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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37년(2007)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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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보기 : 27년 동안의 헛도수

27년 동안의 헛도수

 

 

글 교무부

 

 

이후에 상제께서 김보경의 집에 계시면서 공사를 보고 계셨는데 어느 날 백지에 이십칠 년이라고 쓰셨도다. 이에 대해 종도들이 묻기에 상제께서 “홍성문(洪成文)이 회문산(回文山)에서 이십칠 년 동안 공부한 것이 헛된 일이니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이십칠 년 동안 헛도수가 있으리라.”고 말씀하시고 다시 백지 한 장을 열두 쪽으로 오려서 쪽지마다 글을 써서 한쪽만을 불사르고 나머지 열 한쪽을 치복으로 하여금 불사르게 하셨도다. 이때 갑자기 비가 쏟아져 가뭄에 마르던 보리가 생기를 되찾더라.(예시 53절)

 

  예시 53절에 나오는 ‘27년 동안의 헛도수’는 천자가 되기를 갈망하던 차경석이 동학 해원의 우두머리가 되도록 상제님께서 짜놓으신 공사이다. 이에 따라 차경석은 27년 동안 많은 권세를 누렸지만, 그 일은 ‘헛도수에 따른 헛된 일’일 뿐이어서 그가 남긴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심지어 그의 삶을 기억해주는 이조차 거의 없게 되었다. 이것은 『전경』을 충분히 검토하고 과거 역사를 상고(詳考)해보면 자세히 알 수 있는 사실이다.

 

 

헛도수가 가지는 의미

  27년 동안의 헛도수를 살펴보기에 앞서 우선 ‘헛도수’의 의미가 무엇인지부터 알아보아야 한다. 상제님께서 “홍성문(洪成文)01이 회문산에서 이십칠 년 동안 공부한 것이 헛된 일이니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이십칠 년 동안 헛도수가 있으리라.”고 말씀하신 사실로부터 살펴본다면, 27년 동안의 헛도수는 ‘헛된 일’과 관계있는 말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즉 ‘열심히 한다고 해도 종내는 결실을 거두지 못하므로 쓸데없이 힘만 낭비하는 헛된 일이 되는 도수’가 바로 헛도수라는 것이다.

  한편 예시 53절에서 상제님께서 헛도수를 말씀하신 뒤 글을 쓰시고 불사르시자 비가 쏟아져 보리가 생기를 되찾았다는 내용은 상제님 공사에 대해 하늘이 응한 것으로 앞으로 27년 동안 헛도수가 펼쳐질 것에 대한 확정으로 이해해야 하리라 본다.

  상제님께서는 “이제부터 이십칠 년 동안 헛도수가 있으리라.”고 하셨으니, 상제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때가 바로 27년 동안의 헛도수가 시작되는 시점임은 너무도 명백하다. 또한 상제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시기는 『전경』의 앞뒤 구절을 보면 대략 상제님께서 화천하시는 1909년경임이 분명히 드러난다.02 따라서 1909년이 27년 동안의 헛도수가 시작하는 시점이 된다.

  상제님께서는 27년 동안이라고 하셨는데, 우리나라 말에서 ‘~동안’이라는 의미는 ‘어느 때부터 어느 때까지의 사이’를 의미하므로 ‘27년 동안’에 해당되는 해 즉 27년 동안의 헛도수가 마쳐지는 해는 정확히 1936년이 된다. 이로 미루어보아 결국 27년 동안의 헛도수란 1909년부터 1936년 동안(사이)에 일어난 헛된 일이라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1936년에 일어난 대표적인 큰 사건을 찾아보면 바로 차경석의 사망과 보천교의 몰락이다. 차경석은 상제님께서 화천하신 1909년부터 상제님의 진리를 사칭하여 종교 활동을 시작하더니 급기야 보천교를 만들어 일제치하에서 조선 최대 규모의 종교로 성장시켰다. 보천교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하였으나 1924년 이후 서서히 몰락하기 시작하더니, 차경석이 1936년에 사망하고 보천교가 일제의 압력에 의해 강제 해산 당하자 그 교세는 순식간에 몰락해 버리고 말았다. 그 이후 보천교는 지금까지도 쇠락한 채 이름조차 이어가기 힘든 형편임을 생각해 보면, 1909년부터 1936년까지의 27년 동안 차경석이 벌인 일이 모두 헛된 일이었던 셈이고, 따라서 이것이 바로 ‘27년 동안의 헛도수’가 됨을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상제님께서 27년 동안의 헛도수를 말씀하신 시점이 1909년 4월이고 차경석이 사망한 시점이 1936년 윤3월 10일이므로 달까지 계산해도 정확히 27년 간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차경석은 어떠한 인물이며, 상제님께서는 그가 왜 27년 동안 헛된 일을 할 것이라고 말씀을 하셨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재질이 뛰어났던 상제님의 종도, 차경석

  차경석은 1880년 음력 6월 1일 전라도 흥덕군 부안면 호암리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본명은 윤홍(輪洪)이요, 경석(京石)은 자(字)이며, 상제님께서는 그에게 친히 월곡(月谷)이라는 호를 내려주셨다고 한다.

 

▲ 차경석이 상제님과 같이 10일간 묵으면서 종도가 되기를 간청한 용암리 물방앗간집이 있었던 자리. 지금은 논으로 변해버렸으나, 전봇대가 있는 자리에 가옥이 서너 채 있었다고 한다.

 

 

  차경석의 부친 차치구(車致久)는 일찍부터 동학의 신도였으며 갑오농민전쟁 때는 농민군 내 지도자급(장령(將領) : 장군에 해당함)으로 활약하였다. 2차 봉기에서 동학군이 참패하자 차치구는 도망하여 정읍 최제칠의 집에 숨었으나 밀고로 인해 관병이 이를 알고 가족을 인질로 삼아 협박하자 스스로 붙잡혀 사형 당하였으니 1894년 12월 29일의 일이었다. 당시 15세였던 차경석은 부친의 시신을 등에 업고 대흥리(현재의 접지리 대흥마을)에 묻었다고 한다.03

  부친의 한을 가슴에 품고 있던 차경석은 1899년 동학농민군의 잔여세력이 모여 조직한 무장농민조직인 영학당(英學黨)이 전라도 중서부 일대를 장악하자 이 농민군에 가담하기도 하였으나, 영학당의 패배로 죽음의 고비를 맞기도 한다.04

  풀려난 그는 22세에 다시 일진회의 동학운동에 참여하여 전라남북도 순회관(巡廻官)의 직책을 맡았다. 송병준, 이용구 등이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자 차경석은 이들과 결별하고 손병희를 따랐다. 그러나 손병희와도 뜻이 맞지 않아 그와도 헤어지고 새로운 삶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차경석의 아우 차윤경(車輪京)이 주판례란 여인과 결혼을 하였다. 지주를 대신하여 소작권을 관리하던 주판례의 부친 주종호는 차경석 집안이 찢어지게 가난한 것을 알고는 딸이 불쌍하여 이공숙의 논을 떼어 사위 차윤경에게 주었다. 이로 인해 시비가 일어나자 차경석은 이 문제로 전주에 송사(訟事)하러 가게 되었고, 그 중도에 전북 원평 부근 용암리 앞 주막에서 상제님을 처음 뵙게 되니 이때가 1907년 5월의 일이요, 그의 나이는 28세였다.

 

▲ 전북 김제시 금산면 용암리 입구

 

 

  상제님의 언표(言表)에 감동한 차경석은 스승으로 섬기기를 청하여 어렵게 상제님으로부터 승낙을 받았다. 한편 차경석이 종도가 된 것에 대해서 다른 종도들은 탐탁치 않게 여겼다고 한다.05

  차경석이 1907년 5월부터 상제님을 따르기 시작하였으니, 그가 상제님의 공사에 참여한 기간은 불과 2년이 채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뛰어난 재질을 가지고 성심껏 상제님을 따랐으니, 이는 『전경』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상제께서 초닷새에 동곡으로 돌아오셨도다. 수일 후에 태인으로부터 사건이 무사히 된 전말을 들으시고 가라사대 “정읍 일은 하루 공사인데 경석에게 맡겼더니 하루아침에 안정되고 태인일은 하루아침 공사인데 경학에게 맡겼더니 하루에 안정되니 경석이 경학보다 훌륭하도다. 그리고 경석은 병조판서의 자격이며 경학은 위인이 직장(直腸)이라. 돌이키기 어려우나 돌이키기만 하면 선인이 되리라.”고 하셨도다.(행록 5장 3절)

 

 

  상제께서 십일월에 대흥리 경석의 집에 계시면서 포덕소(布德所)를 정하는 공사를 보셨도다. 어느 날 상제께서 황극수(皇極數)를 보신 후에 종도들을 모으고 각기 소원을 물으셨도다. 경석은 상제께서 재차 묻는 말씀에 “유방백세(遺芳百歲)를 못하면 유취만년(遺臭萬年)이 한이로다. 열지(裂地)를 원하나이다.”고 여쭈니 상제께서 경석에게 “너는 병부가 마땅하니라.” 하시니 경석은 불쾌히 여기는지라. 상제께서 “병권은 직신(直臣)이 아니면 맡기지 못하므로 특히 너에게 맡기었노라.”고 말씀하셨도다.(교운 1장 54절)

 

 

천자가 되고자 하는 야망으로 인해 동학 해원의 우두머리가 된 차경석

  분명 차경석은 뛰어난 재질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천자(天子)가 되고자 하는 엉뚱한 야심을 품고 있었으니, 열지(裂地)06즉 땅을 나누어 달라는 말은 바로 그러한 그의 욕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 『전경』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도 기록되어 있다.

 

  상제께서 어느 날 후천에서의 음양도수를 조정하시려고 종도들에게 오주를 수련케 하셨도다. 종도들이 수련을 끝내고 각각 자리를 정하니 상제께서 종이쪽지를 나누어 주시면서 “후천 음양도수를 보려 하노라. 각자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도록 점을 찍어 표시하라.”고 이르시니 종도들이 마음에 있는 대로 점을 찍어 올리니라. 응종은 두 점, 경수는 세 점, 내성은 여덟 점, 경석은 열두 점, 공신은 한 점을 찍었는데 아홉 점이 없으니 “자고로 일남구녀란 말은 알 수 없도다.”고 말씀하시고 내성에게 “팔선녀란 말이 있어서 여덟 점을 쳤느냐.”고 묻고 응종과 경수에게 “노인들이 두 아내를 원하나 어찌 감당하리오.”라고 말씀하시니 그들이 “후천에서는 새로운 기력이 나지 아니하리까.”고 되물으니 “그럴 듯하도다.”고 말씀하시니라. 그리고 상제께서 경석에게 “너는 무슨 아내를 열 둘씩이나 원하느뇨.”고 물으시니 그는 “열두 제국에 하나씩 아내를 두어야 만족하겠나이다.”고 대답하니 이 말을 듣고 상제께서 다시 “그럴 듯하도다.”고 말씀을 건너시고 공신을 돌아보면서 “경석은 열둘씩이나 원하는 데 너는 어찌 하나만 생각하느냐.”고 물으시니 그는 “건곤(乾坤)이 있을 따름이오 이곤(二坤)이 있을 수 없사오니 일음일양이 원리인줄 아나이다.”고 아뢰니 상제께서 “너의 말이 옳도다.”고 하시고 공사를 잘 보았으니 “손님 대접을 잘 하라.”고 분부하셨도다.…(공사 2장 16절)

 

  열두 제국을 거느리겠다는 차경석의 말은 실로 그가 천자가 되고자 하는 야망을 그대로 드러낸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상제님께서는 차경석을 불러 천자가 되고자 하는 그의 야심을 경계하시었으니, 이는 『전경』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상제께서 무신년 유월에 대흥리에 계시면서 공우로 하여금 각처의 종도들을 찾아 순회하게 하여 열하루 동안 매일 새벽에 한 시간씩 잠에 들도록 하시니라. 경석이 명을 좇아 여러 날 동안 자지 않았기에 지쳐 바깥에 나갔다가 들어오는 길에 문 앞의 모시밭 가에 이르러 잠에 취하여 혼미에 빠진지라. 이것을 보시고 상제께서 “천자(天子)를 도모하는 자는 모두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도다.(교운 1장 51절)

 

  또한 상제님께서는 화천하시던 그날에도 훗날 차경석이 조상까지 바꾸면서 스스로를 정씨라고 칭하고 새로운 왕조의 천자 욕심을 낼 것07을 예시하시며 꾸짖기도 하셨다.

 

  二十四일 이른 아침에 경석을 불러 흘겨보시면서 “똑똑치도 못한 것이 무슨 정가이냐.”고 나무라셨도다.(행록 5장 34절)

 

  뛰어난 재질을 지니고 상제님을 열심히 따랐으나 천자가 되고자 하는 삐뚤어진 야망을 가졌던 인물, 차경석! 상제님께서는 그를 통해 한 가지 중요한 공사를 보시었으니 그것은 바로 동학신명의 해원공사이다.

 

  상제께서 十二월에 들어서 여러 공사를 마치시고 역도(逆度)를 조정하는 공사에 착수하셨도다. 경석·광찬·내성은 대흥리로 가고 원일은 신경원의 집으로 형렬과 자현은 동곡으로 떠났도다. 상제께서 남아 있는 문공신·황응종·신경수들에게 가라사대 “경석은 성(誠) 경(敬) 신(信)이 지극하여 달리 써 볼까 하였더니 스스로 청하는 일이니 할 수 없도다.”고 일러주시고 또 “본래 동학은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주장하였음은 후천일을 부르짖었음에 지나지 않았으나 마음은 각기 왕후장상(王侯將相)을 바라다가 소원을 이룩하지 못하고 끌려가서 죽은 자가 수만 명이라. 원한이 창천하였으니 그 신명을 그대로 두면 후천에는 역도(逆度)에 걸려 정사가 어지러워지겠으므로 그 신명들의 해원 두목을 정하려는 중인데 경석이 십이 제국을 말하니 이는 자청함이니라. 그 부친이 동학의 중진으로 잡혀 죽었고 저도 또한 동학 총대를 하였으므로 이제부터 동학 신명을 모두 경석에게 붙여 보냈으니 이 자리로부터 왕후장상(王侯將相)의 해원이 되리라.”하시고 종이에 글을 쓰시며 외인의 출입을 금하고 “훗날에 보라, 금전소비가 많아질 것이며 사람도 갑오년 보다 많아지리라. 풀어두어야 후천에 아무 거리낌이 없느니라.”고 말씀을 맺으셨도다.(공사 2장 19절)

 

  조선말 극도로 문란해진 삼정(三政 : 토지세와 군역의 부과 및 양곡 대여·환수)과 탐관오리의 횡포로 인하여 백성들이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趙秉甲)의 학정(虐政)이 도화선이 되어 1894년에 전봉준은 동학농민운동(=갑오농민전쟁)을 일으켰다. 봄에 일으킨 1차 봉기 때는 정부를 움직여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을 개혁하는 등 나름대로의 성과를 거두었으나, 10월에 일으킨 2차 봉기 때는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 패퇴하고 전봉준은 1895년 3월에 서울에서 처형되고 말았다. 이로써 동학농민운동은 1년 동안에 걸쳐 무려 30만~40만 명의 희생자를 낸 채 실패로 끝났다.08

 

▲ 동학농민운동

 

 

  무수한 피해자를 양산하고 한국 근대사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 이 사건에 대해 상제님께서는 그 원한을 풀어주지 않으면 후천이 어지러워진다고 하시며,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하여 왕후장상(王侯將相)을 꿈꾸다가 죽은 자들이 해원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셨다. 그리고 그 해원두목으로 차경석을 내세우셨고, 이에 따라 차경석은 동학 해원의 우두머리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 물론 이것은 천자로 살고 싶었던 그가 자초한 일이었다.

 

 

1909년부터 1936년까지 27년 동안 동학 해원 우두머리인 차경석이 벌인 헛된 일

  상제님께서는 9년간 천지공사를 하시며 많은 기행이적을 보여주셨지만, 많은 사람들은 상제님께서 장효순의 난이나 고부화액 등을 겪으시거나 친히 병겁을 소화하시는 모습을 보고는 그 믿음이 약해져 떠나버렸다. 『전경』에 따르면, 상제님께서 화천하시던 바로 그날에는 김형렬과 차경석 등 불과 6명만이 그 자리를 지켰다고 한다.09

  상제님께서 화천하시고 난 뒤 종통을 받은 대두목이 누구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흩어진 종도들을 모으고 교단을 창설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바로 차경석이었다. 물론 이것은 상제님의 동학 해원공사에 의해 이미 예정된 것이었다.

차경석은 1909년 7월 그믐께 금산사에서 치성을 드리고 난 뒤 그가 상제님께 천거했던 이종매 고수부(고판례)를 내세워 김형렬의 집에 보관 중이던 약장을 가져와 대흥리 그의 집에 선도교(仙道敎: 뒤에 태을교)라는 간판을 걸고 종도들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차경석의 교세는 날로 확장되었으나, 그의 야심과 무례함에 분개한 종도들은 하나둘씩 차경석을 떠나갔고, 고수부마저도 1918년에 차경석에게서 독립하게 된다. 그러나 이미 차경석을 따르는 많은 신도들이 있었다.

  차경석은 1920년에 전국의 신도를 60방주(方主)의 조직으로 묶고 557,700명에 달하는 간부를 임명하였다. 1921년에 경남 함양군 덕유산 기슭 황석산(黃石山)에서 대규모의 제단과 제수(祭需)를 갖추어 고천제(告天祭)를 올리며 국호(國號)를 ‘시국(時國)’, 교명(敎命)을 ‘보화교(普化敎: 뒤에 보천교라 개칭)’로 선포하였다. 또 자신이 천자(天子)로 등극(登極)할 것이라고 선언했기 때문에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그를 차천자(車天子)라고 불렀다.

  이에 따라 일제는 차경석에 대한 수색과 체포령을 내렸고, 수개월 사이에 1천여 명의 교인들이 체포되었다. 경기도 일본 경찰부는 체포된 교인들 중 차경석의 심복인 서방주(西方主) 이상호를 40여 일 동안 취조한 뒤에 교단 공개를 조건으로 석방하였다. 이상호가 차경석에게 총독부에 제시할 교명을 물었을 때 차경석은 보화교로 할 것을 명하였는데, 이상호는 고천제(告天祭)에서 고천(告天)한 보화교의 머릿글자 ‘보(普)’와 당시에 공인된 종교로서의 천주교(天主敎)와 천도교(天道敎) 등의 머릿글자 ‘천(天)’을 취하여 보천교(普天敎)라는 교명을 내었다.

  1929년 3월 15일에 차경석은 어마어마한 재물을 들여 정읍 대흥리에 보천교의 건물을 준공했으니, 그 이름은 십일전(十一殿)이다. 십일전은 방의 칸수만 총 186칸으로 아흔 아홉 칸 궁궐보다 2배 정도 더 큰, 아방궁같은 규모였다고 한다. 단일 건물로는 우리나라 건축물 역사상 최고였다고 하니, 상제님께서 차경석에게 ‘천고춘추 아방궁 만방일월 동작대(千古春秋阿房宮 萬方日月銅雀臺)’10라는 글을 왜 써 주셨는지 알 수 있을 듯하다. 또 십일전에는 딸린 부속건물만 정화당(井華堂), 총령원(總領院), 보화문(普化門) 등 45동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당시는 일제시대였으므로 종교 활동에 어려움을 느낀 차경석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과 내각총리대신에게 친일사절을 파견하는 한편, ‘시국대동단’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전 국토를 순회하면서 보천교의 소개와 함께 대동아단결(大東亞團結)을 강조하는 친일적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이에 반대하는 보천교 혁신운동이 일어났고, 고위간부들이 신도를 이끌고 별도의 교단을 세우는 사태가 일어나게 되어 교세는 서서히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급기야 차경석은 1936년 윤3월 10일에 갑자기 병으로 사망하여 버렸고,11 정읍 경찰서는 보천교를 탄압하여 건물을 강제로 빼앗아 경매에 붙였다. 군내(郡內) 유지들이 돈을 모아 그 건물을 사서 그 자리에 두고 병원이나 학교로 사용할 뜻을 전하였으나, 정읍 경찰서는 건물들을 철거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많은 돈을 내더라도 필요없다고 거절하면서, 보천교에서 수백만 원을 들여서 지어놓은 건물들을 불과 수천 원에 경매하여 뜯어 버렸다. 십일전(十一殿)을 이루고 있었던 재료들은 서울로 옮겨져서 ‘태고사(太古寺 : 오늘날의 조계사)’를 짓는 데 쓰였고, 정화당과 보화문(普化門)은 뜯겨서 전주역사(全州驛舍)를 짓는 데 재활용되었다. 그 어마어마했던 건물이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상제님의 공사에 의해 동학 해원 우두머리로서의 삶을 산 차경석! 그는 상제님께서 화천하신 1909년부터 그 세력을 크게 키우기 시작하더니, 상제님의 말씀대로 많은 재물을 손에 넣고 쓰면서 아방궁같은 건물을 짓고, 동학농민운동때 모인 수십 만 인파를 훨씬 능가하는 600만 신도를 모으고, 차천자(車天子)라고까지 불리며 정확히 27년 동안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다. 그러나 1936년에 갑자기 죽자 그가 만든 보천교(普天敎)도 순식간에 완전히 몰락해버렸다.

  사실 그 당시 우리나라 2,000만 인구 중에 좀 과장된 감이 있다 하더라도 600만 명이 보천교를 믿었다면 그 교세가 실로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또 그것이 오래된 일도 아니고 불과 60여 년 전의 일이었다. 그러나 정말 이해하기 어렵게도 차경석과 보천교는 역사에 묻혀버렸고 이를 기억하는 사람은 오늘날 거의 없으니, 참으로 차경석의 27년 세월은 헛된 야망에서 비롯된 헛된 일이었다. 실로 이것이 상제님께서 짜 놓으셨던 27년 동안의 헛된 일, 헛도수였던 것이다.

 

 

『채지가』에 예언된 27년 헛도수

  상제님께서 화천하신 뒤에 종통을 계승하시고 상제님의 법방을 풀어나가신 분은 도주님이시다. 이와 동시에 상제님의 진리를 팔아 수많은 사람을 끌어 모으고 천자 행세를 한 사람은 바로 27년 동안의 헛도수를 담당한 차경석이니, 『채지가』 「초당의 봄꿈」에는 이를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었다.

 

생사문(生死門)을 열어놓고 승부판단 하올적에

조개(趙開: 도주님)는 백기(白碁)되고 차돌(車-: 차경석)은 흑기(黑碁)된다.

정지변(井地邊: 정읍 땅 변두리)에 마주앉아 천하통정 하였으니

너도한점 나도한점 허허실실 누가알까

초한건곤(楚漢乾坤) 풍진(風塵)속에 진위진가(眞僞眞假) 누가알고

한신진평(韓信陳平) 그때로써 현우우열(賢愚優劣) 몰라서라

조개이치(趙開理致) 어떠한고 월수궁(月水宮)에 정기(精氣)받아

오십토(五十土)로 개합(開閤)하니 양중유음(陽中留陰) 되었구나

어자(魚者)는 생선(生鮮)이니 생선복중(生鮮腹中) 을장(乙腸)이라

생문방(生門方)을 들어가니 중앙을성(中央乙聲) 분명하다

차돌(車-)은 바돌이니 동해지(東海地) 정석이라

호구중(虎口中)에 가지말라 사색사흉(死塞四凶) 되었구나

사색사흉(四塞四凶) 가지말라 가는날이 그만일세

 

  당시 정읍을 사이에 두고 북동쪽의 구태인 도창현에서는 도주님께서 무극도를 창도하시어 진법을 펼치고 계셨고, 남서쪽의 대흥리(현재의 접지리)에서는 차경석의 보천교 본부가 있었다. 이 상황이 『채지가』에는 바둑판을 이용하여 도주님을 생명이 있는, 즉 살아서 움직이는 조개인 백돌로, 차경석을 생명이 없는 차돌인 흑돌로 비유하여 예언되어 있는 것이다. ‘정읍 변두리(정지변(井地邊))에 마주앉아 천하통정 하였으니 너도 한 점 나도 한 점 허허실실 누가 알까’라는 상황에서 결국 조개(도주님)는 중앙을성 분명하니 진짜인 것이요, 차돌은 사색사흉이라 가짜임을 분명이 예언해 둔 것이다.

  당시 무극도의 도인들 수는 약 30만 명이었고 보천교는 무려 600만 명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세력만을 놓고 보면 차경석의 보천교가 화려했을 테지만 그것은 27년 간만 위세를 떨치는 27년 헛도수였으며, 진정한 상제님의 진법이 펼쳐지고 후천의 역사(役事)가 이루어지고 있던 곳은 도주님의 무극도였다. 이것은 오늘날의 역사가 충분히 증명해주고 있다.

 

 

 

 

 

 

 


01 홍성문은 전라도에 살았던 술객으로서, 그의 생몰 연대는 분명하지 않으나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250여 년 전에 임실군 운암면 턱골에서 홍진사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고 한다. 모친이 주막집 주모인 관계로 그는 평생 서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 했다. 어머니가 일찍 죽자 홍진사는 그를 거두어 몸종처럼 키웠는데, 홍진사마저 죽자 맏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셋째 형은 홍성문을 창피하게 여겨 죽이고자 하였다. 홍성문은 이를 피하여 머리를 깎고 절로 들어갔고 회문산에서 공부를 하여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특히 그는 풍수에 대해 아주 조예가 깊었다고 하며 평생 양반을 조롱하면서 지냈다는 전설이 지금도 전라도 지역에 많이 남아있다.

02 최근 들어 ‘27년 동안의 헛도수1909년부터 1936년까지, 혹은 1969년부터 1996년까지, 혹은 1972년부터 1999년까지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어 도인들의 주의가 요청된다.

1909~1936년을 27년 동안의 헛도수라고 주장하는 사례

이것은 도주님께서 봉천명하신 1909년부터 태극도에서 주장하는 무극도장 해산 시기인 1936년 사이를 27년 동안의 헛도수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에 따르면 도주님께서 1909~1917년에 봉천명하신 뒤 대순진리를 감오득도(感悟得道)하시어 종통을 계승받으신 일과, 1909~1925년에 무극도를 창도하시기 위하여 전교를 내리시고 둔도수·폐백도수 등 각종 공사를 보신 일을 모두 헛된 일로 본다는 것이 된다. 게다가 이 주장은 무극도의 해산시기를 1936년으로 잡고 있는데, 이는 도주님께서 ‘1941년 종교단체 해산령으로 종교활동을 중단하셨다대순진리회 요람12쪽의 사실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며, 도전님의 종통을 부정하는 태극도에서 썼을 뿐만 아니라 그네들도 검증조차 하지 않은 책자인 태극진경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는 문제점도 있다. 실로 도주님의 업적을 헛된 일로 본다면 도주님께서 행하신 모든 성업(聖業)이 현재 하나도 남아 있는 것이 없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주장은 허황된 것에 불과하다.

1969~1996년을 27년 동안의 헛도수라고 주장하는 사례

도전님께서 대순진리회를 창설하신 1969년부터 1996년까지를 27년 동안의 헛도수로 보는 것은, 도전님께서 대순진리회를 창설하시어 양위상제님의 법방을 받드시기 위해 행하신 모든 성업(聖業)이 모두 헛된 일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도주님의 유법(遺法)과 도전님의 유훈(遺訓)을 받들고 있는 우리 종단이 그간 이룩한 업적과 현재의 상황을 보면 대순진리회를 헛도수로 보는 주장이 타당하지 않다. 또한 상제님의 공사에 대한 전경의 기록은 모두 음력으로 되어 있으므로, 상제님의 27년 동안의 헛도수 공사도 음력을 기준으로 계산해야 한다. 그러므로 도전님께서 신명계로 출타하신 때를 음력으로 보면 1995[乙亥]124일이 되고, 1969[己酉]년부터 이때까지 세어보면 ‘26년 동안으로 ‘27년 동안이 되지 않는다. 즉 셈법에도 맞지 않는 주장인 것이다.

1972~1999년을 27년 동안의 헛도수라고 주장하는 사례

이것은 1999년 영대 원위에서 서가여래를 내리고 도전님을 모신 자들이 주장하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서가여래의 불기 운세는 1972년에 끝났으나 그간의 공적을 감안하여 영대 원위에 모셨다가 27년 뒤인 1999년 추석 때 서가여래를 영대 원위에 내려 더 이상 서가여래를 모시지 않게 되었으니, 영대 원위에 서가여래가 모셔져 있었던 1972~1999년 사이를 27년 동안의 헛도수라고 한다. 그러나 이 주장대로라면, 1972~1999년 사이에 영대 원위는 헛도수에 따라 헛되게 모셔지고 있었던 셈이 된다. 따라서 그 27년 동안 도인들이 영대에 참배하고, 읍배·배례를 모시고, 치성드리고, 기도 모시고 한 등등의 모든 일도 전부 헛된 일로 되어버린다. 이것은 대순진리회 자체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소리와 다름 아니며, 이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대순진리회의 법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일 뿐이다.

03 이에 대해 전경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인다. 또 하루는 경석에게 가라사대 갑오년 겨울에 너의 집에서 삼인이 동맹한 일이 있느냐.”고 물으시니 그렇다고 대답하니라. 상제께서 그 일을 어느 모해자가 밀고함으로써 너의 부친이 해를 입었느냐.”고 하시니 경석이 낙루하며 그렇소이다.”고 대답하니라. 또 가라사대 너의 형제가 음해자에게 복수코자 함은 사람의 정으로는 당연한 일이나 너의 부친은 이것을 크게 근심하여 나에게 고하니 너희들은 마음을 돌리라. 이제 해원시대를 당하여 악을 선으로 갚아야 하나니 만일 너희들이 이 마음을 버리지 않으면 후천에 또 다시 악의 씨를 뿌리게 되니 나를 좇으려거든 잘 생각하여라.” 하시니라. 경석이 세 아우와 함께 옆방에 모여 서로 원심을 풀기로 정하고 상제께 고하니 상제께서 그러면 뜰 밑에 짚을 펴고 청수 한 동이를 떠다 놓은 후 그 청수를 향하여 너의 부친을 대한 듯이 마음을 돌렸음을 고백하라.”하시니 경석의 네 형제가 명을 좇아 행하는데 갑자기 설움이 복받쳐 방성 대곡하니라. 이것을 보시고 상제께서 너의 부친은 너희들이 슬피 우는 것을 괴로워하니 그만 울음을 그치라.” 이르시니라.(교법 315)

04 영학당의 지도부가 모두 체포되자 차경석도 잡혀 사형의 위기를 맞았는데, 집행사령의 호의로 겨우 풀려났다고 한다. 집행사령이 왜 풀어주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차경석이 비범한 인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은 아닌가 하는 설이 있다.(안후상, 보천교 운동 연구, 성균관대학교 역사학 석사학위 논문, 1992, pp.6~9)

05 김광찬은 동곡에 있으면서 상제께서 차경석과 상종하시는 것을 과히 좋게 생각하지 않으니라. 그는 경석이 본래 동학당이고 일진회에 참가하여 불의한 일을 많이 행하였을 터인 데도 이제 그를 도문에 들여놓은 것은 상제의 공평하지 못하심이라고 불평하고 때로는 우리가 도덕을 힘써 닦아온 것이 모두 허탕이 되리라고 상제를 원망하기도 하기에 형렬이 상제를 배알하여 그 사유를 고하리라고 말하여 그를 위로하였도다. 어느 날 형렬이 광찬을 데리고 상제께 배알하였으나 모두 그 사유를 고하지 못하고 오후에 돌아가려 할 때에 상제께서 광찬에게 주인은 김형렬이 좋으니 동곡에 가서 있으라.” 일러주시고 형렬을 따로 불러 가만히 광찬을 데리고 집에 돌아가서 잘 위로하여 주라.”고 일러 보내셨도다.(교법 232)

06 열지(裂地)는 나누어 준 땅이라는 뜻으로 스스로 권력을 가져 천자를 도모하려는 것을 말한다. 원래 이 말은 통감4한기에 나온다. 초한전쟁이 한창일 때 한나라의 진평은 초나라의 항우와 그의 충신들을 이간질 시키려는 계략을 꾸민 적이 있었다. 진평은 항우가 땅을 나누어 주어 그의 신하들을 왕으로 삼지 않자(終不得裂地而王) 그들이 항우를 멸하여 스스로 왕이 되고자 한다라는 거짓말을 퍼뜨려 항우와 그의 신하들 사이에 깊은 불신을 조장하여 초나라에 내분을 불러일으키고자 했던 것이다.

07 차경석은 그의 어머니가 정씨에게 겁탈을 당하여 자신을 낳았으므로 자신은 사실 정경석이 된다는 환부역조(換父逆祖)의 말을 하면서, 자신이 바로 정감록의 예언에 따라 정씨왕이 되리라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당시 많은 사람들은 이 말을 믿고 차경석을 따랐다고 한다.(조선일보 1999917일자 23, 이규태 역사 에세이 28 참고)

08 일본 나라[奈良]여대 나카쓰카 아키라 명예교수는 일본 방위청연구소 산하 도서관의 사료를 인용하여 당시 일본군에 의해서 희생된 동학군은 부상자를 포함해서 30~40만 명에 이르며, 그중 학살당한 동학군은 5만 명 이상이라고 밝히고 있다.(천도교 약사, 천도교중앙총부출판부, 2006, p.103)

09 이때에 여러 종도가 떠나고 김형렬·차경석·박공우·김자현·김갑칠·김덕찬 등 여섯 사람만이 상제를 지켜보니라. 부친이 고부 객망리 본댁으로부터 동곡에 오시고 형렬은 뜻밖의 변을 당하여 정신을 수습치 못하는지라.(행록 536)

10 교법 315

11 극심한 재정난과 일제의 탄압에 못 견디어 자살했다는 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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