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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문화와 함께 읽는 전경 : 인종의 차별로 학대가 심하여 살아날 수 없고

인종의 차별로 학대가 심하여
살아날 수 없고



교무부 손영배


▲   백인(?) 유색인종의 짐, THE WHITE (?) MAN"S BURDEN, 1899년 3월 16일 라이프 지, 윌리엄 헨리 워커의 삽화 - 영국의 작가 러디어드 키플링의 백인 우월주의 시 「백인의 짐」을 역으로 풍자한 삽화 (출처: 나무위키)


상제께서 김 병욱에게 “이제 국세가 날로 기울어 정부는 매사를 외국인에게 의지하게 됨에 따라 당파가 분립하여 주의 주장을 달리하고 또는 일본과 친선을 맺고 또는 노국에 접근하니 그대의 생각은 어떠하느냐”고 물으시니 그가 “인종의 차별과 동서의 구별로 인하여 일본과 친함이 옳을까 하나이다”고 상제께 대답하니 상제께서 “그대의 말이 과연 옳도다” 하시고 서양 세력을 물리치고자 신명 공사를 행하셨도다. (공사 1장 12절)


  위 성구는 1903년 당시 상제님의 공사 중에서 조선 국운의 향방과 관련 있는 내용이다. 그 내용을 보면, 상제님께서 김병욱에게 “이제 국세가 날로 기울어 정부는 매사를 외국인에게 의지하게 됨에 따라 당파가 분립하여 주의 주장을 달리하고 또는 일본과 친선을 맺고 또는 노국에 접근하니 그대의 생각은 어떠하느냐” 물으셨다. 병욱은 “인종의 차별과 동서의 구별로 인하여 일본과 친함이 옳을까 하나이다”라고 답하였고, 상제님께서는 “그대의 말이 과연 옳도다” 하시며 공사를 행하셨다. 이 공사에서 상제님께서는 김병욱이 말한 ‘인종의 차별과 동서의 구별’ 문제 때문에 러시아와 조선이 맺는 국제 관계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기셨다. 이 글에서는 조선 국운의 향방을 결정하신 상제님께서 ‘인종의 차별과 동서의 구별’의 문제를 들어 러시아를 선택하지 않으셨던 이유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위 공사가 있었던 1903년 당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는 만주 지역과 한반도의 주도권을 놓고 일본과 러시아가 서로 대립하던 상황이었다. 그 역사적 배경은 청일전쟁(1894)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요동 반도와 대만을 청나라로부터 획득하였지만, 만주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노리던 러시아가 독일과 프랑스와 협력하여 일본에 압력을 넣어 요동 반도를 청나라에 다시 돌려주도록 만든다(삼국간섭). 이 사건의 영향으로 러시아에 접근하는 조선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은 을미사변(1895)을 일으켰으며, 이러한 일본의 세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였다(아관파천). 그리고 한반도 내에서도 일본과 러시아의 대립이 일어났다.
  이때부터 만주와 한반도를 놓고 일본과 러시아는 대립 관계가 본격화되었다. 외교적으로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은 영국과 동맹을 체결하면서 영국으로부터 한반도에서의 지배권을 승인받는 노력을 기울였다. 만주 지역과 한반도를 놓고 러시아와 일본은 협상하였는데, 만주 지역에서 러시아군의 철수를 주장하는 일본과 한반도에서 일본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러시아의 주장이 팽팽하여 협상은 결렬되었다. 당시 외세에 대응할 힘이 없었던 대한제국은 한반도 문제에 대한 러시아와 일본의 격한 대립의 결과에 나라의 운명을 맡겨 놓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상제님께서는 러시아가 안고 있던 ‘인종의 차별과 동서의 구별’ 문제를 공사에서 중요한 고려 요인으로 삼으셨던 것 같다. 그런데 이 문제는 서양 제국주의 열강들이 추진하였던 식민지 정책의 성격과 깊은 관련이 있다. 아메리카 신대륙 발견 이후 서양 제국에게는 식민지가 국가의 부를 축적하는 중요 수단이었다. 무역을 통해 식민지에서 확보한 금, 은, 향신료 등을 팔아 제국들은 부를 축적하였고 이를 통해 강력한 근대국가 체제를 건설해 나갔다.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더욱 강력한 제국의 건설과 광대한 식민지 확보가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그 이유는 식민지국으로부터 값싼 원료와 노동력을 공급받아 생산한 상품을 식민지에 판매하며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취하기 위함이었다.
  이를 위해 서양 제국들은 군사력을 이용하여 강제 병합한 식민지에 서양 근대 문화를 이식하여 그들의 생산품을 판매할 수 있는 시장으로 변모시키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그에 따라 식민지의 문화를 미개한 것으로 간주하여 말살하고 인종 사이에 우열이 존재한다는 이데올로기를 통해 비인도적인 인종 차별 정책을 감행하였다. 인종 차별과 식민지 문화의 말살은 제국주의 식민지 지배 정책의 기본 속성이었다. 이러한 정책을 추진하며 서양 제국들은 강대국이 약소국을 지배하는 것이 적자생존의 원리라며 정당화하였다.
  러시아도 주변 국가를 점령하며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1598년 중앙아시아01 정복을 시작으로 17세기 중엽 시베리아 전체 영토를 확장하였고, 18세기에는 동유럽, 19세기에는 중국의 만주 지역을 점령하면서 당시 조선과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팽창 정책으로 광대한 영토를 얻었으나 산업혁명을 거치지 않아 유럽 열강의 대열에는 아직 합류하고 있지는 못했다. 19세기 중엽에 와서 알렉산드라 2세(재위: 1855~1881) 때 러시아는 산업혁명을 일으키며 근대국가로 발전하였다. 19세기 중엽부터 항공, 전기, 기계[증기기관] 등 기계학 분야에서 현저한 발전을 이루었고, 러일전쟁 직전에 이르러서는 현대식 군함까지 보유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다른 서양 열강들의 견제를 받을 만큼 강력한 제국주의 국가로 부상하였다. 러시아의 이러한 산업 발전은 1904년에 치른 러일전쟁의 밑바탕이 되었다.
  위 공사와 관련하여 ‘인종 차별과 동서의 구별’ 문제는 당시의 러시아 식민지 정책을 살펴보면 확인된다. 식민지에서 실시했던 대표적인 정책은 러시아어 사용, 러시아식 행정제도 시행 강요, 러시아 국교인 정교로의 강제 개종 등이었으며 이는 러시아식 정치ㆍ문화에 동화시키려는 전략의 일환이었다.02 이러한 러시아의 동화정책은 인종적 우월주의에 따른 인종 차별과 문화적 우월주의에 기반한 식민지의 문화 말살이라는 제국주의가 가진 일반적인 식민지 정책과 궤를 같이한 것이었다. 이러한 사례는 폴란드에 대한 러시아의 식민지화 과정에 잘 드러나 있다.
  폴란드는 1795년 러시아, 프로이센03, 오스트리아 삼국에 의해 분할되어 점령당했다. 이때 러시아는 같은 슬라브족이었던 폴란드인(서슬라브족)을 러시아인(동슬라브족)과 다른 인종이라 여기며 폴란드인의 권리를 부정하였다. 폴란드 귀족들의 지위를 박탈하고 폴란드인의 토지 소유를 금지하였으며 이에 반기를 든 귀족들에 대해서는 영지 몰수와 함께 캅카스 지역04으로 강제로 이주시켰다.
  이러한 인종적 차별과 함께 식민지 문화를 무시하는 정책도 실시하였다. 러시아어를 공용어로 만들기 위해 모든 관청에서 러시아어를 사용토록 강요하였다. 이를 교육 정책에도 적용하여 폴란드의 고등교육기관을 폐지하고 모든 학교 수업에 폴란드어 사용을 금지하였다. 이뿐 아니라 생활 문화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종교 영역에서도 폴란드 국민이 믿고 있던 가톨릭을 러시아 정교로 강제 개종하는 정책을 강행하였다.05 이렇게 러시아식 제도를 법, 행정, 경제 등 모든 영역에 적용하며 폴란드의 문화를 근본적으로 말살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이후 1863년을 마지막으로 폴란드라는 국호도 지도상에 사라지게 되었다.

  이처럼 폴란드에서 시행한 러시아의 식민지 정책은 식민지국에 대한 인종적 차별과 함께 언어와 문화를 말살하려 했던 사례이다. 이를 통해 상제님께서 러시아에 대하여 염려하셨던 ‘인종의 차별과 동서의 구별’의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동서의 구별’에서 ‘동서’는 동양의 조선과 서양의 러시아를 대비한 말로써 단순히 동서양의 지리적 구별만이 아니라 동양 문화-서양 문화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렇게 볼 때 같은 서양이었던 폴란드와 러시아보다 조선과 러시아의 문화적 차이가 훨씬 더 크다는 점에서 ‘동서의 구별’의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다.
  1903년 상제님께서 서양 세력을 물리치는 신명 공사를 행하실 때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과 일본은 한반도와 중국, 만주 지역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국력을 집중하던 때였다. 당시 만주와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려고 가장 혈안이 되었던 나라는 러시아와 일본이었다. 이때 대한제국이 식민지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06 만약 한반도가 러시아의 식민지가 되었다면 폴란드 사례와 비슷한 일을 겪었을지도 모른다. 교육제도, 법, 행정을 비롯하여 러시아어 사용과 러시아 정교로의 강제 개종 등 사회 전반에 걸쳐 러시아화를 강요당했을 것이다. 그래서 열등한 동양인이라는 인종 차별과 함께 러시아화에 따른 엄청난 문화적 충격으로 민족 정체성에 혼란을 겪었을 것이다. 심지어는 소련 시절 고려인이 중앙아시아로 강제로 이주당했듯이 러시아의 식민지 전역으로 강제 이주를 당했을지도 모른다.
  앞의 공사 1장 12절에 나오는 서양은 당시 우리나라에 대한 지배 야욕을 드러내고 있었던 러시아를 가리키지만, 넓은 의미에서 서양 제국주의로도 이해할 수 있다.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에 시행했던 인종 차별과 서양 문화의 이식과 강요는 러시아의 지배를 당한 식민지에서도 같은 양상으로 추진되었다. 식민지에 대한 문명화라는 미명 아래에 원주민의 문화적 정체성을 부정하였던 이 정책들은 러시아가 한반도를 지배했다면 우리 민족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을 것이다.
  무역과 문화 그리고 전쟁 등 오랫동안 교류가 있었던 우리나라와 일본. 1910년 이후 우리 민족은 제국주의의 길을 걸었던 일본의 지배를 받으며 일본식 교육, 행정제도, 종교 개종과 유사한 신사 참배 등 서양 제국주의 식민지들과 비슷한 문제를 겪었다. 하지만 19세기 후반 대한제국의 지식인들은 러시아에 대해 두려움을 가졌다고 한다.07 이 점에서 ‘동서의 구별’이라는 상제님의 말씀은 문화 교류가 전혀 없었던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을 때 우리 민족 정체성의 문제는 물론 그 이상의 충격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조선을 서양으로 넘기면 인종의 차별로 학대가 심하여 살아날 수가 없고….”08라는 상제님의 말씀은 단순한 인종 차별에 의한 학대를 넘어서 민족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워지는 앞날을 염려하신 말씀으로 이해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01 중앙아시아는 유라시아 대륙의 중앙부에 있으며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 등의 나라들이 있는 지역이다. 스탄은 페르시아어로 ‘~의 땅’이라는 뜻이다.
02 양승조, 「제정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진출과 이슬람 정책의 변화」, 『아시아리뷰』 4권 (2014), p.207 참조.
03 프로이센 왕국은 호엔촐레른가(家)에서 지배했던 독일 북부 지역에 있는 왕국으로, 1701년 1월 18일부터 1918년 11월 9일까지 존재했다.
04 러시아 남부 흑해와 카스피해를 잇는 1천 2백㎞의 카프카스산맥은 예부터 동·서양의 경계로 일컬어져 왔었다. 종교적으로는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경계이기도 했다.
05 황성우, 「러시아의 폴란드 지배 정책: 성격과 함의(1795~1918)」, 『동유럽발칸연구』 제45권 2호 (2021), pp.197-201.
06 중국의 ‘의화단사건(1900년)’ 뒤에 러시아가 만주에 군대를 주둔시킨 일과 러시아가 한국의 용암포에 병참기지를 건설한 ‘용암포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을 발판으로 삼아 한반도와 만주로 진출하려는 일본이나, 러시아를 경계하는 영국과 미국 등의 열강도 촉각을 곤두세웠다. 만주와 한반도를 둘러싼 러·일의 대립은 동북아 국제 질서를 불안하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이 되었다, 최규진, 「러일전쟁 전후 한국인의 러시아 이미지 형성 경로와 러시아 인식」, 『마르크스주의 연구』 7권 3호(2010), p.217.
07 러일전쟁이 일어나기 전, 중국은 러시아가 세계에서 가장 포악한 침략국이라고 적었다. 이처럼 19세기 후반 대한제국 지식인들은 중국과 일본에서 간행한 ‘신서(新書)’나 잡지 또는 중국 지식인과 일본 지식인이 쓴 계몽 서적을 근거로 쓴 국내 신문과 책을 읽으며 러시아에 대해 포악한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최규진, 앞의 글, p.215-216.
08 공사 2장 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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