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너별 보기
   daesoon.org  
대순137년(2007) 10월

이전호 다음호

 

도전님 훈시 종단소식 상제님의 발자취를 찾아서(12) 교리소개 『전경』속의 옛 땅을 찾아서 『전경』속 역사인물 기행문 답사기 수기 대순학생회 대학생코너 대원종 포토에세이 인물소개 아름다운 세시풍속 고사 한마디 금강산 이야기 종교산책 철학과의 만남 영화 속으로 이달의 책 & 십자말 맞추기 Q&A 게시판 알립니다

『전경』속의 옛 땅을 찾아서 : 원평(院坪)과 용암리(龍岩里)를 찾아서

원평(院坪)과 용암리(龍岩里)를 찾아서

 

 

글 연구위원 이상훈

 

<사진1> 원평

 

 

  6월 25일, 날씨가 점차 무더워지기 시작하는 여름의 초입에 원평과 용암리로 답사를 떠나게 되었다. 이른 새벽부터 준비하여 처음 목적지로 잡은 곳은 원평이었다.

  원평은 예전부터 들이 넓다고 하여 ‘너른들’이라 불리었던 곳으로서 상제님 재세시에는 전북 금구군 수류면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이 통폐합됨에 따라 금구군이 폐지되고 김제군 금산면에 속한 지역이 되었다. 그 후 1995년, 원평은 김제군이 시(市)로 승격됨에 따라 행정구역상 전북 김제시 금산면에 속하게 되었다.

  이곳은 구암리, 용흥리, 성암리 일부를 합한 곳이라 그런지 마을 규모가 커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일단 마을 내부에 들어서자 아담하고 소박한 가옥들이 있었고, 주위에 넓게 자리잡은 들판을 보고 있노라니 원평을 찾아오느라 피곤했던 몸과 마음이 개운해지는 듯했다.

  한편 상제님께서는 “또 원평이 지금은 건너다보이나 훗날에는 건너다보이지 않을 때가 오리라. 그러나 또 다시 건너다보일 때가 있으리니 그때가 되면 세상 일이 가까워짐을 깨달을지어다.”(예시 62절)라고 말씀하셨는데, 과연 어느 장소에서 원평을 바라보시고 이 같은 말씀을 하셨는지, 그리고 원평이 안보이게 된다면 무엇 때문에 안보이게 됐을까라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전경』 어디를 찾아봐도 상제님께서 원평을 어디에서 바라보시고 하신 말씀인가는 나와있지 않기에 어떻게 그 의문점을 풀어나갈까 막연하기만 했다. 답답한 마음에 원평에서 제일 높은 건물인 원평초등학교 옥상에 올라가서 주위를 둘러보기로 했다. 선생님 한 분을 만나 양해를 구하고 학교 옥상에 올라가 그 일대를 전후좌우 모든 각도로 살펴보았다. 원평 주위에는 산과 들, 그리고 인공구조물인 저수지 하나가 있었다.

  주위를 둘러봤을 때, 상제님 재세시와는 다르게 생겨난 장애물은 바로 이 저수지(금평저수지)뿐이었다. 1961년에 축조된 금평저수지는 만수위 면적이 1,042ha로서 모악산에서 내려오는 물줄기를 받기 때문에 마르지 않는 저수지로 유명하다. 그리고 이 저수지는 원평과 동곡 사이에 자리해 있으며, 행정구역상으로는 전북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에 속해 있다. 그렇다면 상제님께서 머무셨던 지역 중 옛날에는 원평이 건너다 보였다가 현재는 어떤 인공적인 구조물에 의해 보이지 않게 되었을만한 지역은 동곡 밖에 없는 바, 동곡에서 원평을 바라보시고 말씀을 하신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 확실히 알아보기 위해 먼저 금평저수지 둑에 올라가보기로 했다. 둑 위에서 바라보니 역시 원평이 한 눈에 들어왔다. 반대로 동곡쪽도 시야에 잡힐 정도로 잘 보였다. 또한 둑위에 서서 바라봤을 때, 원평은 지대가 낮았으며 이와는 다르게 동곡쪽은 일직선상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사진2>와 <사진3>참조). 즉 동곡보다 원평이 지대가 낮음을 확인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거리가 멀지도 않을뿐더러 원평보다는 조금 고지대인 동곡에서 원평이 충분히 보였으리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순간 그동안 알지 못했던 상제님의 말씀이 어떤 뜻인지 알 수 있지 않을까하는 설레임과 긴장감이 온 몸을 적셨다. 마지막으로 동곡쪽에 가서 원평이 실제로 어떻게 보이는가를 확인해보기로 했다.

  둑 위에서 보았던 동곡지역에 도착하여 원평쪽을 바라다보았다. <사진4>에서 알 수 있듯이 역시나 보이는 것은 둑의 모습뿐, 원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상제님 재세시 종도들은 동곡에서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자그마한 하천에 지금의 저수지라는 것이 생기리라는 것을 상상하지도 못했으리라.

  상제님 재세시에는 없었다가 원평이 안보이게 됐을 정도로 생겨난 큰 구조물은 저수지 말고는 없었고, 더욱이 이 저수지 너머에는 상제님께서 머무셨던 지역인 동곡이 있었다. 결국 <그림1>과 <그림2>에서처럼 상제님 재세시에는 동곡에서 원평이 보였던 것이 이후에 인위적인 구조물인 저수지라는 것이 세워짐으로써 보이지 않게 된 것으로 추정이 가능한 것이다. 다시 원평이 보이게 되는 때가 언제일지는 알 수 없지만 빠른 시일 내에 원평이 다시 보이길 기대하며 다음 목적지인 용암리로 발길을 돌렸다.

 

 

 

 

 

용암리(龍岩里) 그리고 수침막(水砧幕)

  용암리를 찾기 위해 조사한 자료에는 ‘쌍용리의 회평마을에서 동남쪽에 있다’라고만 나와있어 찾는데 어려울 줄 알았으나 의외로 빨리 찾을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원평과 관련하여 금평저수지를 둘러보던 중에 눈에 띤 하나의 다리 덕분이었다.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마을 알림돌은 없었지만, ‘용암교’라는 다리가 있어 이곳이 용암리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다리를 건너자 길 좌측편에는 큰 나무가 마치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 역할을 하듯 떡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중년쯤 되어 보이는 마을사람 몇 명이 그 나무 그늘에서 잠시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그분들께 물어 여기가 용암리가 맞음을 확인할 수 있었고, 필자도 잠시 뜨거운 태양빛을 피해 나무 그늘에서 마을 풍경을 둘러보았다.

 

<사진5> 마을 입구에 있는 용암교

 

 

<사진6> 용암 마을

 

 

  마을 뒷산에 용을 닮은 바위가 있다하여 이름 붙여진 용암마을은 행정구역상으로는 김제시 금산면 쌍용리에 속해있다. 용암리란 이름에서도 알 수 있겠지만 이 부근 지역은 ‘용’자와 관련이 많은 듯하다. 쌍용리라는 지명도 그러한데, 이곳은 본래 전북 금구군 수류면 지역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쌍용리는 원평과 마찬가지로 1914년에 있었던 행정구역 통폐합 때 바뀌게 되었는데, 용은리(龍隱里)와 용호리(龍湖里) 일부를 합하여 두 개의 ‘용(龍)’자가 들어있다하여 ‘쌍용리(雙龍里)’라는 지명으로 금산면에 편입되었다.

  한편 상제님께서는 천하의 형세가 종기를 앓음과 같다고 하시며, 그 병든 세상을 치료하시는 공사를 보실 때에 풀과 술 그리고 쇠꼬리를 사용하셨는데, 특이한 것은 쇠꼬리를 용암리에서 가져다 쓰셨다는 점이다.01 그 당시 쇠꼬리는 어느 마을에서나 구할 수 있는 흔한 것이었다. 그런데 굳이 용암리에서 쇠꼬리를 구해 오게 하여 쓰신 것을 생각해 보니 새삼 용암마을이 기이하게 느껴져 다시 한번 더 마을을 눈여겨 보았다. 또한 용암리는 차경석이 상제님을 처음 배알하고 크게 감복했던 곳이기도 하다.02

 

<사진7> 마을에 살고 있는 할아버지가 사진 상에 보이는 하얀 집 밑쪽에 주막이 있었다고 하며 언덕 뒤, 즉 하얀 집 좌측편으로 동곡으로 가는 길이 있었다고 한다

 

 

<사진8> 상제님께서 머무신 수침막 외에 또 다른 수침막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곳

 

 

  하지만 과연 상제님께서 머물고 계셨다는 수침막03이 어디였을까하는 의문이 생겨났다. 왜냐하면 용암리 어느 곳을 둘러보아도 물레방앗간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같이 그늘에서 쉬고 있던 마을사람들에게 여기에 물레방앗간이 있는지, 혹은 전에 있었는지를 물어보았다.

  “물레방앗간? 본적 없는데?”

  하며 그 분은 옆에 사람한테 물어보기 시작했다.

  “이보게들, 물레방앗간이 있었다는 얘기 들어본 적 있는가?”

  “글쎄…. 나도 처음 듣는 얘긴데?”

  한 사람도 그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없는 듯했다. 조금의 가능성에 희망을 걸었던 마음이 차갑게 식어가려고 할 때에 갑자기 연세가 70이 넘어 보이는 한 할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할아버지라면 혹시 알지도 모르겠다 싶어 수침막이란 것과 물레방앗간에 대해 같이 물어보았다. 그러자

  “수침막? 수침막은 모르겠고 물레방앗간이라면 내가 어릴 때 저기 둑 밑쪽에 하나 있었지. 저기 하얀 집 보이지? 바로 그 밑이야. 그 옆으로 주막도 있었어. 원래는 둑이 없었고 그 쪽에 동곡으로 가는 길이 있었어. 그 외에 또 내가 어릴 때 들은 얘기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저기 보이는 무덤 있는 곳, 그 밑에 물레방앗간이 하나 더 있었다는 얘기만 들은 적이 있어.”

  할아버지의 이 같은 말을 듣자 어두운 동굴을 걷다가 빛을 발견한 기분이 들었다. 곧바로 상제님께서 계셨던 수침막 자리라고 추정되는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가는 중간에 할아버지가 어린 시절 마을 어른들로부터 또 다른 물레방앗간이 있던 자리라고 들었다던 장소를 지나게 되었다.

  <사진8>의 비석 근처가 물레방앗간이 있었다던 자리라고 하는데, 그곳에서 언덕을 넘어가는 길은 예전에 선비들이 전주로 과거를 보러가던 과거길이었다고 한다. 이 길은 동곡으로 연결되지 않은 길이기 때문에 상제님께서 동곡을 오가며 들르셨을 수침막이라고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한 생각을 하며 그 곳을 잠시 지켜본 뒤 다시 목적지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얼마 안가 할아버지가 이야기했던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옛날 개울을 따라 수침막이 있었고, 바로 그 좌측편에는 동곡으로 연결된 길이 있었던 곳. 비록 지금은 그 수침막이 있었던 자리에 둑이 생기고 그 밑으로 작은 하천이 흐르고 잡초와 자갈덩이가 그곳을 뒤덮고 있었지만 무언지 모를 감동이 가슴 한켠을 쓸고 지나갔다. 이곳에 상제님께서 머무르셨던 수침막과 주막이 있었다는 것이다. 비록 직접 볼 순 없었다 하더라도 상제님께서 남기고 가신 발자취를 찾아내고, 직접 밟아본 것만으로도 벅찬 감동이 밀려왔다. 짧은 순간이지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조금이나마 상제님을 가까이 느낄 수 있었고, 그에 따라 상제님의 도를 더욱 심수덕행(心修德行)해야겠다는 굳은 의지도 다지게 되었다.

 

 

 

 

 

<사진9> 수침막이 있었던 터- 수침막이 있던 터로 예상되는 장소이며, 뒤에 보이는 것은 금평저수지 둑이다

 

 

 

 


01 상제께서 임인년 가을 어느 날에 김 형렬에게 풀을 한 곳에 쌓고 쇠꼬리 한개를 금구군 용암리(金溝郡龍岩里)에서 구하여 오게 하고 또 술을 사오고 그 쌓아놓은 풀에 불을 지피고 거기에 쇠꼬리를 두어 번 둘러내라고 이르시고 다시 형렬에게 태양을 보라고 말씀하시니라. 형렬이 햇무리가 나타났음을 아뢰이니라. 그말을 상제께서 들으시고 이제 천하의 형세가 마치 종기를 앓음과 같으므로 내가 그 종기를 파하였노라 하시고 형렬과 술을 드시었도다. (공사 18)

02 정읍(井邑) 사람 차 경석(車京石)이 정미년 오월에 처음으로 상제를 배알하였느니라. 이 때 상제께서는 용암리(龍岩里) 수침막(水砧幕)에 머물고 계셨도다. 그는 원래 동학 신도였으나 일진회 전주 총대를 지낸 사람이라. 그는 전주 재무관과의 소송관계로 정읍에서 전주로 가던 길에 점심을 먹으려고 용암리 주막에 들렀는데 이 때 상제께서도 김 자현(金自賢)과 몇 종도를 데리고 이 주막에 들르셨도다. 경석은 상제의 의표와 언어 동작을 살피고 그 비범하심을 알고 예를 갖추어 말씀을 청하는지라. 상제께서 그를 태연히 대하시니 그는 여쭈어 말하기를 무슨 업을 행하시나이까.상제께서 웃으시면서 의술을 행하노라고 말씀을 건너시고 술을 마셨도다. 그러시다가 상제께서 계탕 한 그릇을 그에게 권하시니 그가 받은 뒤에 그릇에 벌 한 마리가 빠져 죽거늘 경석이 수저를 멈추고 혹 상서롭지 못한 일이 아닌가 망서리고 있는 것을 상제께서 보시고 벌은 규모 있는 벌레니라고 말씀하시니 그가 속으로 감복하는도다. 그는 상제께 서류를 꺼내어 보이면서 그 곡절을 여쭙고 세 사람이 모이면 관장이 송사를 처결한다 하온데 선생님께서 판단하여 주소서.하고 상제를 시험코자 답을 청하는지라. 상제께서 말씀하시기를 일의 곡직은 여하간에 원래 대인의 일이 아니라. 남자가 마땅히 활인지기를 찾을 지언정 어찌 살기를 띄리요하시니 경석은 더욱 위대하심에 경복하여 곧 소송 서류를 불사르고 사사하기를 청하면서 머물고 계시는 곳을 묻는도다. 이에 상제께서 나는 동역객 서역객 천지 무가객(東亦客西亦客天地無家客)이다고 하시니라. 경석은 머물고 계시는 곳을 모르고 헤어지면 다시 배알할 기회가 없을 것을 짐작하고 날이 저물어 상제와 그 일행이 떠나는 것을 기다려 그 뒤를 좇으니라. 닿은 곳이 용암리(龍岩里) 물방앗집이니라. 경석은 그 식사와 범절이 너무 조촐하여 한시도 견디기 어려워하였도다. (행록 337)

03 수침막 *물방앗간 혹은 물레방앗간의 한자어로 지금은 쓰이지 않는 말.

관련글 더보기 인쇄

Copyright (C) 2009 DAESOONJINRIHOE All Rights Reserved.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 강천로 882 대순진리회 교무부 tel : 031-887-9301 mail : gyomubu@daesoon.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