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너별 보기
   daesoon.org  
대순121년(1991) 4월

이전호 다음호

 

회보 1면 천계탑 종무원장 말씀 일심정 논문 도인탐방 전경속의 고사성어 문단 답사 종단소식 성지순례 전경속의 인물 내가 본 대순진리회 알립니다

답사 : 대진대학의 현장 포천군을 찾아서

대진대학의 현장 포천군을 찾아서

 

이 고을에는 옛부터 "왕방대학가자"는 말이 전해 오기도 해

 

 

<연구실>

 

▲ 청산녹수(靑山綠水)의 고장인 포천군 전경

 

 

포천의 연혁


  포천은 선사시대부터 농경민이 정착하여 삶의 터전을 이루고 살아온 역사깊은 고장이다. 포천군은 국가의 기틀이 형성되기 시작한 삼국시대 초기에는 백제의 예하에 있었으나 고구려가 장수왕 63년(475년)에 백제를 정벌하고 한강 남부의 광범위한 지역을 점유함에 따라 고구려에 속하면서 비로소 고유의 지명을 가지게 되었다.

  즉, 마홀(馬忽)이라는 명칭이 그것이며 명지라는 별호도 이때부터 생겼다. 고구려때 부르던 마홀이라는 명칭은 삼지연에 의하면 사독문자(史讀文字)방식에 의한 표기로 물골(水城) 즉, 물이 많은 골을 借音한 것이라고 한다. 馬는 물의 옛말 「물」또는 이것의 옛말 「매」를 차음한 것이고 忽은 고대 지명에 흔히 붙은 접미사로서 「골」을 차음한 것이다. 견성(堅城)은 통일신라시대의 진흥왕 때에 새로 이 성을 쌓고 방어의 거점으로 삼았다는 연유로 명명되었으며 경덕왕 때에는 청성(靑城)이라고 불렀다. 고려 초에 와서는 포주(抱州)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다가 고려 성종때에는 별호(別號)로써 청화(淸化)라고도 하였으며 조선 태조 13년(1413년)에야 비로소 포천(抱川)이라 부르게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지금의 포천이라는 명칭은 물이 외부로부터 흘러 들어오는 것이 없고 외부로 흘러 나가기만 한다고 하여 抱(안을 포), 川(내 천)으로 이름하였다고 한다.

 

 

포천 군민의 노래

 

한반도 어린 정기 자위 맺히어
묏부리 열두 고을 한내 맑은 곳
대대조상 근면의 얼 가락쳐 흘러
일한 보람 기름진 땅 우리의 포천
보라 여기 영원히 푸른 강산 우리의 고장
보라 여기 경기땅 빛나는 곳 우리 포천

수원산 돋는 햇빛 희망의 터전
왕방산 지는 노을 평화로운 곳
서로 돕고 한데 뭉쳐 살찌는 고을
증산하며 건설하자 포천의 일꾼
보라 여기 영원히 푸른 강산 우리의 고장
보라 여기 경기땅 빛나는 곳 우리 포천

 


지리 및 관계적 위치


  포천군은 경기도 북동단에 위치하며 면적 8백27.81㎢에 남북의 연장이 47㎞이고 동서의 연장이 30.8㎞이다. 동쪽과 북쪽으로 가평군(加平郡)과 강원도 화천군(華川郡), 서쪽으로 천보산맥(天寶山脈)을 경계로 양주군(楊州郡), 남쪽으로 의정부시(議政府市), 남양주시(南楊州郡), 북서쪽으로 한탄강(漢灘江), 지장봉(地臟峰), 화인봉(花人峰)등을 경계로 연천군(漣川郡), 북쪽으로 철원군(鐵原郡)과 접한다.

  포천은 주변지역과의 관계에서 볼 때 다른 8개의 시군과 교통이 원활할 뿐만 아니라 특히 서울 북부 지방을 연결하는 중요한 길목에 위치한다. 그래서 「동국여지승람」에서 『서울에서 북쪽으로 가는 자는 양주를 지나서 반드시 여기에 머문다』라고 하였으니 현재 서울-원산을 잇는 43번 경원국도가 서울에서부터 의정부시를 거쳐 포천 중심부를 관통하고 있으며 앞으로 남북한 자유 왕래가 있게 되면 서울에서 금강산으로 들어가는 모든 차량은 반드시 포천을 지나야 하므로 그 위치가 매우 중요하다 하겠다.



지세와 경관


  포천은 주로 산악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태백산맥이 분기(分岐)되어서 서남방으로 뻗은 지맥이 철령(鐵嶺)에서 시작되어 경기도 광주(廣州)에 이르는 광주산맥의 주축이 된다. 여기서 포천의 동북부에 이르러서는 광덕산(廣德山), 자운산(白雲山), 국망봉(國望峰), 강씨봉(姜氏峰), 청계산(淸溪山), 현등산(懸燈山). 주금산(鑄金山)등 1000미터 내외의 산들이 줄줄이 이어져 있고 서쪽에는 또 천보산맥이 남으로 뻗어내려 양주군과 경계를 짓다가-축석령(祝石嶺)을 기점으로 의정부시와 경계를 이룬다.

  이처럼 험준하고 높은 산이 많은 포천은 자연적으로 깊은 계곡과 맑은 물이 없을 수 없다. 백운산(白雲山)에서 출원(出源)하여 동쪽으로 흐르는 영평천의 맑은 물과 관인면(官仁面), 영북면(永北面)을 거쳐 유유히 흐르는 짙푸른 한탄강이 합류하여 임진강의 상류를 이루고 있으니 실로 청산녹수(靑山綠水)한 고장이라 하겠다. 이 물줄기를 따라 옛 시인과 묵객이 오고 간 흔적이 도처에 남아 있는가 하면 벼슬하던 양반들이 만년(晩年)에 은거하던 승지(勝地)들도 많이 있다.

  포천의 명승가운데 국민 관광지로 지정된 산정호수(山井湖水)를 비롯하여 포천팔경(일명 永平八景), 한탄강변의 충암절벽, 백운동 계곡, 현등산등의 명산대천은 포천의 산명수려한 가치를 한결 돋보이게 한다.

  이중 고래로부터 잘 알려진 영평팔경(永平八景)의 명승으로는 화적연(禾積淵), 금수정(金水亭), 창옥병(蒼玉屛), 와룡암(臥龍岩), 낙귀정지(樂歸亭址), 백로주(白鷺州), 청학동(靑鶴洞), 선유담(仙遊潭)등이 있다.



포천의 4대 명산


(1) 왕방산(旺方山)
  포천읍 서쪽에 우뚝 솟은 해발 737m의 우람한 산이 왕방산이다. 이 산은 포천읍 남쪽읍 남쪽 仙壇里에서 기봉(起峰)하여 북쪽으로 뻗어내려 어룡리(魚龍里)에서 주봉을 이루었다가 다시 뻗어 신북면 심곡리(深谷里)에 이르러 국사봉(國師峰) 등의 연봉을 이룬 장장 20여리에 걸친 맥을 형성하고 있으며 옛부터 여러 가지의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명산이요 포천의 진산(鎭山)이다.

  이 산은 신라말엽인 872년경에 도선국사가 정업(淨業)을 닦을 때 국왕이 친히 행차하여 격려하였다 하여 왕방산(旺方山)이라 이름하였고 그 절을 왕방사라 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절터에 30여년전 청매화상(淸梅和尙)이 현 보덕사(普德寺)를 복원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태조가 왕위를 물려주고 함흥에 있다가 서울로 환궁하는 도중 왕자들의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쟁의 소식을 듣고 그 아픈 마음을 달래기 위해 이 산에 있는 사찰을 방문 채류하였다 하여 왕방산이라 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면 왕방산은 해룡산(海龍山) 남쪽에 이태조가 잠저(왕이 되기전)할 때 논밭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왕방산 남쪽 선단리 기슭에는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의 묘소가 자리잡고 있다. 전계대원군은 조선 제27대 철종의 생부(生夫)로 이름은 광(壙). 은언군(恩彦君)의 아들인데 은언군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장남이므로 사도세자의 손자가 된다. 1779(정조 3)년 아버지 은언군이 홍국영(洪國榮)과 함께 역모(逆謀)했다는 벽파(僻派)의 무고에 의하여 강화부(江華府) 교동(喬洞)으로 쫓겨나자 아버지와 함께 가서 빈농으로서 불우한 일생을 보냈다. 헌종7년(1841) 11월2일에 승하하자 양주군 진관(津寬에) 모시었다가 15년 후에 왕방산 아래에 묘소를 이장하였으므로 이때부터 선단 2리를 묘소부락이라고 부르고 있다. 처음에 전계군에 봉해졌다가 1849(헌종 15)년에 아들 원군(元範)이 즉위하여 철종(哲宗)이 되자 대원군에 추봉되었다. 왕방산 아래로는 포천읍으로부터 서남쪽 방향으로 어룡(魚龍), 자작(自作), 선단(仙壇 1, 2, 3區), 해룡리(海龍里)가 나란히 줄지워 있다.

        
(2) 해룡산(海龍山)
  포천읍 설운리(雪雲里) 해룡부락 서쪽에 우뚝 솟아 있는 해발 661m의 해룡산은 注葉山(竹葉山) 내맥으로 정상에 감지(鑑池, 天湖라고도 하였다.)라는 못이 있어 비를 비면 효험이 있었다 하며 태조가 창업한 후 이 산아래에서 무예를 익혔다는 전설이 깃들여 있는 명산이다.


(3) 청성산(靑城山)
  군내면 구읍리에 청성산이라는 해발 289m의 야산이 있는데 반월(半月)같이 아름다운 형상이라 하여 반월산(半月山)이라고도 한다. 산꼭대기에 오르면 구읍리와 상・하 성북리가 보이고 서남쪽으로는 淸溪川(泡川川)이 보인다. 산기슭에는 향교가 있고 산정에는 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성산고지(城山古址)가 있다.


(4) 수원산(水源山)
  군내면 동쪽에 내촌면(內村面)과 가산면(加山面)이 경계를 이루며 우람하게 자리잡고 있는 연봉(連峰)이 수원산이다. 운악산(雲嶽山)의 내맥으로 옛 포천군의 진산으로서 포천천(抱川川) 본류로 서류(西流)하는 수원(水源)의 근간이 되는 유역이 넓은 산이다. 수원산 연봉(連峰)인 서원봉(書院峰) 아래에는 옥금사(玉琴寺) 고지(古址)가 있다. 그 아래 있는 옥동반석(玉洞盤石)이라는 거대한 반석은 시인, 묵객이 매양 찾아들던 절경중의 절경이니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도 시와 더불어 이 산을 즐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관련글 더보기 인쇄

Copyright (C) 2009 DAESOONJINRIHOE All Rights Reserved.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 강천로 882 대순진리회 교무부 tel : 031-887-9301 mail : gyomubu@daesoon.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