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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24년(1994)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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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절후 신명의 생애 : 울지경덕(尉遲敬德)

春分절후 관장하는

 

울지경덕(尉遲敬德)

            

 

 

  궁(宮)과 부(府)의 병사들이 현무문(玄武門)에 주둔하여 싸움을 각오하고 무장(武奬)을 풀지 않자 경덕이 적군의 머리 두 개를 보이매 비로소 도망갔다.
  당시에 고조(高祖)는 해지(海池)에서 배를 띄우고 놀고 있었는데 왕이 경덕에게 명하여 고조에게 가서 그를 모시라고 하니 갑옷을 풀지도 않고 달려갔다. 고조가 놀라 말하길 『누가 지금 변란을 일으켰는가? 그대는 이곳에 무엇 하러 왔는가?』 대답하길 『진왕(秦王)께서 태자와 제왕(齊王)이 난을 일으켰기 때문에 병사들로 그들을 베었습니다. 폐하가 불안해 하실까 하여 저를 보내어 호위하라 하였습니다.』고조가 기뻐하였다. 그때에 남아(南衙)와 북문의 병사와 부병(府兵)들이 여전히 항복하지 않고 있어 경덕이 고조에게 청하여 제군(諸軍)은 진왕의 명령에 따를 것을 손수 명하니 비로소 안팎으로 안정이 되었다.
  진왕이 황태자가 되어 경덕은 좌위솔(左衛率) 벼슬을 받았다. 당시에 은태자(隱太子)와 소왕(巢王)의 난에 연루된 자가 백 여명이 넘었는데 그들을 모두 죄 하려 하니 경덕이 말했다. 『악행을 저지른 사람은 두 사람인데 지금 이미 그들을 베었거늘 만약 또다시 그 잔당(殘黨)들을 궁지에 모는 것은 사태를 안정시키는 방법이 아닙니다.』 이리하여 그들을 모두 용서하였다. 경덕의 공이 제일로 평가 받아 비단 만 필을 받았고 제부(齊府)의 금폐(金幣), 그릇들도 하사 받았다. 우무후대장군(右武侯大將軍)직을 받고 오국공(吳國公)에 봉하여졌으며 식읍이 천삼백호(戶)에 달하였다.
  돌궐족이 침입하자 경주도(徑州道) 행군총관(行軍總管)이 되었다. 그들이 경양(徑陽)에 이르자 날랜 병사들로 싸움하여 승리하였다. 경덕은 얻은 재물들을 반드시 병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러나 성격이 지나치게 강직하고 또 세운 공으로 자부심이 컸으며 대신(大臣)들의 시비득실(是非得失)을 따져 재상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양주(襄州) 도독(都督)으로 평관 되었다가 다시 동주자사(同州刺史)로 옮겨졌다.
  일찍이 태종(太宗)을 모시고 경선궁(慶善宮)에서 연회를 하는데 그보다 서열이 윗자리인 사람에게 경덕이 말하였다. 『그대는 무슨 공이 있어 내 윗자리에 앉는가?』 임성왕(任城王) 도종(道宗)이 그를 타이르자 경덕은 불끈하여 도종을 때려 거의 눈이 멀뻔하게 하였다. 태종이 안색에 불쾌한 빛이 역력하였다. 잔치가 끝나고 왕이 소(召)를 내려 꾸짖었다. 『내가 한 대(漢代)역사를 보건데 일찍이 고조(高祖) 때 공신(功臣) 중에 몸을 잘 보전(保全)한 자가 적은 것을 괴이하게 여겼었다. 지금 그대의 행동을 보고 비로소 한신(韓信)과 팽월(彭越)이 죽임을 당한 것은 고조의 과오가 아님을 알았다. 나라의 대사(大事)는 상과 벌에 있거늘 임금의 은혜에 빙자한 행위는 여러 번 있어서는 아니 된다. 힘써 스스로 수양하여 후회하지 않도록 할 것이다.』 경덕이 머리를 조아리고 사죄하였다. 후에 악국(鄂國)에 봉하여졌고 녹주(鹿州)와 하주(夏州)의 도독이 되었다. 나이가 들어 집에 돌아갔는데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직을 받았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조정에 나가 임금을 뵈었다.
  임금이 고려(高麗)를 치려하니 경덕이 상소를 올렸다. 『임금께서 료(遼)지방을 행차하시고 태자께서 정주(定州)에 머무르시면서 두 수도가 텅 비어 현혹지란(玄惑之亂)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고려는 맥이(貊夷)로 조그만 나라로서 만승(萬乘)의 군대가 동원 될 필요는 없습니다. 청컨대 장군들에게 위임하시어 때를 보아 멸하게 하십시오.』 태종은 그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본관행태상경(本官行太常卿)의 직분으로서 좌일마군총관(左一馬軍總管)이 되었다. 고려원정에 돌아와 다시 벼슬하였다. 현경(顯慶) 3년에 세상을 떠나니 나이가 일흔 네 살이었다. 고종이 수도의 5품 이상 관리와 사신을 집으로 보내 문조(問弔)케 하고 사도(司徒), 병주(幷州)도독 벼슬을 내려주고 시호를 충무(忠武)라 하였다. 얼룩무늬의 검, 새깃 장식, 북과 피리 등을 주어 소릉(小陵)에 안장하였다.
  경덕은 만 년에 빈객을 마다하고 왕래하지 않았다. 정자와 연못을 정비하고 그곳에서 청상곡(淸商曲)을 연주하여 스스로 조신하였다. 또 운모(雲母)가루를 먹으며 방사술(方士術)로 수명을 연장하였다. 그가 전쟁터에서 싸움할 때 상대방의 창을 피하는데 뛰어났으며 단신으로 말을 타고 적진으로 들어가 적들이 그를 찔러도 다치지 않으며 게다가 적의 창을 빼앗아 되 찔렀다. 제왕(帝王) 원길(元吉)이 칼날이 없는 칼로 그와 겨루자 청하여 싸웠으나 경덕을 칼로 맞출 수가 없었다.
  임금이 일찍이 묻기를 『창을 빼앗는 것과 창을 피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어려운가?』 제왕(帝王)과 한번 시합해 보라 하니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는데 제왕이 세 번 창을 빼앗기자 제왕은 크게 부끄러워 승복하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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