만큼 신이한 능력이 있었으며 상제님께서 불교의 종장으로 임명하실 만큼 법력이 뛰어 난 인물이었다. 봉곡 또한 당시 조선의 사상계에 유행했던 유·불·선 사상에 관해 어느 정도 학식이 있었음을 볼 수 있는데 그 근거로 경사(經史)와 역학(易學), 칠서(七書)를 비롯하여 음양(陰陽), 방술(方術)에까지 모두 정통했다는 것은 그 역시도 유·불·도에 상당한 식견이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뛰어난 봉곡과 진묵과의 사상적 교류가 가능했던 것은 당시 사회를 바꾸어 보고자 하는 공통된 목적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유학자 김봉곡은 예의 실천을 통해 혼란한 사회를 바로 세우려고 하는 이상사회를, 진묵은 당시 아무런 저항의 능력도 없이 핍박받던 민중들을 위해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비록 신분은 달랐지만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은 같았던 것이다. 낙향을 해서도 후학 양성을 했던 것도 이상사회를 달성하려는 그의 의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전경 구절에 언급되어 있는 내용처럼 진묵의 능력은 이미 김봉곡 자신이 범접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었다.

 

 

진묵대사소전과 몇몇 구전문헌01에 의하면 
 

  봉곡은 낙향(落鄕)하여 산수와 더불어 한적하게 지내는 터였다는데 마침 자신이 머물고 있던 마을 인근에 봉서사02라는 절이 있었다. 그곳에 진묵(震默: 1562~1633)이라는 노승(老僧)이 해박한 지식과 신통술을 갖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서 내심 그의 도량(度量)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싶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봉곡은 곡차를 곁들여 자주 진묵에게 접근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진묵이 스스로 봉곡에게 『성리대전(性理大典)』03을 빌려주기를 원하며 집으로 찾아왔다. 봉곡은 쾌히 승낙하여 책을 주었지만 의심하는 바가 있어 사람을 하나 딸려 보내 어떻게 하는지 감시를 시켰다. 진묵은 길을 걸으며, 대강대강 훑어본 뒤 한 권씩 땅에 떨어트리고 한 권의 발문만을 갖고 절로 돌아갔다. 뒷날 봉곡은 진묵에게 물었는데 “책을 빌려가서 버리는 것은 무엇 때문이요?”라고 하자, 진묵은 “고기를 잡은 뒤에는 통발을 잊는 법이지요(得魚者忘筌), 그렇게 빌려준 『성리대전』이 필요하면 내가 외울 테니 받아서 기록하시오.”라고 말하고는 큰 소리로 잇달아 모두 암송해 주는 것이었다. 이를 봉곡이 확인하니 한 글자도 틀림없이 모두 맞는 것을 보고 내심 ‘진묵이 불법(佛法)에 통달한 자인데 만일 유도(儒道)마저 통달한다면 내가 상대하기 어렵게 될 것이며, 불법도 크게 일어날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면서 몹시 시기 질투04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후에 진묵이 천상에 가서 경문을 가져왔으나 봉곡이 진묵의 육신을 화장하여 돌아 올 수 없게 만들었다고 한다.

 

 

  봉곡에게 성리대전을 빌려 모두 다 외워버리는 인물이라는 것은 진묵과 김봉곡에 관해 언급되어 있는 문헌에서는 모두 일치하고 있는 내용으로 진묵은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 이상의 경지까지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문헌과 자료로 볼 때 봉곡은 시기심이 많은 인물로 묘사되어진 것에 대해 일부 문헌에서는 상이한 부분도 있었지만 대부분 『전경』의 내용과 일치하고 있다.

 

 

 


 01 김명선, 『진묵대사 설화 연구』 자료 편 참조, 전주우석대학교 대학원, 1993, pp. 89~108

02 전북 완주군 용진면 서방산 남쪽 기슭에 있는 절. 금산사(金山寺)의 말사. 727년(신라 성덕왕 26)에 창건하고 고려 말에 나옹이 증축함. 진묵(1562~1633)이 이 절에 출가하였음. www. smgeco.net 전라북도청 미래사업과 홈페이지 참조. 이곳에 진묵대사와 김봉곡의 또 다른 일화가 소개되어 있음.

03 『전경』 공사 3장 14절에서는 「성리대전(性理大典)」으로 『진묵조사유적고(震默祖師遺蹟攷)』에서는 「주자강목(朱子綱目)」으로 표기되어 있음.

04 「震大師小傳」 부록 편에 김봉곡의 성격이 잘 드러나고 있다. “봉곡은 진묵이 불법에 통달한 자인데 만일 유도마저 통달 한다면 자기가 상대하기 어렵게 되고 또 불법이 크게 일어날 것을 두려워하여 … 진묵이 자리를 비운 그 틈을 노려 화장시켜 버렸다.” 「震大師小傳」 부록 편, pp153~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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