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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45년(2015)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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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각원 : 예(禮)는 공경심의 발로(發露)

예(禮)는 공경심의 발로(發露)
 
 

교무부

 
 
 
  나는 1980년대 후반인 대학 3학년 때 입도하였다. 그 시절에는 사회 전반적으로 선후배에 대한 위계가 상당히 엄격하고 경직된 시절이었다. 이러한 풍조는 흔히들 일본 제국주의 문화의 잔재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어찌 되었든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고 중·고등학교에서 두발 자율화와 이어서 교복 자율화가 시행되었다. 나 역시도 고등학교 때까지 교복을 입고 학교생활을 했다. 그렇지만 우리 2~3년 후배들은 교복을 입지 않고 고등학교에 다녔다. 이러한 영향 때문이라고 단정하긴 어렵지만 2~3년 후배들은 선후배에 대한 인식이 우리와는 사뭇 달랐다.
  일례로 대학 내에 고등학교 동문회가 있었는데, 신입생환영회나 엠티(M.T) 그리고 체육대회 등의 행사를 자주 치렀다. 그러면 선배들의 말은 그야말로 법과 같았다. 그래서 소위 줄빠따에 단체 기합 등 갖가지의 위압과 만행이 선후배 간의 위계질서를 잡는다는 명분 아래 자행되었다. 이러한 문화가 그때에는 당연시되었다. 하지만 자율화 세대인 후배들은 이런 분위기에 거부감을 보였고, 점점 동문회 행사에 참여하는 인원이 줄어들었다. 세상이 변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 했던가?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이렇게 위계가 엄격한 시대를 겪으며 자라난 세대였다. 그러다 보니 선배에 대한 깍듯한 대우가 몸에 배어 있었다.
  내가 선사였을 때의 일로 상제님의 진리에 대한 확신으로 한참 포덕사업에 열정을 쏟을 무렵이었다. 나를 도문(道門)으로 이끌어준 은혜에 대한 감사함으로 간혹 꾸지람을 들어 기분이 좋지 않아도 내색하지 않았으며, 인사도 깍듯이 하는 등 선각에 대한 예우를 분명하게 했다. 그런데 자율화 세대라고 할 수 있는 서너 살 터울 아래의 수반들은 내가 선각들에게 하는 그러한 예우를 나에게 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것이 내심 못마땅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참 위의 선각인 김선감에게 투정 섞인 어조로 하소연했다.
 
 
박선사: 선감요! 요즘 후각들은 도무지 예가 없습니다.
도인이 그렇게 예가 없어서 되겠습니까?
어떻게 가르쳐야 인사도 잘하고 말도 잘 듣고 그러겠습니까?
 

김선감: 수반들이 아직 도가 뭔지 잘 모르니 여러 모로 부족할 수밖에요 ….
우리 도의 진리를 잘 가르쳐서 믿도록 하면 예는 저절로 우러나올 겁니다.
예도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닐까요?
참다운 예가 무엇인지 잘 생각해 보세요
 
 
  이 일이 있고 벌써 20여 년이 흘렀다. 김선감은 지금까지도 수반들은 물론 후각 임원들에게도 그렇게 예를 가지고 뭐라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항시 상대를 위하는 마음으로 자상하게 챙겨주며 양위 상제님과 도전님의 뜻을 받드는 데 성경신을 다하라고 당부한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그 당시의 내 모습이 한없이 작게 느껴진다. 선각에 대한 나의 예(?)는 가식적인 것으로 어쩌면 후각들에게 그 대가를 받고자 한 마음에서 비롯된 점도 있었던 것 같다. 진실로 수반을 존중하고 또 선각을 존경하여 그 마음이 자연스럽게 표현되는 것이 예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던 것이다. 인간관계에서 예는 서로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어느 한 일방을 위해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 사이의 예는 결국 사람을 위한 것이었다. 도전님께서도 “예는 공경심으로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여 주는 인도(人道)를 갖추는 것을 이른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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