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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23년(1993)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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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절후 신명의 생애 : 入春절후 관장하는 위징(魏徵)

入春절후 관장하는 위징(魏徵)

 

 『좋아하면서도 나쁜 점을 살피고 미워하면서도 좋은 점을 찾아야』 

 

                 

  『「원컨대 공께서는 치땅에 계셨을 때를 잊지 마시기를! 관중으로 하여금 노(魯)나라에 묶여 있던 때를 잊지 말기를! 영척은 수레 아래서 소 먹이던 때를 잊지 말기를!」그러자 제환공이 자리에서 물러서 사례하며 말하길「과인과 관중, 영척이 선생의 말씀을 잊지 않을 수 있다면, 국가는 위태롭지 않으리다.」라고 하셨습니다.』이 말을 들은 임금이 말하였다.『짐은 감히 평민으로 있던 때를 잊지 못하니, 공도 포숙아의 사람됨을 잊어서는 아니 되오.』

  임금이 서역(西域)으로 사신을 파견하여 섭호(葉護)칸을 세우도록 하였고, 사신이 채 돌아오기 전에 다시 사신을 파견하여 비단과 금을 가지고 제후국에 가서 말을 사오도록 했다.

  위징이 말하길『지금 칸을 세우는 일이 잘 마무리되기도 전에 여러 나라에 가서 말을 사들이도록 하시니, 저들은 필시 임금의 뜻이 말에 있고 칸을 세우는데 있지 않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칸으로 세워지더라도 반드시 은혜로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또 여러 변방의 국가들이 이 소식을 들으면, 중원(中原)은 의리를 경시하고 이익을 중시한다고 여길 것이니, 필히 말을 얻기도 전에 먼저 의리를 잃게 됩니다. 위문제(魏文帝)가 서역의 큰 구슬을 구하여 사들이고자 했는데, 소칙(蘇則)은 임금의 은혜가 널리 사방에 미치면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를 것이며, 구해서 얻는다면 귀하지 않은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폐하께서는 소칙의 말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으시겠습니까? 임금이 이 말을 듣고 말 사들이는 것을 중지했다.

  이후에 우복야(右僕) 자리가 비어 위징을 등용하고자 하였는데, 위징이 사양하여 배수 받지 않았다. 황태자 승건(乘乾)이 위왕(魏王), 태(泰)와 더불어 사이가 좋지 않았다. 임금이 말하길,「오늘날 충직하고 존귀함이 위징 만한 이가 없다 내가 그를 파견해 황태자를 보좌토록 하여, 온 천하의 바램을 하나로 묶어 황태자의 보필을 견고히 하리라.」라고 하며, 곧 위징을 태자태사(太子太師)로 배수했다. 위징이 병으로서 사양하자 임금이 조서를 내려 답하였다. 『한(漢)의 태자는 상산(常山)에 숨어살았던 수염과 눈썹이 모두 하얗던 네 명의 노인에게 도움을 받았었오. 내가 공에게 의뢰하는 것도 그와 같은 뜻이오. 공이 비록 누워 있더라도 황태자를 옹위하여 보전할 수 있을 것이요.』

  정관 17년에 위징의 병이 악화되었다. 위징의 집에는 애당초 제대로 된 침실이 없었는데, 임금이 명령을 내려 작은 궁궐의 목재를 뜯어다가 만들어 주도록 하니, 5일만에 완성되었다. 아울러 흰 비단 요와 베 이불을 하사하여 위징이 숭상하던 검박함을 쫓았다. 중랑장(中郞將)에게 명하여 위징의 집에 머물면서 위징의 동정을 곧 보고케 했다. 하사한 약과 음식물이 셀 수 없이 많고, 궁중의 하인들이 길을 이을 듯 계속 드나들었다. 임금이 친히 문병하러 오면 좌우를 물리치고 종일토록 이야기 하다가 돌아갔다. 후일 다시 태자와 함께 위징의 집에 이르렀는데, 위징이 누운 위에 관복과 띠를 덮고 있다. 임금이 슬픔에 못 이겨 그를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리면서 원하는 바를 물었다.

  임금이 장차 형산공주를 위징의 아들 숙옥(叔玉)에게 주려고 하니, 이 때에 공주 또한 임금의 뜻을 쫓았다. 임금이 말하기를『공이 억지로라도 신부를 좀 바라보시오.』라고 하자, 위징이 사양하지 못했다. 이 날밤 임금이 꿈에 위징의 평소와 같은 모습을 보았는데, 아침에 위징이 죽었다. 임금이 위징의 집에 이르러 울며, 그를 위해 몹시 슬퍼하여 닷새동안 정사를 보살피지 않았다. 태자는 서화당(西華堂)에서 상(喪)을 치렀다. 내외의 모든 관리들에게 조서를 내려, 아침에 모여서 모두 상가에 조문 가도록 했다. 사공(司空)과 상주도독(相州都督)을 증수하고, 시호를 문정(文貞)이라 했다. 깃털 덮개와 북과 피리와 무늬를 새긴 목검(木劒)과 마흔 명의 목우(木偶)를 하사하고, 소릉(昭陵)에 함께 장사지내려 하는데 위징의 처 배씨(裵氏)가 사양하며 말하기를『위징은 평소 검박했습니다. 지금 일품 벼슬의 의례를 빌려 의장품이 너무 화려하고 많으니, 이는 위징의 뜻이 아닙니다.』라고 하고는 임금의 허락을 얻어, 이에 흰 수레에 하얀 베로 취장을 치고 진흙 칠한 수레와 지푸라기 인형은 없이 했다. 임금이 동산의 서쪽 누대에 올라 멀리 바라보고 통곡하며 슬픔을 다했다. 진왕(秦王)이 조서를 받들고 제사지내러 갔다. 임금이 비석에 새길 글을 지으니 진왕이 그것을 썼다. 또 위징의 집에 봉읍 구백 호를 하사했다.

  임금이 후일 조정에 나와 탄식하며 말하기를『구리로 거울을 만들면 의관을 단정히 할 수 있고, 옛일을 거울삼으면 흥망성쇠를 알 수 있으며,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잘잘못을 밝힐 수 있다. 짐이 예전에는 이 세 개의 거울을 가지고서 안으로 스스로의 과실을 방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위징이 죽었으니 거울 한 개가 없어졌구나. 짐은 근래에 사람을 시켜 그의 집에 가도록 하여 종이로 된 책 한 권을 얻었는데, 처음 반정도가 초고로 완성된 것으로 그 알아볼 수 있는 부분에 쓰여 있기를「천하의 일은 선한 것도 있고 악한 것도 있다. 선한 이에게 맡기면 나라가 편안하여 지고 악한 이를 등용하면 나라가 피폐케 된다. 공경대신 중에 마음으로 좋아하거나 미워하는 자가 있으면, 미워하는 자는 오직 그의 나쁜 점만 보이고 좋아하는 자는 오직 그의 좋은 점만 보이게 된다. 그러므로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을 마땅히 살펴 신중히 해야 한다. 만일 좋아하면서도 그의 나쁜 점을 알고 미워하면서도 그의 좋은 점을 알아서, 사된 이를 제거하여 의심치 않고 현명한 이에게 맡겨 의심하지 않으면, 나라가 흥성할 수 있다.」라는 것이 대략의 내용이었다. 짐은 돌아보아 이러한 점을 생각해 보건대 아마도 이러한 과실을 면치 못할까 두렵소. 공경대신 및 시종신하들은 홀(笏)에다 이 내용을 써서, 나의 잘못이 보이면 필히 간언 해 주길 바라오.』

  위징의 용모는 중간치를 넘지 못했으나 지략과 담력이 있어, 매번 임금의 안색이 변할 정도로 간언을 하고 비록 임금이 매우 노여워 할 경우를 당하더라도 간언 하는 정신과 낯빛을 바꾸지 않으니 천자 또한 노여움을 거두곤 했다. 의론 하는 자들은 위징을 일컬어 춘추전국시대의 용감한 신하인 맹분·하육(夏育)보다 낫다고 했다. 일찍이 분묘에 갔다가 돌아와 말하길,『이전에 듣자하니 폐하께서 관남(關南)에 행차하시려 하셨다는 데, 지금 채비가 다 갖추어진 다음에 그만 두셨으니, 왜입니까?』라고 하니, 임금이 『그대가 두려워서 마침내 그만 두었오.』라고 대답했다. 처음에 나라가 교체되고 혼란했던 후에 국가의 문물제도가 무너지니, 위징이 임금에게 아뢰어 여러 유학자들을 데려다가 궁중의 책들을 정리케 하여, 국가의 전적이 이로써 찬연히 정비되었다. 일찍이 <소대례(小戴禮)>의 내용이 차례가 없자 다시 <유례(類禮)> 스무 편을 지어 몇 년만에 완성했다. 임금이 그 책을 좋다고 여겨 궁궐 내에 비치해 두었다. 임금은 본래 군사로써 천하를 평정한 자이라, 비록 이미 나라가 다 다스려 졌지만 사방 오랑캐를 평정할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러므로 위징이 모시고 연회에 참석하여 파진무덕무(破陣武德舞)를 올리면 고개를 돌려 돌아보지 않고, 경선악(慶善樂)을 연주함에 이르르면 살펴 즐기며 싫어하지 않았으니, 모든 풍간 하는 바와 절실함이 이와 같았다.

  위징이 죽자 임금이 그를 잊지 못하고 능연각(陵煙閣)에 올라 그의 초상화를 바라보면서 시를 짓고 통곡했다. 이 말을 들은 자들이 그를 시기하여 온갖 방법으로 위징을 비방했다. 위징은 일찍이 두정륜(杜正倫)과 후군집(候君集)을 재상을 맡길만하다며 천거하였는데, 두정균이 죄를 지어 쫓겨나고 후군집이 반역죄로 사형 당하게 됨에 이르러, 참소하는 자들이 마침내 위징을 가리켜 그들과 한패라고 하고 또 위징이 일찍이 자신의 간언과 쟁론들을 기록하여 사관(史官)인 저수량에게 보였다고 말하니 임금이 차츰 불쾌하여져서 마침내 위징의 아들 위숙옥의 혼사를 중지하고 비석을 넘어뜨리고 위징의 집안을 돌보는 것을 소홀히 하였다.

  요동(遼東)을 정벌하러 떠났는데 고려(高麗), 말갈 등이 진영을 침범하여, 이적(李勣) 등이 온힘을 다해 싸워 그들을 격파했다. 군대가 돌아온 후 임금이 슬피 말하기를『만일 위징이 살아 있었다면 내게 이번과 같은 행차가 있었겠는가!』라고 하며, 곧 그 가족을 불러 군대가 머물고 있는 곳에 이르게 하고 처자를 위로하며 하사품을 내리고, 소뢰(小牢)제사를 그의 묘에서 지내게 하고 비석을 다시 세우도록 했다. 은혜와 예의를 내림을 가족에게 가중시켰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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