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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기 : 호남성을 다녀와서

호남성을 다녀와서

 

아황과 여영의 한(恨)은 전설이 되어 소상강을 흐른다

 

 

글 교무부

 

 

 

동정호의 악양루와 군산도

 

  호남성(湖南省) 장사시(長沙市)에서 개최하였던 5개국이 참여한 양형농법(兩型農法)에 대한 국제학술대회가 드디어 끝났다. 논문 발표 시간 전까지의 긴장을 웃음으로 같이 하며 옆에 든든히 있어주신 동료 도인들의 인정을 잊을 수 없다. 더욱이 “성도(省都) 장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전경』 관련 유적지가 있으니 발표 마치고 얼른 답사를 가자”며 용기를 줄 땐 어린애 마음처럼 즐거웠다. 호남성 답사를 궂은 날씨에도 내내 즐거움과 감사한 마음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이 이런 동료들 덕분이었음을 지금 생각해 보니 알겠다. 호남성 답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호남성(湖南省)은 지명을 통해 짐작되듯이 동정호(洞庭湖) 남쪽에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넓이 21만 ㎢로 남·북한을 합한 22만 km²과 거의 같은 크기이다. 성도(省都)는 장사(長沙)로 상강(湘江)의 하류에 있다. 이 호남성 내의 농수(濃水), 상강(湘江), 원수(沅水), 자수(資水) 등 4대 하천이 흘러들었다가 양자강으로 흘러가는 곳에 동정호가 있다. 동정호는 중국에서 두 번째로 큰 호수인데 넓이가 3,900여 km²로 서울의 5배나 된다. 이 호수를 경계로 북쪽지방은 호북성, 남은 호남성이라 하게 되었다. 그러나 엄격히 말하면 동정호는 호수가 아니라 양자강(揚子江), 다른 말로 장강(長江)의 줄기다. 수시로 장강의 물이 들어오고 나가고 있으며 단지 그 형태가 호수처럼 보일 뿐이다. 이 때문에 강과 호수가 구분이 없는 이 지역을 강호(江湖)라 부르게 된다. 무협지에 등장하는 강호(江湖)라는 말이 여기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특히 동정호 안에 있는 군산(君山)은 강호의 중심으로 역사적 근거가 있는 말이다.

  우리는 동정호의 악양루(岳陽樓)와 군산도(君山島)를 먼저 답사하기로 했다. 악양루는 중국의 4대 누각(다경루, 황학루, 악양루, 등왕각) 중 하나일 뿐 아니라 『전경』에 등장하는 여동빈이 있었다는 곳이고, 군산도는 순(舜)임금의 부인이었던 아황과 여영 이비묘(二妃墓)가 있는 곳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동정호에 다다르니 먼저 괴수를 활로 잡고 있는 예(羿)의 거대한 석상이 나타난다. 천국(天國)에서 온갖 괴수들로부터 괴로워하는 요임금을 도우라고 보냈다는 동이(東夷)의 명궁 예. 우리에게 신화로만 들리던 이야기 속 인물 예를 동정호에서 보게 될 줄이야. 전설과 숱한 시인들의 시(詩) 속에 노래됐던 동정호임이 실감 난다. 그러나 격세지감이랄까? 오늘날 동정호는 모래를 실어 나르는 배들만 괴물처럼 오가고 있었다. 악양루는 그곳에서 과거에도 그랬듯이 또 그렇게 세상의 변화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악양루의 시작은 동오의 명장 노숙01으로부터이다. 군사적 목적으로 누각을 만든 것이다.

  당시 오나라는 촉나라의 유비와 형주를 두고 다투고 있었다. 215년 노숙은 동정호의 파구(巴丘)에 주둔하며 수군을 훈련시키고, 파구성을 세우면서 열군루(閱軍樓)라는 망루를 지어 수군이 훈련하는 모습을 참관하였다. 그러니 이곳은 적벽대전에서 조조에게 승리한 오(吳)의 명장 주유(周瑜)의 수군(水軍)을 길러내던 곳이다. 이것이 악양루의 시초이다. 이후 716년 당나라 때 악주의 태수 장열(張說)이 중수하면서 악양루라고 이름 지었다. 1044년 송나라 때 태수 등자경(藤子京)이 누각을 증수하고, 범중엄(范仲淹, 989~1052)02을 초대해 악양루기(岳陽樓記)를 짓게 했는데 명문장과 함께 악양루의 이름도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된다. 현재의 건물은 1880년 청나라 광서제 때 다시 중건한 것으로 누각의 높이는 20미터에 삼층 목조 건물로 되어 있다.

  1층 내부에는 범중엄의 악양루기가 있는데 마지막 부분에

“不以物喜 不以己悲 居廟堂之高 則憂其民 處江湖之遠 則憂其君 是進亦憂 退亦憂 然則何時而樂郁 其必曰 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 噫 微斯人 吾誰與歸”

  “외부의 사물을 보고 기뻐하지는 않으며, 자기의 일로 슬퍼하지 않는다. 조정의 높은 직위에 있을 땐 백성들을 걱정하고 물러나 멀리 강호에 거처하면 임금을 걱정하였다. 그러니 조정에 나아가서나 또 물러나서도 걱정뿐이었다. 어느 시절에 즐거워할 수 있었겠는가? 틀림없는 말은 ‘천하의 근심은 누구보다도 먼저 걱정하고, 천하의 즐거움은 모든 사람이 즐거워한 뒤에 즐긴다.’라는 말일 것이다. 아아! 그와 같은 어진 이들이 없었다면 나는 누구를 본받아 의지하며 살아 갈 것인가?” 하는 구절이 있다. 송대 최고 명재상의 정신이 동정호 악양루에 깃들어 있었다.

  그 옆에 삼취정이 있다. 등자경과 여동빈의 이야기가 전해오는 건물이다. 악양루 중수를 마치고 연회를 시작하려는데 ‘화주(華州)도사가 삼가 문후한다’라고 씌어진 명첩 하나가 등자경에게 전달된다. 기이하게 여긴 태수가 그 도사를 악양루 위로 초빙하여 얼굴을 보니 긴 수염이 가슴까지 드리웠고 등 뒤에는 장검을 메고 있는데 그 모습이 담담하고 단아하여 위엄을 느끼게 하였다. 등태수와 인사를 하고는 자리에 앉아 호쾌하게 술을 마시던 도사는

 

 

朝游東海暮蒼梧 아침에 동해에서 놀다 저물어 창오군으로 간다.

袖裏靑蛇膽氣粗 소매 속 푸른 뱀은 담력과 기력이 더욱 호쾌하다.

三醉岳陽人不識 악양루에서 세 번 취하나 사람들이 알지 못하니

郞吟飛過洞庭湖 낭랑히 시를 읊으면서 동정호를 날아서 지나가네.

 

 

  라는 시를 짓는다. 이상히 여긴 태수가 공손히 이름을 물었다.

  “도사의 성명을 알려주시면 기억하려 합니다.”

  여동빈은 웃으면서 대답하였다.

  “성은 여요 이름은 암이라고 하오.”

  이 말을 듣고 모든 사람이 놀라서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아니 이분이 신선 여동빈이란 말이요!”

  여동빈은 껄껄 웃으면서 사라졌다.

  그 후 사람들은 악양루 우측에 삼취정(三醉亭)을 세웠다. 700년대 말 당대(唐代)의 여동빈이 200년이 지난 송대(宋代)에 출현한 것을 기념하며…

  민중 속의 연(緣)을 찾아 장생술을 전하고 싶었던 여조(呂祖) 그래서 지금이라도 다시 술에 살짝 취해 슬그머니 일어서 나올 것 같은 삼취정의 여동빈, 그러나 오늘날 동정호는 삶에 힘겨워하는 모래배의 엔진 소음뿐. 인연을 찾는 그가 이제는 다른 곳에 갔을 것이란 생각을 해 보며 악양루를 나와 길을 재촉했다.

  안개 속으로, 아니 더 정확히는 호수 속으로 향했다. 예전엔 배로 드나들었으나 지금은 차로도 들어갈 수 있는 군산도에 가기 위해서이다. 날이 어둡기 전에 소상반죽(瀟湘斑竹)을 보려니 감상은 뒤로 미루고 사실만 눈으로 흡수하며 다니게 된다. 급할 때 소가 마구 먹는 격이다. 수천 년 중국 역사를 그렇게라도 섭렵해보겠다는 허기!

  서둘러 군산도(君山島)로 향했다. 악양성(岳陽城)과 15km 떨어져 있는 섬. 팔백리 동정호 물안개 속에 갈대와 수목이 울창한 이곳은 멀리서 보면 하나의 배처럼 보인다. 여름에 비가 많이 오면 이곳 군산도는 더욱 작아진단다. 나무에 걸려있는 풀들이 물에 찼던 흔적을 보여준다. 갈대가 참으로 크다. 강호무림의 무사들이 쪽배를 타고 지금이라도 나올 것 같다. 방목된 가축들이 보이고, 갈대는 질서 있게 베어져 있다. 요즘은 종이 원료로 쓰이고 있다 한다. 호수와 섬 물과 하늘, 대자연이 만들어 내는 풍광에 문인소객들의 기개는 절로 살아날 만도 하지만, 황제의 총애를 받다가 이 먼 곳으로 유배를 와 강가를 거닐던 이들의 울적한 심사는 어땠을까? 폄관문화03라는 하나의 문화 형태가 만들어질 만한 곳이다. 일어나는 상념을 접고 인류사 최초로 원(怨)의 뿌리가 세상에 박혔다는 아황(娥皇)과 여영(女英) 이비(二妃)의 흔적만을 쫓기로 했다. 현장에서 확인한 바 소상강이라. 『전경』에 나온 이름은 소수(瀟水)와 상강(湘江)을 합쳐 부르는 말이었다. 두 여인이 빠져 죽었다는 슬픈 전설이 있어서일까 섬으로 가는 길은 안개비가 그리도 내렸다.

  순임금 시절이면 최소 4,200여 년 전이다. “단주(丹朱)가 불초하다 하여 요가 순(舜)에게 두 딸을 주고 천하를 전하니 단주는 원을 품고 마침내 순을 창오(蒼梧)에서 붕(崩)케 하고 두 왕비를 소상강(瀟湘江)에 빠져 죽게 하였도다”(공사 3장 4절)고 하신 현장을 보게 된 것이다. 비가 올 시기가 아니라는데 웬 비가 그리도 오더니만 다행히 군산도에 오니 그쳤다. 다만 안개만은 더욱 짙어졌다. 관광지 경내 이동차를 탔는데 금방 상비사(湘妃祠)가 나온다. 우리는 이비묘(二妃墓)를 먼저 보기로 했다.

 

 

 

  안개 속에 그 유명한 대나무가 있었다. 수천 년 동정호에 내린 억수 같은 비로도 씻어 내지 못했다는 그 얼룩이 있는…! 공원 한 정자의 영련(楹聯)04에 “만고의 상비죽은 어찌 이렇게 무궁토록 슬퍼할까 해마다 봄이면 순이 자라는데 오직 눈물 자국만 많아지누나.(萬古湘妃竹, 無窮奈怨何. 年年長春, 只是淚痕多)”란 글이 보인다. 순임금의 순행을 따라 이곳까지 왔다가 창오에서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3일간 남쪽을 바라보며 통곡하다 소상강에 빠져 죽어 아황은 상군(湘君), 여영은 상부인(湘夫人)이라는 신(神)이 되었다고 한다.

  묘총은 역대로 내려오다가 1881년 청나라 광서제 때 중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기록이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원이 그리 큰 것일까? 선천의 원(怨) 중에 동반자를 잃어 쌓였던 비통이 어디 이들뿐이었을까? 아황과 여영 이비의 원이 무엇이었고 얼마나 컸으면 반죽만이 아니라 무덤 주위의 석수(石獸)들마저 저리도 슬퍼할까 싶다. 비통에 겨워 고개를 튼 석수 중 코끼리의 모습이 있다. 이는 순을 죽이고 두 형수를 차지하려 했던 순의 이복동생 상(象)이라 한다. 형의 죽음을 접하고 먼 길을 달려와 무덤 앞에서 슬피 울면서 참회를 했는데, 그 후 그는 큰 코끼리로 변했다 한다. 무덤 주위의 논밭을 갈다 죽었는데 후세 사람들은 순의 무덤 부근에 상을 위해 ‘비정(鼻亭)’을 짓고 이를 기념했다. 그리고 보니 아우의 이름이 코끼리 상(象)이다. 긴 코를 가졌던 코끼리를 위해 지었다는 비정이라니 말이 된다. 확인할 길 없는 전설이지만 가화(家和)와 치국을 이룩한 순(舜)의 면목을 느끼며 상비사로 발길을 돌렸다.

  상비사로 들어간다. 광서 9년(1883)에 이비의 넋을 달래기 위해 지은 이곳 정문에 “요순시대를 다시 여니 오늘로부터 상비로 하여금 원이 없게 하노라”는 글이 보인다. 이비(二妃)의 원. 단지 사랑의 연정이 아니라고 보여진다. 아버지 요임금의 뜻을 이어 받은 낭군, 천하의 못난 이복동생을 감복시켜 사람 만들고, 이웃이 모여들어 마을을 이루게 하고, 임금이 되어서는 백성의 평안을 위해 고운님들 남겨두고 남쪽을 살피다 창오(蒼梧)에서 먼저 가신 분. 이런 세상에 드믄 낭군을 보낸 두 왕비의 마음에 복받쳤을 설움을 짐작해 본다.

  상비사의 내부에는 요임금이 두 딸을 순에게 맡기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창오에서 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는 아황과 여영, 이비의 모습이 있다.

  인류의 기록에 시작이고 원의 역사의 첫 장인 요의 아들 단주. 그가 순을 창오에서 붕케 하고 두 왕비를 강물에 뛰어들게 한 이곳. 바람 부는 군산도 한 정자에 버드나무가지가 서러운 듯 여인의 머릿결처럼 날린다. 불초하여 인망을 못 얻었으면서도 천하를 다스리고 싶었던 한 인간의 넘쳐나는 의욕의 발로가 만든 원(怨)의 씨앗. 퍼지고 퍼져 인간세상이 파멸하게 된 원초의 사건을 깊이 생각해 본다. 군산도의 여정은 그래서 오랜 여음이 남는다.

 

 

장사시 악록서원(嶽麓書院)을 가다

 

  호남성 장사시 악록산 동쪽 기슭, 상강(湘江)과 인접하여 주변경관이 빼어난 곳에 호남대학이 있다. 이곳이 더욱 유명한 것은 이 학교의 기원으로 있는 악록서원 때문이다. 수양(陽)·석고(石鼓)·악록(嶽麓)·백록동(白鹿洞)서원 등 송대(宋代) 4대서원 중 하나인 이 서원은 976년경 송(宋)태조 9년에 세워졌다. 천 년이 족히 넘어 중국 및 세계에서도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가장 오래된 고등 교육기관이다. 남송시기에는 당시 학술계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호상학파(湖湘學派)’의 중심이었다.

  사회 정치 경제를 떠나 학문의 전당이란 생각만으로도 마음의 평안과 반가움이 솟는다. 영련의 글귀를 통해 천 년 중국 정신을 흡수할 요량으로 고개를 들어 첫 번째로 다가오는 글귀를 보았다.

  유초유재(惟楚有材) 어사위성(於斯爲盛)! 초나라에 인재가 있느니 이로써 번성하리라!

  교육은 나라의 인재를 키우는 최고의 목적을 갖고 있음을 단적으로 말하듯 참으로 선명했다. 이를 입증이나 하듯 나타나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간판! 교육이 현실을 떠난 사유의 유희가 아닌 사실에 토대를 두어 진리를 구하는 진정한 노력임을 서원은 명확히 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에 토대를 두고 있다 하여 요즘처럼 물질에 치우친 교육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학교의 규칙, 교훈 등은 모두 도덕 수양을 통한 문화적인 인격확립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이런 인재만이 나라를 번성시킬 수 있다는 것. 이런 취지에 따라 유교의 종장으로 등장하는 주희가 이곳에서 교육에 힘쓸 때는 1,000여 명에 달하는 제자들이 몰려왔다 한다. 그들이 타고 온 말이 연못의 물을 다 먹어 못이 말랐다 하니 상극선천의 역사에서 예가 드믄 아름다운 모습이었겠다. 그가 37세 때 세 살 아래의 철학자 장식(張, 1133~1180)05과 주장회강(朱張會講)을 벌였다는 곳에 의자가 둘 있었다. 대학자 주자를 기리기 위함이다.

  그러나 전란과 권모술수의 풍파속에 주희의 학문인생은 험난함의 연속이었다. ‘위학(僞學)’으로 몰리고, 주희의 학생들과 추종자들은 ‘역당(逆黨)의 무리’라는 비난과 모함을 받아 체포된다. 1197년 체포된 채원정도 그중 하나다. 주희는 그를 위해 100여 명의 학생들을 소집해 송별식을 연다. 참석한 학생들 모두 학문의 탄압과 스승에 대한 모함에 참담한 심정, 말을 아끼는 속에 가슴이 먹먹해와 속으로 운다. 송별식이 끝나고 주자는 채원정에게 자신과 마지막 밤을 지새우자 말한다. 그날 밤 스승과 제자는 다른 말을 전혀 하지 않은 채 날이 밝을 때까지 『참동계』의 교정 작업을 한다. 관아에 끌려가 장형을 받고 족쇄가 채워져 3,000리 밖으로 유배를 떠나며 노(老) 스승과 동료들의 마지막 송별식을 고마워한다. 채원정은 그해 죽음을 맞는다. 이후에도 조정의 위협은 계속되었으나 제자를 먼저 보낸 주희에게 연명의 미련은 없었다. 1199년 그도 눈을 감는다. 장례식에 참여하지 말라는 조정의 금지령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각지에 흩어졌던 수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조정의 금고(禁錮)가 엄하였으나 곡(哭)을 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악록서원 이곳은 800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체취가 느껴진다. 강당에 쓰인 주희의 글씨가 큰 소리가 되어 힘 있게 다가온다. 굴곡의 역사 속을 이렇게 가라 외치는 모습이다.

  제일 위에 있는 마지막 건물에 들어섰다. 만세사표(萬世師表)! 공자의 모습.

  그리고 기둥에 쓰여진 글귀 “氣脩四時與天地鬼神日月合其德”과 “敎乘萬世繼堯舜禹湯文武作之師.” 동양의 사상과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유학의 정수가 이것이다 싶다. 유학이 지닌 최고의 교육 목표가 사시와 천지신명 일월과 그 덕을 합하는 수양으로 성인(聖人)이 되게 하는데 있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하게 하였다. 이러한 내용에 대한 언급은 대순진리회 포정문에 나와 있는바,

 

 

  “…소위천지(所謂天地)와 합기덕(合其德)하며 일월(日月)과 합기명(合其明)하며 사시(四時)와 합기서(合其序)하며 귀신(鬼神)과 합기길흉(合其吉凶)하여 창생(蒼生)을 광제(廣濟)하시는 분이 수천백년(數千百年)만에 일차식내세(一次式來世)하시나니 예컨데 제왕(帝王)으로서 내세(來世)하신 분은 복희단군문왕(伏羲檀君文王)이시요, 사도(師道)로서 내세(來世)하신 분은 공자(孔子) 석가(釋迦) 노자(老子)이시며 근세(近世)의 우리 강증산성사(姜甑山聖師)이시다.”

 

 

  성인(聖人)이 오셨을 때만 지상에 펼쳐졌던 가르침이었음을 실감하게 한다. 포정문에서 볼 땐 그리 큰 감응이 없더니 이곳 주련(柱聯)을 보고나서 비로소 도(道)의 가르침이 실감나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사시 천지 일월 귀신과 합기덕하여 창생을 광제하는 상제님의 가르침, 신도(神道)의 위대함과 소중함이 이런 문화의 정수를 접하면서 조금씩 알게 되는 것 같다.

  천 년이 넘는 교육현장을 나와 이곳의 사서(司書) 출신이었던 모택동의 동상을 뒤로 하며 가의고거(賈誼故居)로 향했다.

 

 

가의고거(賈誼故居)

 

  상제님께서 김송환에게 외워 주신 시 가운데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少年才氣拔天摩 手把龍泉幾歲磨

石上梧桐知發響 音中律呂有餘和

口傳三代時書敎 文起春秋道德波

皮幣已成賢士價 賈生何事怨長沙 (행록 4장 5절)

 

 

  동정호나 상강(湘江)을 중심으로 폄관문화가 있었음을 앞에서 언급했는데, 그 대표적 인물이 가생이다. 가생(賈生, 기원전 200~168)은 별칭이고 본명은 의(誼)이다. 한(漢)나라 문제(文帝) 때의 인물로 한고조(漢高祖) 7년(기원전 200년)에 태어났다. 하남태수 오정위(吳廷尉)의 추천으로 스무 살에 박사가 되었다. 효문제의 총애를 받은 그는 파격적인 승진을 계속하여 일 년 만에 태중대부(太中大夫)에 올랐다. 그러나 참신한 의도를 갖고 제안한 그의 개혁정치가 기득권을 갖고 있던 신하들에게는 반가울리 없었다. 마침내 개국 공신이던 강후(絳侯) 주발(周勃)과 영음후(潁陰侯) 관영(灌) 등이 “나이가 어리고 학문이 미숙한 자가 권력을 독점하여 모든 일을 문란케 한다”며 그를 공격했다. 모함을 받은 그는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장사(長沙)로 내보내졌다. 이곳은 100여 년 전 천재적 식견을 갖고 있었으나 탁류의 정치 환경 속에서 뜻을 펴지 못하고 멱라강06에 돌덩이를 품고 몸을 던져 죽었던 굴원이 왔던 곳이다. 가생은 자신의 처지가 굴원과 같다 여기며, 독충과 습기만 많은 이곳에서 자신도 오래 살 수 없다고 생각한다. 상수를 건널 때 부(賦)를 지어 물 속에 던져 굴원을 조문하였다.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이것이 ‘賈生何事怨長沙’의 장면이 아니었을까? 그 후 그는 4년 뒤 다시 임금의 부름을 받았고 일 년 뒤 33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그의 치국(治國)과 위민(爲民)의 정치 철학은 후대에 가치를 인정받는다.  

 

 

 

  호남성의 옛 모습이 그리 낯설지가 않았다. 신화라고 생각되었던 아황, 여영의 흔적, 괴수를 처치하는 예의 동상, 주자와 왕양명이 강의하던 악록서원, 자신의 뜻을 몰라준다고 원망하며 소상강가를 헤매던 가생. 신기할 정도이다. 이렇게 넓은 중국의 역사가 손에 잡히듯 하는 것이…

  가방 한쪽에 놓여있는 『전경』을 펴 본다. 그곳의 단 몇 줄에 이 모든 내용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음이 보인다. 두루 다녀 볼수록 『전경』 속 이야기들이 사실로 와 닿는 걸 경험한다. 그리고 산재된 문제 속에서도 삶을 위해 애써 노력하는 오늘날 중국의 모습을 보니, 중국의 공사에만 치중한다는 종도들의 불평을 들으시면서도 상제님께서 이 나라의 해원공사를 위해 많은 시간을 쓰신 그 깊으심을… 상제님의 덕화를 느낄 수 있었다. 숙연해지는 심정이 답사의 후반부를 덮칠 줄은 예상 못했던 일이다. 일정은 그렇게 마무리되어 갔다. 이들이 상제님의 덕화를 모르듯 나 자신이 아는 것이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과 함께…

  조그마한 몸매에 군복을 입고 “안녕히 가세요”라고 한국말로 인사하는 중국 공항직원의 미소를 뒤로 하며 비행기에 올랐다.

 

 

 

 


01 노숙(魯肅, 172 ~ 217)은 중국 후한 말기의 세력가인 손권의 참모이다. 자는 자경(子敬)이다. 임회(臨淮) 동성(東城) 출신.

02 중국 북송 때의 정치가·학자.

03 유배나 강등을 당한 관리들에 의해 만들어진 문화.

04 기둥이나 벽에 세로로 써 붙이는 글씨.

05 중국 송나라 때의 철학자. 호오봉(胡五峯)의 학문을 이어받아 성리학에 관한 지식이 깊었다. 경(敬) 문제에 관해서는 주자와 자주 논쟁을 벌여 그 학문에 영향을 많이 주었다. 주(州)의 지사(知事)를 역임하고 이부랑(吏部郞)을 지냈다.

06 湘水의 지류로 동정호로 흘러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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