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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39년(2009)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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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소개 : 곡우(穀雨) 절후를 관장하는 소우(蕭瑀) 1

곡우(穀雨) 절후를 관장하는 소우(蕭瑀) 1

 

 

글 교무부

 

 

 

왕족출신으로 불교와 유교에 조예가 깊었던 소우

 

  소우(蕭瑀, 573~647)의 자(字)는 시문(時文)으로 양(梁, 502~557)01나라의 적통(嫡統)을 이은 왕가의 후손이다. 소우의 고조부(高祖父)는 양(梁)을 세운 무제(武帝) 소연(蕭衍, 464~549), 증조부(曾祖父)는 소연의 장자(長子)인 소명태자(昭明太子) 소통(蕭統), 할아버지는 선제(宣帝) 소찰(蕭察), 아버지는 명제(明帝) 소규(蕭)이다. 9세에 신안군왕(新安郡王)으로 봉(封)해졌는데 어려서 효행(孝行)으로 널리 알려졌다. 양나라가 망하고 봉국(封國)이 없어졌지만 손위 누이가 수(隋) 진왕(晉王) 양광(楊廣)의 왕비가 되었기 때문에 장안(長安)으로 들어왔다. 양광이 뒷날 제위(帝位)에 오르니 이가 곧 수양제[隋煬帝, 재위(在位) 604~617]이다. 소우는 수양제의 처남이 된다.

  소우는 독서를 즐겨하여 각종 경서(經書)를 두루 섭렵하였다. 그는 글을 잘 지었고 단정한 성품에 정직하고 성실하였으나 성격이 조급했다. 이러한 성격으로 경박하고 사치한 이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소우는 불도(佛道)를 좋아하여 항상 불도의 수행법을 행하였고 매번 승려들과 더불어 ‘고(苦)’나 ‘공(空)’과 같은 불교의 심오(深奧)한 부분에까지 언급할 정도로 조예(造詣)가 깊었다.

  소우는 유교에도 상당한 식견(識見)을 보였는데 일찍이 유효표(劉孝標)의 『변명론(辨命論)』이 선왕(先王)의 가르침을 손상케 하고 성명(性命)의 이치(理致)를 바르게 하지 못한 궤변(詭辯)이라고 비판하면서 『비변명론(非辨命論)』을 지었다.

  당대의 유학자인 유고언(柳顧言)과 제갈영(諸葛潁)이 소우의 『비변명론(非辨命論)』을 보고 감탄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유효표의 『변명론(辨命論)』 이후 수십 년간 성명(性命)의 이치를 논하던 사람들도 능히 이를 비판하지 못했다. 이제 그대의 『비변명론(非辨命論)』을 보니 이것으로 유효표의 허점을 논하기에 충분하다.”

  이렇게 소우는 유교(儒敎)와 불교(佛敎)에 두루 정통했다.

  600년[개황(開皇) 20] 양광(楊廣)이 태자(太子)가 되자 소우는 태자우천우(太子右千牛)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 27세였다. 그리고 604년[인수(仁壽) 4] 수 문제(隋文帝)가 죽고 태자 양광이 제위에 오르니 그가 앞서 언급한 수양제(隋煬帝)이며 태자비였던 소우의 누이는 황후(皇后)가 되었다. 그리하여 소우도 점점 그 벼슬이 올라 상의봉어(尙衣奉御), 검교좌익위응양낭장(檢校左翊衛鷹揚郎將)을 거쳤다.

  이러한 때에 소우는 병(病)에 걸렸는데 집안 사람들에게 의원을 부르지 말라면서 말했다.

  “하늘이 만일 내게 남은 생을 허락하신다면 벼슬을 피하여 숨어 살 텐데.”

  황후가 이 말을 전해 듣고 소우를 꾸짖어 말했다.

  “너는 나라가 망한 후에는 작은 관직에도 편안히 거처하지 못했고 높은 관직에 올라서는 괴상한 말을 하고 있다. 너는 재주가 있으니 그 재주로 입신양명하여 부모님의 이름을 드러내어야 마땅한 일인데 작은 병을 핑계 삼아 벼슬을 피해 숨어 살 생각을 하고 있으니 그 죄는 다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소우는 황후의 꾸지람을 듣고서야 의원을 불러 병을 치료하니 완치되었다. 그리고 황후의 강력한 권유로 다시 벼슬에 뜻을 두게 되었다. 이후 소우는 내사시랑(內史侍郞)에 임명되어 양제에게 진언(進言)할 일이 많았다. 그러나 일을 논의함에 있어 소우의 강직한 발언은 양제의 뜻에 거슬려 차츰 배척당하였다.

  이때 수나라는 양제의 3차에 걸친 고구려 원정이 성과 없이 끝난 시기였다. 성과 없이 끝난 고구려 원정에 대한 반발이 전국적인 반란으로 번져가고 있었지만 양제는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전국 순행(巡行)에 나섰다. 양제에게는 각지를 순행하여 천자(天子)로서의 위엄을 보이는 일이 반란의 불길을 잡는 것보다 더 큰일이었던 것이다.

  615년[대업(大業) 11] 가을에 양제는 북쪽 요새를 순시하였다. 그런데 양제가 안문[雁門, 산서성(山西省) 대현(代縣)]에 행차하였을 때 돌궐의 시필가한(始畢可汗)이 기병(騎兵) 수십 만을 이끌고 안문을 포위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돌궐의 움직임은 시필가한에게 시집간 의성공주(義成公主)에 의해 이미 예고된 것이었으나 이에 대한 대비는 전무했다.

  돌궐의 공격으로 안문에 있는 41개의 성 중에서 39곳의 성이 함락되었다. 양제의 행재소(行在所)가 있던 안문은 군사와 백성이 모두 합쳐 15만이었는데 식량은 20일을 지탱할 수 있을 뿐이었다. 돌궐의 공격으로 화살이 양제의 발 앞에 떨어지는 지경에 이르자 생명의 위협을 느낀 양제는 그의 어린 아들인 조왕(趙王) 양고(楊)를 안고 슬피 울었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소우가 계책을 내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돌궐의 풍속을 보면 가한(可汗)의 처(妻)가 중요한 회의에 참석합니다. 지금 돌궐에는 의성공주가 있지 않습니까. 의성공주에게 사자를 파견하여 우리의 사정을 알린다면 싸우지 않고서도 포위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도움이 못된다고 해도 해(害)가 될 일은 없을 것입니다. 또한 병사들은 폐하께서 고구려를 다시 정벌하러 갈 것이라고 생각하여 싸우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원컨대 폐하께서 조칙을 내리셔서 고구려 정벌을 단념하시고 오직 돌궐만을 토벌하겠다고 하신다면 병사들이 스스로 분발할 것입니다.”

  돌궐과 같이 전통적으로 기마군단(騎馬軍團)을 운용하던 중국 변방의 민족들은 식량과 각종 물품을 얻기 위해 중국을 수시로 침입하여 재물을 약탈하고 사람들을 잡아갔는데 이들에 대한 대비책은 중국의 중요한 과제였다. 중국이 자랑하는 만리장성(萬里長城)도 이들 중국 변방 기마민족들의 침입을 막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중국인들이 스스로 정한 그들의 국경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북방 이민족과의 대외관계에 있어 중국이 선택한 전략은 정벌과 정략결혼을 통한 관계개선이었다. 굳이 황제의 딸이 아닌 가짜 공주를 보낸다고 해도 중국과 이들 변방민족은 장인과 사위의 관계가 된다. 그리고 명목상 황제의 딸이 하는 결혼이었으므로 결혼 예물로 많은 공물이 넘어갔고 이는 변방의 기마민족들에게는 실질적인 이득과 함께 동족(同族)에게 자신의 지위를 과시하는 것으로 이용되었다. 변방의 기마민족으로서는 결혼을 통해 자신들의 뜻을 이룰 수 있었고, 중국은 결혼을 통해 전면전(全面戰)을 회피할 수 있었으며 자신들이 우위에 있음을 과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결혼이 성립되었다고 해서 양자 간의 모든 사안이 다 평화적으로 해소되지는 않았는데 시필가한의 안문 포위는 상호 간의 이해에 따라서 급변하였던 이 당시 중국과 변방민족간의 관계를 잘 말해주는 사건이었다.

  소우가 언급한 의성공주는 종친(宗親)의 딸로 수문제(隋文帝) 때인 599년[개황(開皇) 19]에 돌궐의 가한(可汗)에게 시집가서 630년[정관(貞觀) 4] 이정[李靖, 청명(淸明) 절후를 관장]의 돌궐정벌 과정에서 살해되는 그 순간까지 수나라에 충성을 다한 여성이다. 시필가한이 안문을 포위했을 당시에 그녀는 돌궐에 남아 있었다. 소우의 예상대로 그녀는 북방에 변고(變故)가 발생하였음을 시필가한에게 알려 돌궐이 안문의 포위를 풀고 돌아가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소우의 앞선 언급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구려 정벌에 대한 당시 중국 백성들의 반감은 대단했다. 이는 비단 소우의 주장만은 아니었다. 다른 신하들 또한 민심을 얻기 위해서는 고구려 원정을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급해진 양제는 어쩔 수 없이 소우를 비롯한 신하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먼저 의성공주에게 사신이 파견되었으며 중국 전역에 양제의 위기를 전하고 구원의 군대를 파견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아울러 성 안의 병사들에게는 이번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공로가 있는 장수와 병사들에게 그에 상응한 포상을 약속했다.

  양제의 조칙(詔勅)이 전해지자 성 안의 분위기는 일시에 바뀌었다. 이렇게 안문성 수비군의 단결된 저항과 성 외곽에 양제의 위기를 구원하기 위한 군대들이 속속 도착하고 결정적으로는 의성공주의 도움으로 돌궐이 군대를 회군하면서 양제는 위기 상황을 모면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위기는 종식되었지만 포상에 인색했던 양제는 안문성 수비군들에 대한 포상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고 고구려 정벌에 대한 논의도 재개(再開)되면서 민심(民心)은 또다시 악화되었다.

  게다가 양제는 소우가 그릇된 계책으로 자신을 속였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돌궐이 아무리 패역(悖逆)하고 노략질을 한다고 해도 능히 어찌할 수 없었을 것이다. 소우가 돌궐이 포위를 풀지 않은 때를 틈 타 짐을 속여 겁주었으니 용서할 수 없다.”

  이 말 한마디로 내사시랑이었던 소우는 하지군(河池郡)으로 쫓겨났다. 이 일은 결과적으로 소우에게는 행운이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중앙의 내직(內職)에서 외직(外職)으로 밀려나는 좌천(左遷)이었겠지만 이 경우는 달랐다. 이때 중국은 이른바 천하대란이라고 할 엄청난 혼란기의 도입부에 해당하는 시기였다. 천하대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소우가 양제 곁에 계속해서 머물렀다면 양제의 죽음과 함께 소우의 운명도 어찌 되었을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소우가 태수(太守)가 되어 하지[河池, 섬서성(陝西省) 봉현(鳳縣)]에 가보니 이미 전국적으로 반란이 일어난 상황에서 하지군도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군을 노략질하는 도적이 만여 명이었는데 관리들이 이들을 제압하지 못하였다. 소우는 병사들을 소집하여 도적을 쳐서 항복시키고 그들이 약탈해간 재물과 가축을 모두 회수하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공을 세운 병사들에게 공로에 따라 상을 내리니 병사들이 있는 힘을 다했다.

  소우가 태수가 되고 난 다음 설거(薛擧, ?~618)02가 군사 수만 명을 보내어 하지군을 침략하였으나 이들도 격파하여 쫓아냈다. 이런 일이 있고 난 다음에는 다른 도적들도 하지군을 감히 공격하지 못하였다. 이렇게 하여 중국 전역이 반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고 땅은 황폐화되는 과정에서도 하지군은 온전히 유지될 수 있었다.

 

 

국가 중대사를 관장하여 당 왕조의 기틀을 다짐

 

  당고조(唐高祖) 이연(李淵)이 장안을 평정하고 소우를 불렀다. 소우는 하지군을 이끌고 투항(投降)하여 광록대부(光祿大夫)를 배수받고 송국공(宋國公)에 봉(封)해졌으며 다시 민부상서(民部尙書)에 임명되었다. 당으로서는 국가 창업의 초기에 수나라의 고위관료로 자신의 영역을 온전히 지켜 투항한 소우에 대한 당연한 대우였다.

이세민(李世民)이 우원수(右元帥)가 되어 낙양(洛陽)을 공격할 때에 소우를 막부(幕府)의 사마(司馬)로 삼았다.

  618년[무덕(武德) 원년(元年)] 소우는 내사령(內史令)이 되었다. 이때는 당(唐) 창업의 초기로 국가 통치 기구와 실무적인 면에서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갖추어져 있는 것이 없었고 주로 수나라의 것을 그대로 채용하고 있던 시기였다. 소우는 수양제의 측근에서 일을 한 경험이 있어 여러 가지 면에서 당 창업에 크게 기여하였다.

  게다가 소우는 고조 이연의 인척(姻戚)이다. 수나라를 세운 수문제(隋文帝)는 이연의 이모부, 양제(煬帝)의 황후인 소후(蕭后)는 소우의 손위 누이였다. 그리고 소우는 수문제의 사위이기도 해서 당고조 이연과는 사적(私的)으로도 멀지 않았다.

  여러 가지 이유로 고조 이연은 소우에게 국가 중대사를 믿고 맡겼다. 당 창업 초기 국가 중대사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소우가 관여하지 않은 일이 없었다. 고조는 매번 국가 정책에 관한 소우의 의견을 들을 때에는 따로 의자를 마련하여 그를 우대하였고 소랑(蕭郞)이라고 부르며 친근함을 드러내었다.

  고조의 신임(信任)을 바탕으로 소우는 스스로 부지런히 힘썼고 잘못된 이를 누르고 위반한 이를 잡아들이는 데 꺼리는 바가 없었다. 소우의 제안은 거의 받아들여졌다.

  고조가 소우에게 손수 조서(詔書)를 내려 그 공로를 치하(致賀)했다.

  “그대의 말을 들으니 나라에 보탬이 되는 바요. 짐이 이미 그 말을 보배롭게 여겨 황금 한 상자를 하사하니 공은 사양하지 마시오.”

  이해에 각 주(州)마다 일곱 가지 관직을 배치했는데 진왕(秦王) 이세민이 옹주목(擁州牧)이 되자 소우를 옹주도독(擁州都督)으로 삼았다.

  고조가 일찍이 조서를 내려 중서성(中書省)03에 명령한 일이 있었는데 곧바로 실행되지 않았다. 고조는 자신의 명령이 바로 실행되지 못하고 지체되고 있는 까닭이 무엇인지 추궁했다.

  이에 소우가 대답했다.

  “소신은 수(隋) 대업(大業) 연간(年間)에 내사(內使)에 있으면서 조칙(詔勅)을 많이 받들었습니다. 그런데 잘못되거나 앞, 뒤의 서로 모순된 조칙이 많았지만 관리들은 이를 알지 못하고 단지 상부로부터 하달된 조칙이기 때문에 시행할 뿐이었습니다. 잘못된 명령의 시행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누구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른바 잘못된 명령이라서 바꾸어야 할 사안이라면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고쳐야 합니다. 문제가 발생한 다음에 바꾼다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제 조정(朝廷)이 처음 기틀을 다졌습니다. 그리고 신이 중서성(中書省)에 있으면서 조칙을 받들고 있는데 수나라의 일을 상고해 볼 때 나라가 편안할 것인가 위태로울 것인가는 바로 이 명령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근래에 폐하로부터 한 명령을 받았습니다. 반드시 여러 번 살펴 잘못된 점은 없는지 다시금 확인한 후에 비로소 시행하려고 하였으니 이것이 시행이 지체된 까닭입니다.”

  고조로서는 소우의 답변이 만족스러웠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관료들이 그대와 같다면 짐이 무엇을 걱정하리오.”

(다음 편에 계속)

 

 

 

 


01 남조(南朝)의 하나. 무제(武帝) 소연(蕭衍)이 자신이 옹립한 제(齊)의 화제(和帝)로부터 선양(禪讓)을 받아 세운 나라.

02 하동(河東) 분음[汾陰, 지금의 산서(山西) 만영(萬榮)] 사람. 부친 설왕(薛汪)이 난주(蘭州) 금성[金城. 지금의 감숙(甘肅) 난주(蘭州)]으로 이주했다. 용맹했고 활을 잘 쐈는데 아주 큰 부자였다. 처음에는 금성부의 교위(校尉)였다가 대업(大業) 말년에 그의 아들 설인과[薛仁果, 또는 인고(仁)]와 같이 반란을 일으켜 자칭(自稱) 서진패왕(西秦覇王)이라 했다. 얼마 안 가서 농서[西, 지금의 감숙성(甘肅省)]를 차지하니 따르는 무리가 13만에 이르렀다. 617년 칭제(稱帝)하고 도읍을 진주(秦州)로 옮기고 다음해에 장안을 공격하려고 했으나 병사(病死)했다. 그의 아들 설인과가 뒤를 이었는데 죽은 설거의 시호(諡號)를 무황제(武皇帝)라 했으나 장례를 마치기 전에 당(唐)에 패배했다.

03 국가의 기무(機務)·조명(詔命)·비기(秘記) 등을 관장하는 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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