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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45년(2015)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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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수(宿) 신명 : 위(危) 별을 관장하는 견담(堅鐔) 신명

위(危) 별을 관장하는 견담(堅鐔) 신명
 
 
 
글 대순종교문화연구소
 
 
 
위수(危宿)
  위수(危宿)는 28수 가운데 열두 번째 별자리이다. 그리고 두우여허위실벽(斗牛女虛危室壁) 북방(北方) 현무(玄武) 칠수(七宿) 가운데서 다섯 번째 별자리다. 이 별자리의 주된 별[主星]은 3개로 동물은 제비이다. 위수의 속성(屬性)은 월(月)로 별자리의 이름[危]은 북방현무의 꼬리부분에 위치하고 있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전쟁 중 꼬리에 해당하면 항상 위험하므로 ‘위(危)’라 칭했다 한다. 위수를 의인화하여 북방위월연성군(北方危月燕星君)이라 하는데 검은색 옷에 장검을 지니고 있으며 입이 제비의 부리처럼 표현된다.01
 
 
후한의 창업공신 견담
  견담(堅鐔, ?-50)은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 BCE 2-CE 58)를 도와 후한(後漢)을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운 창업공신이다. 견담의 자(字)는 자급(子伋)으로 영천군(潁川郡) 양성현(襄城縣, 현재 河南省에 속함) 사람이다. 유수가 하북(河北)을 토벌할 때에 견담은 군현리(郡縣吏)였다. 유수는 견담을 만나보고 그의 관리로서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주부(主簿)02로 삼았다. 또한 유수는 견담을 편장군(偏將軍)에 임명하였는데 그는 유수와는 별도로 노노(盧奴)의 대창(大槍)을 격파하였다.
  하북을 평정하여 기반을 확립한 유수가 25년 호현(鄗縣, 하북성 栢鄕縣)에서 신하들의 추대로 제위에 올라 한의 부흥을 선언하니 그가 후한의 초대 황제인 광무제(光武帝)이다. 광무제가 즉위한 후 견담을 양화(揚化)장군에 임명하고 은강후(濦强侯)로 봉했다.
  유수가 즉위하여 한의 부흥을 선포했지만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했다. 특히 이제까지 아군이었던 경시제와의 대결은 불가피했다. 그 연장선에서 광무제의 첫 번째 전략적 목표는 경시제의 대사마 주유(朱鮪)03가 수비하던 낙양(洛陽)으로 그곳에는 약 30만의 대군이 포진되어 있었다.   
  이때 주유의 별장(別將)이 낙양의 동성(東城)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견담에게 투항하여 새벽에 상동문(上東門)을 열기로 약속했다. 상동문은 낙양성의 동쪽에 있는 가장 큰 문이었다. 견담은 건의(建義)대장군 주우(朱祐)와 함께 상동문에 침입하여 주유군과 크게 싸웠다. 새벽에 시작되어 아침에 끝난 이 전투에서 주유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전세가 크게 기울어진 주유는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견담은 내황(內黃)을 공격하여 평정하였다.
  26(建武 2)년 견담은 우장군(右將軍) 만수(萬脩)와 함께 남양(南陽)의 여러 현들을 순행하였다. 이때 도향(堵鄕) 사람 동흔(董訢)이 완성(宛城)에서 반란을 일으켜 남양(南陽)태수 유린(劉驎)을 감금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견담은 결사대를 조직하여 야음(夜陰)을 틈 타 성에 올라가 문지기를 참수하고 쳐들어가니 동흔은 성을 버리고 자신의 근거지인 도향으로 도망쳤다. 견담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남양의 정세는 악화되었다. 등봉(鄧奉)이 신야(新野)에서 반란을 일으켜 오한(吳漢)을 대파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견담과 함께 파견되었던 만수가 병이 들어 병영에서 사망했다. 이렇게 견담은 만수를 잃고 동흔과 등봉 사이에서 고립되었다. 남쪽에는 등봉, 북쪽에는 동흔이 견담군을 포위했다. 이들의 포위로 도로가 봉쇄되어 이후 일 년 동안 견담군에는 식량이 공급되지 못했다. 견담은 채소를 먹으면서 사졸들과 고통을 함께 하였다. 또한 적들이 공격해오면 선두에 서서 군대를 통솔했다. 적군의 돌과 화살이 견담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었지만 이를 피하지 않았고, 그 결과 세 군데나 큰 상처를 입으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총사령관의 분투는 장졸들을 자극하여 적의 공세를 막아낼 수 있었고 아울러 전군을 보전할 수 있었다.
  견담군에 대한 포위는 광무제가 남양 정벌에 나서면서 풀렸다. 광무제는 동흔, 등봉을 격파하고, 견담을 좌조(左曹)로 삼아 항상 정벌에 수행하게 했다. 30(건무 6)년 광무제는 견담을 합비후(合肥侯)로 봉했다. 50(건무 26)년 견담이 세상을 떠났다.(견담 끝)
 
 

01  萬民英(明) 原著, 『圖解 星學大成 第一部: 星曜神煞』, 北京; 華齡出版社, 2009, p.423.
02  문서·장부(帳簿)를 맡은 한대(漢代) 이후의 벼슬.
03  회양(淮陽, 현재 하남성 회양) 사람. 왕망의 신나라 말기에 왕광(王匡)과 더불어 녹림산(綠林山)에서 기병(起兵)하였다. 22년 군대를 나누어 남양을 공격하면서 신시병(新市兵)이라 칭했다. 경시제가 즉위하고 난 후 대사마에 임명되었다. 이질(李軼)과 함께 관동(關東)을 진압하고 낙양을 지키며, 당시 경시제와 다른 독자세력화의 길을 걷던 유수에 대항했다. 25년 유수에 항복하여 평적(平狄)장군에 임명되고 부구후(扶溝侯)에 봉해졌다. 후에 소부(少府, 궁중의 의복과 寶貨 · 음식을 관장)에 임명되었고, 그의 작위는 후대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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