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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38년(2008)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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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보기 : 무극도 해산시기에 대한 고찰(考察)

무극도 해산시기에 대한 고찰(考察)

 

 

글 대순종교문화연구소

 

Ⅰ. 들어가는 말

  도주께서 기유년부터 신사년에 이르기까지 도수에 의한 공부와 포교에 힘을 다하시니 신도의 무리가 이곳 저곳에서 일어나니라. 그러나 일본이 이차 대전을 일으키고 종교단체 해산령을 내리니 도주는 전국 각지의 종도들을 모으고 인덕도수와 잠복도수를 말씀하시며 “그대들은 포덕하여 제민하였도다. 각자는 집으로 돌아가서 부모 처자를 공양하되 찾을 날을 기다리라.” 이 선포후에 도장은 일본 총독부에 기증되니 도주께서는 고향인 회문리로 돌아가셨도다. (교운 2장 43절)

 

 

  교운 2장 43절에 따르면, 도주님께서 창도하신 무극도(无極道)는 신사년 즉 1941년까지 존속하다가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과 전쟁을 시작한 후에 해산되었다. 『전경』에 정확한 해산 일자까지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아무리 빨라도 1941년 12월 8일 이후의 일이 분명하다. 그리고 1941년이 얼마 안 남은 시점에서 전쟁이 일어났으므로 종교단체해산령의 공포와 집행에 어느 정도의 시간이 소요될 것이라는 상식적인 추정을 더해 본다면 무극도의 해산은 1942년 정도에 이루어졌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런데 대순진리회를 비롯한 신종교(新宗敎)를 연구하는 일부 연구자들은 무극도의 해산시기가 1936년인 것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선행연구의 가치를 지니는 그들의 저작물(著作物)은 다른 연구자들에 의해 무비판적으로 인용되어 확대 재생산될 위험이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종단 내부에까지 이 잘못된 정보가 전달되어 극히 일부이기는 하나 1936년이 맞다고 주장하는 사례까지 생기고 있는 실정이다.

  교운 2장은 『전경』의 다른 부분과는 달리 도전님께서 친히 원고를 써 주신 장(章)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도전님은 도주님으로부터 유명(遺命)으로 종통을 계승받은 유일한 종통계승자이다. 따라서 도주님과 관련된 사항을 도전님보다 더 정확히 알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 상식일 것이다. 당연히 이러한 논의 자체가 불경(不敬)스러운 일이 될 수밖에 없으나 지금 바로잡지 않으면 시간이 흐를수록 그 폐해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는 판단으로 이 글을 기획하게 되었다.

 

 

Ⅱ. 잘못된 1936년 설의 배경

  무극도의 해산시기에 대하여 연구자들 사이에서 혼선이 빚어지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일제강점기 무극도 해산을 주도했던 관공서의 기록이 현재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관공서 기록뿐만 아니라 우회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주변 기록들조차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연구자로서는 현재 나와 있는 몇 종의 문헌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신종교 연구자들이 비교적 많이 참조하고 있는 문헌으로 홍범초가 저술한 『범증산교사』가 있다. 1988년 간행되었으며, 20여 종단에 대한 비교적 상세한 소개를 담고 있어 신종교 연구에 많이 인용되는 편이다. 이 책의 367쪽과 368쪽을 보면 홍범초는 무극도가 해산된 시기를 1936년으로 적고 있는데, 그 주요근거를 태극도의 『진경전서』(1987년 출간)와 이정립의 『증산교사』(77년 출간)에서 찾고 있다.

  하지만 『진경전서』는 도주님의 유명(遺命)을 거역하고 도전님께 반기를 들었던 배도자 무리들에 의해 저술된 일고의 가치도 없는 자료이다. 『증산교사』 역시 증산교 신도였던 이정립01에 의해 저술된 책으로서, 무극도에 대한 악의적인 표현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을 정도로 문헌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하고 있다. 중요한 점은 두 책 모두 1936년 설에 대한 근거를 전혀 제시하지 않고 있다.

  이들이 1936년을 주장하는 배경에는 보천교의 해산이 있는 듯하다. 1936년 윤3월 차경석의 죽음으로 27년 헛도수02가 끝나고 보천교는 이후 조선총독부의 대대적인 소탕작업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이때 몇몇 민족 종단들도 같이 해산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그것인데, 일제에 의한 종교단체해산은 이해(1936)에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가장 거리낌 없이 그리고 많은 수의 종교단체가 해산된 시기는 일제가 세계의 이목에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게 된 태평양전쟁 발발(1941년 12월 8일) 이후였었다.

  이렇듯 아무런 객관적인 근거 없이 저술된 『진경전서』와 『증산교사』의 내용을 무비판적으로 인용한 『범증산교사』와 같은 문헌은 시간이 흐를수록 무극도 해산시기가 1936년이라는 잘못된 설을 정설로 만들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Ⅲ. 수집된 자료와 그로부터 알 수 있는 사실들

  무극도장이 위치했던 장소의 당시 지번은 ‘전북 정읍군 태인면 태흥리 524번지’로 전주 지방법원 정읍지원 등기과에 방문한 결과, 건물에 관한 사항은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지만 토지에 대한 사항은 말소 등기부등본(해방 이전분을 포함)이 남아 있었다.

  원본은 육안으로 알아보기 어려운 상태여서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후 확대하였고, 주요사항을 정리하여 별도의 표로 다시 만들어 보았다.

 

 

 

  1925년은 무극도장이 건립되던 해이다.03

  당시 매입한 도장부지의 원래 소유주는 古市さよ(후루이치 사요)라는 일본인이었다. 1925년 5월 4일에 매매가 된 도장부지는 동년 9월 30일에 趙周赫(조주혁)이라는 명의로 등기되었고, 이후 1940년 6월 5일까지는 아무런 변동사항이 없다. 이것만으로도 1936년에 무극도장이 총독부에 넘어갔다는 설이 잘못된 것임을 충분히 알 수 있다. 1936년에 건물만 조선총독부로 넘어가고 이후 4년간이나 토지를 빼앗기지 않고 무극도 측에서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인정하기 어렵다.

  보다 정확한 결과를 얻기 위해 1940년 6월 이후 명의자인 金鎭(김진염)에 대한 조사를 진행해 보았다. 조사 결과를 기술하기 전에 한 가지 특이한 사항을 언급하고자 한다.

  표의 3번 항목을 보면 최초 등기일로부터 15년이나 지난 시점인 1940년 6월 5일에 와서 1925년 명의자를 趙周赫으로 등기한 것을 신청착오라고 하는 새로운 등기를 하였다. 趙周赫은 명의제공자일 뿐 소유자는 아니라는 내용이다. 그리고 같은 날 金鎭을 새로운 명의자로 등기하고 있다. 얼핏보아도 趙周赫이란 인물에게 어떤 문제가 발생하여 도장부지의 명의를 다른 사람으로 변경한 것으로 짐작이 되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金鎭이란 인물 역시 무극도 내부의 사람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수소문한 결과 金鎭이란 인물은 사망하였고, 그의 부인 은순례씨와 딸 김혜복씨에게 인터뷰 요청을 하여 서울시 노원구 상계동 주공아파트 ○○○동 □□□호 자택에서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부인은 현재 96세로 너무 연로하여 인터뷰가 불가능한 상태였고, 딸의 어릴 적 기억을 통해 아버지가 평범한 일생을 살지는 않았으며, 평생 종교와 연구 활동에 몰두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무극도장 부지는 1942년 4월 金鎭에서 赤木正男(아카키 마사오)라는 인물로 넘어가게 된다. 창씨개명 당시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위의 표 5번 항에서 보듯 金鎭(김진염) → 金海鎭(김해진염)과 같은 식으로 창씨개명정책의 목표와 취지를 훼손하는 방향으로 대응하였다.04 赤木正男라는 이름을 살펴보면 赤木(아카키)라는 성씨는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이 성씨를 만들던 유형에 속하지 않는 순수 일본인의 ‘씨(氏)’05이며, 正男(마사오)라는 이름도 대표적인 일본 이름06이다.

  교운 2장 43절의 ‘일본이 이차대전을 일으키고(1941.12. 8) 종교단체해산령을 내려 무극도장이 조선총독부에 기증되었다’는 기록을 볼 때, 赤木正男는 분명 총독부와 관계가 있는 일본인이었을 것이다. 물론 일부 극소수 친일적인 한국인들이 완전히 일본풍의 이름을 택한 사례도 있으므로 그가 조선인이라는 사실도 배제할 수는 없으나, 이 경우에도 매우 친일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에 무극도장 부지 낙찰이 가능했을 것이며 직전 명의자인 金海鎭과는 완전히 성격이 다른 인물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赤木正男가 무극도장 부지를 손에 넣은 1942년 4월은 이 글의 서두에서 추정한 무극도 해산시기와도 거의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한편 무극도장이 총독부에 넘어간 이후 도장건물인 도솔궁(兜率宮)과 영대(靈臺)는 이듬해인 1943년에 김상기가 사들여 전북 부안군 주산면 돈계리 342번지와 348번지에 이축(移築)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돈계리에 거주하던 김상기의 친척 김규영씨의 증언에 따른 것이다.07

  다시 표로 돌아가서 7항을 보게 되면 1944년 3월에 金海琦河(김해기하)외 4인은 공동명의로 赤木正男로부터 무극도장 부지를 사들인다. 이들의 주소지는 위의 金鎭과 같은 정읍군 태인면 태흥리 281번지다. 조사결과 이들 5인은 金鎭의 조카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08

  만약 이들이(적어도 金鎭이) 무극도와 관계가 전혀 없었던 사람이라면 바로 2년 뒤인 1944년에 다시 이 땅을 사들였을까?

  그들은(적어도 金鎭은) 그 땅이 무극도의 도장부지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약 10년 후 이들은 무극도장 부지를 학교법인에 기증하였다(표의 8항). 이상과 같이 군데군데 추가적으로 확인이 필요한 부분도 있지만 전체적인 그림으로 볼 때, 무극도의 해산시기는 1936년이 아니라 일본이 태평양전쟁(1941.12. 8)을 일으킨 이후(대략 1942년 봄)가 분명하다.

 

 

Ⅳ. 나가는 말

  그간 무극도를 계승한 당사자임에도 대순진리회 측의 기록은 연구자들에 의해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고 그 결과 무극도의 사정을 잘 모르는(때론 악의적인 견해를 가진) 외부 학자의 책이 많이 채택되어 왔다. 여기에 편승해 태극도의 『진경전서』(87년 출간)와 같은 서적조차 상당한 근거를 가진 문헌으로 묻어가고 있다.

  『진경전서』는 2년 후인 89년에 『진경』이라는 이름으로 재출간되었다. 『진경』은 「무극진경」과 「태극진경」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중 「태극진경」이 도주님의 행적을 소상히 기록하고 있다는 이유로 일부 수도인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으나, 그 내용이 전혀 신빙성이 없는 소설09이라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는 듯하다. 도주님으로부터 유명(遺命)으로 종통을 계승하신 도전님께서는 도주님에 대해 수도인들이 알아야 할 부분을 교운 2장으로 친히 작성하여 내려 주셨다. 도주님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아보고 싶어하는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 바는 아니나, 무극도의 해산사례에서 보듯이 정확한 근거 없이 지어진 「태극진경」을 자주 접함으로써 나중에는 그 내용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느껴지는 병폐가 생겨나는 것이므로 자제하는 편이 좋을 듯하다. 외부의 학자들이야 도를 모르는 사람들이니 그러려니 할 수 있지만, 그들의 잘못된 설을 가지고 종단 내부에서까지 주장한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차제(此際)에 『典經』의 신성성(神聖性)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01 차옥숭, 『한국인의 종교경험, 증산교·원불교』, 서광사, pp.44~48.

02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대순회보』 68호 돋보기 코너의 ‘27년 동안의 헛도수’를 참조 바람.

03 교운 2장 32절.

04 구광모, 「창씨개명정책과 조선인의 대응」, 『국제정치논총』 제45집 4호, 2004, p.46.1938년 조선총독부는 ‘수양동우회 사건’과 ‘흥업구락부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조선인과의 면담을 통해 조선에서 폐성창씨정책이 절대로 추진 불가할 뿐만 아니라 강행했을 때는 3·1운동을 능가하는 전국적 규모의 폭동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조선식 성’을 그대로 둔 채 ‘일본식 씨’를 새로 만드는 것으로 정책을 후퇴시켰다. 법령으로 강제하는 것은 ‘일본식 창씨’였을 뿐이고 이름은 원할 경우에만 일본풍의 이름을 사용하도록 했기 때문에 대개의 경우 이름은 그대로 두었으며 음만 일본식으로 읽었다.

05 초대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1890년대 일본 총리대신으로서 일본 부인들에게 남편의 ‘씨’를 따르도록 규정한 명치민법의 제정을 주관했다. 그리고 이러한 제도를 주창하고 그 심의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전문가는 동경대 법학과 교수였던 우메 겐지로우였다. 그는 그간 일본에서 姓과 氏가 유사한 개념으로 혼용되고 있으나, 이를 법률적으로 다음과 같이 구별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했다. 즉, ‘성’은 중국의 관습에 따라 만들어진 것으로서 가계의 혈통을 나타내는 표지이므로 일생동안 변할 수 없는 것이며, ‘씨’는 문명국(서양열강)의 관습에 따라 한 가족임을 나타내는 칭호이므로 혼인, 이혼, 입양, 파양 등에 의하여 변할 수 있는 것이라 주장하였다. 따라서 일본의 법률용어에서 ‘성’을 폐지하고 ‘씨’만을 사용할 것을 건의하였다. 결국 우메교수의 의견이 받아들여져, 1898년 이후 일본에서 한 가족은 부인과 이성(異姓)양자 등을 포함하여 모두 가장과 동일한 ‘씨’로 불려지며, 법률적인 개인표지로써 ‘성명’이 아니라 ‘씨명’이 사용되고 있다.(위의 책 p.36)

06 김순전·박제홍, 「‘보통학교수신서’에 등장한 아동명의 변화를 통한 창씨개명 고찰」, 『일본문화학보』vol 29, 일본문화학회, 2006, p.8.

07 2007년 6월 교무부에서 인터뷰를 실시하였음.

08 정읍시 태인면사무소에서 확인함.

09 「태극진경」 즉 『진경』의 저자인 황진규의 진술에 따르면 윤금현의 기록을 참조해서 썼다고 한다. 윤금현은 1952년에 도주님을 처음 뵈었고, 당시 직위가 호령(지금의 교정)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일단 1952년 이전의 내용은 알 수가 없는 상황이었고, 1952년 이후도 도주님을 계속 가까이서 시봉할 위치는 아니었다. 그런데 「태극진경」의 내용은 계속 곁에서 시봉했던 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부분까지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는 점에서 만들어낸 이야기일 확률이 매우 높다. 「태극진경」의 정확성에 대해서는 별도의 지면을 통해 소개할 예정이나 우선 대표적인 한 가지만을 들자면 ‘태극주’ 문제를 들 수 있다. 옥황상제님 재세시에는 ‘정산님’ 또는 ‘도주님’이라는 두 가지 호칭 외에는 쓰이지가 않았으며, 당신께서 스스로를 ‘태극주’라고 지칭하신 적은 더욱 없었다. 그런데 「태극진경」에는 옥황상제님께서 당신이 ‘태극주’라고 말씀하시는 장면과 ‘태극주’라는 호칭이 여러 군데 나오고 있다. 이는 정확한 상황을 모르는 자가 임의로 지어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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