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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37년(2007)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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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소개 : 진(軫) 별을 관장하는 유융신명

진軫 별을 관장하는

유융劉隆 신명

 

 

글 교무부

 

 

 

  유융[劉隆:?~57, 자(字)는 원백(元伯)]은 광무제(光武帝)를 도와 후한(後漢:25~220)01을 세우고 나라의 기반을 다지는데 많은 공적을 남긴 장수이다. 남양군(南陽郡:현 하남성 서남부) 사람이며 안중후(安衆侯)의 종친이다. 왕망의 섭정시절(8~23), 그의 아버지 유례(劉禮)가 안중후 유숭(劉崇)과 함께 병사를 일으켜 왕망(王莽)02을 주살하고자 했으나 발각되었다. 유융은 당시 7세가 되기 전이어서 다행히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장성한 후에는 장안(長安)에서 공부하였으며, 갱시제(更始帝:劉玄)03이 그를 기도위(騎都尉)에 배수하였다. 그러다가 광무제가 하내(河內:현 하남성 북서부지역)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갔다.

  26년(건무 2) 유융은 항부후(抗父侯)로 봉해졌고, 28년(건무 4)에는 주로장군(誅擄將軍)에 제수되었으며 양무장군 마성(馬成:亢별을 관장)과 함께 동남쪽(안휘성 淮水이남)에 자립해 있던 이헌(李憲)04을 쳤다. 30년(건무 6) 이헌이 평정되자 광무제의 명을 받아 무당현(武當縣:현 호북성 단강구시 서북)에 파견되어 둔전(屯田)05 을 관리하였다.

  35년(건무 11)에 남군 태수를 제수 받았으며, 일 년 후에 장군의 인수(印綬)를 바쳤다.06 37년(건무 13)에는 식읍이 더 늘어났고 다시 경릉후(竟陵侯)에 봉해졌다.

  39년(건무 15) 광무제는 각 군(郡)에 간전경무(墾田耕畝)와 호구년기(戶口年紀)의 조사 명령을 내렸다. 정확한 경지면적과 호적을 파악하는 것은 세금을 거두고 백성을 지배하는데 기초자료가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조사는 제대로 실시되지 않았다. 자사(刺史)07과 태수(太守)08대부분이 공평하지 못하여 자신들에게 아부하는 호족들은 관대하게 처리하고 가난한 백성들은 가혹하게 처리하여 원망이 자자했으며, 백성들은 길을 막고 울부짖었다.

  한번은 광무제가 여러 군(郡)에서 상주된 보고서를 읽다가 진류군(陳留郡)의 것을 읽게 되었다. 거기에는 “영천(穎川)ㆍ홍농(弘農)은 조사할 수 있어도, 하남(河南)ㆍ남양(南陽)은 조사할 수 없다.”고 씌어 있었다. 광무제가 담당자를 불러 힐문하니 대답하기를 주저하였다. 이때 12세였던 황태자 양(陽:훗날의 明帝)이 장막 뒤에서 말하기를 “하남은 수도가 있어서 고관대작이 많고, 남양은 황제의 고향으로 근친(近親)들이 많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황실의 종친이었던 유융(劉隆) 역시 이 일에 연루되어서 하옥(下獄)을 당했다. 그 일당 10여 명은 모두 사형을 당했으나, 유융만은 공신(功臣)임이 참작되어 서인(庶人)이 되는 것으로 사면되었다. 이듬해 유융은 다시 부락향후(扶樂鄕侯)로 봉해졌고, 중랑장(中郞將)으로서 복파장군 마원(馬援)을 도와 교지(交:현 베트남 북부)09의 만이(蠻夷)10 징측(徵側) 등을 치게 되었다. 유융은 따로 금계구(禁谿口)11에서 그들을 격파하였는데, 장수 징이(徵貳)12을 사로잡고 적군 수천을 벤 후, 2만 명의 항복을 받았다.

  장안으로 돌아 온 유융은 장평후(長平侯)에 봉해졌다. 그리고 대사마 오한(吳漢:氐별을 관장)이 죽자 표기장군(驃騎將軍)이 되어 대사마(大司馬)13의 일을 보았다. 유융은 8년 동안 법을 받들며 업무를 보다가 스스로 장군의 인수(印綬)를 바치고 관직에서 물러나니, 광무제는 그에게 기를 소[牛]와 상준주(上樽酒)14 열 곡[十斛:百斗]을 하사하며 봉조청(奉朝請:퇴직한 대신이 조회에 정기적으로 참여하는 일)하게 하였다.

  유융은 54년(건무 30) 신후(愼侯)로 봉해졌고, 57년(중원 2)에 세상을 떠났는데 시호(諡號)를 정후(靖侯)라 하였다.

 

 

 

 


01 기원전 202년에 유방이 건국한 한()나라는 기원후 8년에 왕망에 의해 멸망하였다. 25년에 유방의 9세손인 유수(劉秀:광무제)는 왕망이 세운 신()나라를 무너뜨리고 낙양에서 한()나라를 재건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를 유방이 장안에 세웠던 전한(前漢)과 구별하기 위하여 후한(後漢) 또는 동한(東漢)이라고 한다.

02 AD 5년 평제를 독살한 뒤 2세의 유영(劉拏:宣帝의 현손)을 세운 뒤, 자기를 스스로 가황제(假皇帝)라 하고, 신하들에게는 섭황제(攝皇帝)라 부르게 하였다. 그 후 AD 8년 유영마저 몰아내어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국호를 ()’이라 하여 황위(皇位)를 완전히 찬탈하였다.

03 전한(前漢)을 멸망시킨 왕망(王莽)정권에 대항하여 한나라를 재건하려는 유()씨 일족들의 시도는 유수(劉秀:광무제)가 처음이 아니었다. 23년에 유현(劉玄:갱시제)은 수도를 낙양에 정하고(1년 뒤 장안으로 옮겼음) 연호를 갱시(更始)로 하면서 한나라를 계승하였지만 지지기반이던 농민군 세력이 그에게 등을 돌림으로써 불과 2년 뒤인 25년에 권력을 잃고 살해당하였으며, 이로써 한나라의 부활도 실패로 돌아갔다.

04 원래 왕망정권 아래서 지방관을 지내던 인물이었는데, 갱시 원년(23)에 자립하여 회남왕(淮南王)이 되었고 다시 27(건무 3)에 천자라 일컬으며 공경백관을 두고 왕조를 세웠다.

05 변경이나 군사요지에 주둔한 군대의 군량을 마련하기 위하여 설치한 토지. 군인이 직접 경작하는 경우와 농민에게 경작시켜 수확량의 일부를 거두어 가는 두 가지 경우가 있었다.

06 "인수를 허리에 찬다"는 말은 임관한다는 뜻이고, "인수를 풀다"라는 말은 퇴관(退官면관을 의미하였다.

07 ()나라 때 군(()을 감독하기 위하여 각 주()에 둔 검찰관.

08 ()의 으뜸 벼슬.

09 중국 한()나라 때에, 지금의 베트남 북부 통킹·하노이 지방에 둔 행정 구역. 전한(前漢)의 무제가 남월(南越)을 멸망시키고 설치하였다.

10 예전에, 중국 사람들이 중국의 남쪽과 동쪽에 있는 종족을 낮잡아 이르던 말.

11 금계 입구. 금계(禁谿)는 교지군(交郡)에 있는 강.

12 우두머리 징측(徵側)의 누이.

13 군사 최고 통솔자.

14 벼 한말에서 술 한말을 얻을 수 있는데 이를 상준(上樽)이라 하고, 기장 한말에서 얻어지는 것은 중준(中樽), 조 한말에서 얻어지는 것은 하준(下樽)이라 한다.(續漢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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