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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28년(1998)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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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의 일대기 : 權智가 널리 퍼지다

權智가 널리 퍼지다

           

 

<증산의 생애와 사상>


  어느날 창국이 외부에 출타했다가 집에 돌아오다가 독사가 기어다니고,부인이 맨발로 다니는 것을 보았다. 창국은 상장으로 독사를 쳐 죽였다.

  이 광경을 상제께서 보시고 「독사야 독사야 상인이 이것을 보고 상장으로 타살하고 도승이 그것을 보면 선장으로 타살하리라」고 시 한수를 읊으셨다.

  이튿날 김형렬이 이곳 입석리의 상제님을 찾아왔다. 

  상제님의 수종다리 병은 매우 회복됐다.

  상제께서 이 곳을 떠나 함열의 회선동 김보경의 집에 가시기로 작정하셨다. 김형렬이 따라 다녔다.

  하루에 이, 삼십리씩 걸으셨다. 며칠 걸려서 함열에 이르셨다.

  함열에서 종도들이 새로운 종도들을 추천하여 승낙을 얻었다.

  김형렬은 며칠 후에 그의 집으로 되돌아 갔다. 상제께서는 이곳에 몇달동안 머무셨다.

  어느날 상제께서 김보경의 집에서 종도들에게 어렸을 때에 지은 글을 외워주셨다.

  「운래중석하산원 장득척추고목추 상심현포청한국(運來重石何山遠 粧得尺椎占木秋 霜心玄圃淸寒菊)

  석골청산수락추 천리호정고도원 만방춘기일광원(石骨靑山瘦落秋 千里湖程孤棹遠 萬方春氣 ㅡ 筐圓)

  시절화명삼월우 풍류주세백년진 풍상열력수지기(時節花明三月雨 風流酒洗百年塵 風霜閱歷誰知己)

  호해부유아득안 구정만리산하우 공덕천문일월처(湖海浮遊我得顔 驅情萬里山河友 供德千門日月妻)」라고 외워주시고 또 다른 글을 외워 주셨다.

  『사오세무현관 선령 생유학 사학생(四五世無顯官 先靈 生儒學 死學生) 이삼십불공명 자손 입서방 출석사(二三十不功名 子孫 入書房出碩士)』

  상제께서 十월에 들어서도 함열에 계셨다. 김형렬이 찾아왔다. 다른 종도들도 모여들었다. 상제께서 춘심에게 공사 준비를 시키시고 종도들과 함께 공사를 행하셨다. 그것이 어떤 공사인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이 곳에 계속 계시다가 섣달에 구릿골로 떠나셨다. 떠나실 때에 길이 퍽 질었다. 이것을 보시고 「칙령치도신장 어재함라산하이어우전주동곡(勅令治道神將 御在咸羅山下移御于全州銅谷)」이라 쓰고 그것을 태우셨다.

  구릿골에 이르셨다. 정괴산(丁槐山)이 구릿골 입구에서 살면서 상제님을 지성껏 모셨다. 그분이 돌아오신 것을 알고 공양코자 누추한 자기 술집으로 모셨다.

  그의 부인이 질솥이 깨어져 낙심하여 울음을 터트렸다.

  이 광경을 집안으로 들어오다 보시고 상제께서 긍휼히 여겨 따라온 종도 신경원(辛敬元)에게 쇠솥 한 개를 사다 주라고 이르셨다. 그 솥을 얻은 후부터 괴산의 장사가 잘 되고, 가세도 차차 일어났다. 훗날에 괴산은 태인읍의 방아다리로 이사했다. 이 때에 질솥을 환평(環坪)에 사는 정동조(鄭東朝)에게 팔았다.

  이것을 산 동조는 살림이 점점 늘어나고 괴산은 점점 가세가 찌들었다.

  또 하루는 상제께서 용화동에 사는 박봉민의 주막에 들리셨으나 술이 떨어졌기에 봉민에게 술을 빚었던 항아리에 물을 부어 가져오게 하고, 손을 넣어 저어서 술을 만드셨다. 종도들과 그 외 사람들에게 나누어 마시게 하셨다. 그 맛이 본래의 술 맛과 다름이 없었다는 소문이 그들에 의해서 퍼졌다. 이로써 상제님의 권지(權智)가 널리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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