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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38년(2008)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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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문 : 일본 기행문 쾌적한 환경을 가꾸는 지혜

일본 기행문
쾌적한 환경을 가꾸는 지혜

 

 

鄭大珍 (대순진리회 중앙종의회 의장)

 

 

 

  일본 여행을 하면서 그들이 우리와 사뭇 다른 점이 두 가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먼저 우리는 6.25전쟁과 같은 비운의 내전을 겪으면서 전국이 초토화되는 바람에 울창한 숲을 보기 어렵지만 일본에는 곳곳에 수백 년 된 숲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한반도가 겪은 것과 같은 큰 전란이 일본 본토에서는 없었기 때문이다.

  2008년 5월 14일 오사카 간사이국제공항에 도착한 뒤 오사카성을 보기 위해 차를 타고 달리기 시작했는데, 도심을 채 벗어나지 않은 곳에 갑자기 울울창창한 숲이 우거져 있는 공원이 시야에 들어와 깜짝 놀랐다. 도심 한가운데 이런 숲이 있다는 게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불과 50여 년 전에 우리는 서울 전체가 포격으로 무너지는 현실을 목도하며 피눈물을 삼켜야 했다. 그러나 지난 2차 대전에서 일본은 수많은 나라를 침략하고 전쟁에 패했음에도 본토의 대부분은 전쟁의 참화를 면했다.

  또한 일본 전역의 가정집에는 나무 한두 그루라도 심는 조경 문화가 성숙되어 있었다. 성과 사찰, 관공서, 도로변 등의 조경이 잘 되어 있는 것은 쉽게 이해가 됐지만 개인의 집까지 좁은 공간을 활용하여 나무를 가꾸는 모습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과제라고 생각됐다.

  두 번째 차이점은 상점이나 거리가 깨끗하고 심지어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않는 뒷골목까지도 깨끗하다는 점이다. 우리는 88올림픽을 전후하여 대대적인 청결운동을 전개한 결과 도심 곳곳이 깨끗하게 정비된 적이 있었다. 시민들은 솔선수범하여 휴지나 담배꽁초를 버리지 않았고, 곳곳에 놓인 쓰레기통이 거리 환경 미화에 한몫을 단단히 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선진국다운 시민의식을 갖췄다고 스스로 기꺼워하기도 했다. 그러나 요즘은 도로 곳곳에 담배꽁초와 휴지, 침 등이 널려 있다. 88올림픽을 치르며 선진국 못지않은 시민의식을 갖췄던 시민들은 언제부터인가 예사로 담배꽁초를 길거리에 버린다. 타고 가는 차에서도 담배꽁초를 버리는 게 다반사이다.

  물론 일본 사람들도 어두운 밤이 되면 거리에 예사로 휴지를 버린다고 한다. 그 대신 밤 사이에 미화원들이 깨끗이 청소하여 아침 출근길에는 상쾌한 거리 모습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낮 동안은 거리 어느 곳을 둘러봐도 버려진 휴지나 오물이 없었다. 거리에 침을 뱉거나 담배꽁초를 버리는 사람도 없다. 아침에 나가보면 얼마나 깨끗이 청소를 하였는지 반짝반짝하였고 화장실 물도 1급수로 사람이 안심하고 마셔도 된다고 하였다.

 

 

 

  오사카성은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깨끗한 거리를 달린 뒤 도심의 숲속을 얼마 동안 걸어가야 만날 수 있다. 먼저 성을 에워싸고 있는 수로가 나왔다. 폭이 100미터도 넘을 듯한 이 수로는 3중으로 오사카성의 전체 둘레를 도는 형태로 되어 있다. 약 1시간 만에 시내의 강을 순회할 수 있는 수상 버스도 운행되고 있다고 한다.

  성 안에 들어서니 승강기를 타고 5층까지 갈 수 있게 되어 있었다. 5층에서 내린 우리는 걸어서 8층까지 갔다. 8층 전망대에서 사방을 거닐면서 둘러보니 한 나라의 무사의 성으로서는 그 규모가 무척 크다는 것을 느꼈다.

  오사카성은 천하를 통일한 16세기 후반의 무장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와 관련된 성이다. 도요토미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략한 전범이었다. 4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반갑지도 않은 인물의 소유물을 구경한다고 하니 만감이 교차했다. 필자의 10대조이신 농포(農圃) 할아버지께서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농포 할아버지께서는 3천여 명의 의용군을 거느리고 함경도에 침입한 왜군 3만여 명을 섬멸시키셨다고 하였다. 그때 이순신 장군은 나라에서 임명한 장수라 남쪽 해안선을 방어하면서 그나마 조정에서 내려준 무기와 병사들의 식사를 제공받았지만 의병은 일체의 무기와 식량을 스스로 확보해야 했다. 김해의 이필재 선생이 한 말에 의하면 이순신의 전공은 31번의 대첩인데 농포 할아버지께서는 4번의 큰 전투를 벌인 것은 물론 선조대왕의 아들인 2명의 왕자가 왜병에게 체포, 감금된 것을 구출하였다고 한다. 전설적인 선조의 이야기를 되새기면서 왜장의 성에서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오사카성은 16세기 말에 세워져 17세기의 전란으로 소실됐다가, 그 후 재건되었으나 천수각(덴슈카쿠)만이 다시 소실되어 20세기 전반이 되어서야 천수각이 재건되었다. 천수각의 내부는 1층에서 7층까지가 당시의 무기와 갑옷, 민속자료를 전시한 역사자료관이며, 8층은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8층 전망대에서 일부 볼 수 있는 대지와 정원은 도합 119만 제곱미터라고 했다. 구내에는 약 6만 제곱미터의 잔디공원이 있으며, 특히 봄에 벚꽃이 피는 시기에는 꽃구경하는 사람들로 붐빈다. 주변에는 오사카의 문화와 역사를 소개하는 오사카시립박물관과 도요쿠니신사, 최대 1만 6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의 오사카성 홀 등이 있다.

  오사카성을 본 뒤 일본 최고(最古)의 사찰인 오사카의 사천왕사(四天王寺)를 보러 갔다. 입구에 들어서니 좌측에 북종당(北鍾堂)이 있었고, 돌로 된 다리를 건너면 예찬당(禮讚堂)이 나온다. 다리 아래 연못에는 자라들이 있어 눈길을 끌었다. 극락정토(極樂淨土)의 정원이 있고 중앙에 목조 5층탑이 세워져 있는데 동서남북에 목조 3칸의 문이 있다. 북문에 수호신왕(守護神王) 두 분과 남문에 이천왕(二天王) 두 분이 있었다. 이 절은 서기 593년에 쇼토쿠 태자에 의하여 지어졌고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절이다.

  오사카에서 먹자거리로 유명한 도톤보리[道頓堀]와 신사이바시를 둘러보면서 비로소 일본 사람들의 생활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신사이바시백화점과 명품 패션 매장들이 들어선 화려한 거리인데 젊은이들이 많았고, 밤 늦은 시간까지 가게를 열고 장사를 한다는 거리였다. 거리의 도로폭은 10미터 가량인데 차가 드문 대신 중앙에 자전거가 즐비하게 세워져 있다. 건물은 아름답고 거리는 깨끗한데다 벤치도 놓여 있고 공기도 맑아 도심 한복판에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정말 맑고 깨끗한 환경이었다.

  15일 아침 9시경에 나라현 나라시내에 있는 동대사(東大寺)란 곳에 갔다. 동대사는 목조 건축물로 주위는 수목으로 울창하게 단장이 되어 있다. 첫머리에 있는 대화엄사는 사천왕문(四天王門)이었다. 서쪽에 신장(神將)이 좌우로 배치되었고 내부에는 동물형상의 석조물이 있었다. 경내로 들어서니 곧게 뻗은 나무들이 정성스럽게 가꾸어져 있었다. 작은 계곡과 함께 건너편 원시림 우거진 울창한 숲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건물들은 대부분 부속 사찰이라고 한다.

 

▲ 동대사(東大寺)

 

 

  절 안으로 들어서려면 사방을 둘러싼 긴 회랑을 돌아 들어가야 한다. 중앙에 있는 대불전(大佛殿)은 2층으로 되어 있지만 건물 구조는 4층으로 조성되어 있었다. 대불전 바로 앞에 팔각청동등(八角靑銅燈)이 있어 안내자에게 문의하니 한국에서 온 백제시대의 장인이 조성한 청동등이라고 했다. 대불전 내부에 모신 분은 비로자나불이다. 높이 14미터에 이르는 이 불상은 귀의 길이만 2미터이고 코의 내경은 성인이 드나들 정도로 큰 구멍을 이루었다. 손바닥 위에 성인 17명이 올라설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불상이었다.

  교토[京都]시에 위치한 청수사(淸水寺)는 교토를 대표하는 곳이라고 할 만큼 유명하다. 청수사 광장에 하차하여 폭이 6미터쯤 되는 좁은 도로를 약 2킬로미터 걸어 경사진 산으로 향했다. 청수사 인왕문(仁王門)을 지나 경내로 들어서니 목조로 구성된 3층탑이 우뚝 서 있었다. 그 옆에 경당(經堂)이 있는데 중간쯤부터 아래쪽이 철제로 봉쇄되어 있었다. 내부에 중요 문화재가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그 위에 전촌당(田村堂)이 있다.

  본당에 들어서니 앞무대가 절벽에 걸쳐져 있고, 100개가 넘는 기둥이 이 무대를 떠받치고 있다. 청수사 본당이 대웅전과 같은 곳이다. 내부에는 11면 천수관음(千手觀音)을 목전불(木殿佛)로 모시고 있다. 인연을 맺어주는 관음보살 앞에서 사진을 찍고 금각사(金閣寺)로 이동하였다.

 

▲ 금각사(金閣寺)

 

 

  3면이 가파른 산지(山地)에 참나무과에 속하는 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 조화를 이룬 숲속을 걸어 사찰 안에 다다르니 넓은 연못이 나왔다. 금각사는 연못 위에 있는 3층 누각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3층 건물 중 2층과 3층은 완전히 금으로 장식돼 있어 화려하고 찬란한 모습이었다. 금각사는 1397년 산장이었던 곳을 절로 만들었는데 다실(茶室)인 석가정(夕佳亭)이 유명하다. 무사인 장군이나 귀족만이 녹차를 마시러 올 수 있고 평민은 오지 못하는 곳이라는 이곳은 일명 다도방(茶道房)이라고도 한다. 금각사는 1950년에 방화로 소실되어 1955년에 재건하였다. 세월이 흘러도 황금빛이 바래지 않고 누각이 빛나는 것은 매년 교토 시민의 세금으로 금박을 덧칠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1994년에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이어서 정토진종의 본원지라는 동본원사(東本願寺)를 찾아갔다. 정문에 진종본묘(眞宗本廟) 문을 거쳐 들어서니 어영당(御影堂)은 수리중이어서 아미타당(阿彌陀堂)으로 향했다. 본조불인 아미타여래를 봉안하고 있는 아미타당은 정면 52미터, 측면 47미터, 높이 29미터에 약 10만 8천 장의 기와를 썼고, 다다미가 401장, 당내의 기둥만 66개에 이르는 웅장한 사찰이었다. 특이한 것은 여자 신도들의 머리카락으로 짰다는 새끼줄로 두께 30센티 길이 약 69미터 중량 약 375킬로그램에 이르는데, 이 절의 기둥을 세울 때 잡아당기는 밧줄이었다고 한다.

  어영당(御影堂)은 목조 기념물로는 일본 최대라고 하는데 정면 76미터, 측면 58미터, 높이 38미터에 이르고, 기와가 약 17만 5천 장 쓰였다고 하며 다다미만 927장, 당내의 기둥은 90개에 달한다고 한다. 한국과 중국, 일본 등을 둘러보았지만 그중 가장 큰 사찰이라 할 수 있다.

  16일에는 아침식사를 마치고 후지산(富士山)에 올랐다. 후지산 발치에서 완만하게 경사진 도로를 따라 오르니 2천미터 지점에 원시림의 고사목(枯死木)들이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막상 2천500미터 지점에 도착하니 상점들이 즐비했다. 차로 네 시간을 달려 도착한 그곳의 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 일행들과 함께

 

 

  식사를 마치고 오와쿠다니(大涌谷) 계곡으로 향했다. 3천 년 전 산 내부에 갇혀 있던 수증기가 폭발하면서 만들어낸 화구의 일부인 이 계곡의 흐르는 물은 우유빛을 띠고 있었다. 돌로 된 계단을 디디며 가파른 산길을 힘겹게 올라가니 지하 10여 곳에서 100도 이상의 온천수가 솟구쳐 올라오고 있었다.

  오와쿠다니에서 15분 거리의 산 중턱에는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대호수인 아시호수가 있다. 호수의 둘레가 100킬로미터라 하고 수심은 최고 50미터라고 한다. 사방은 완전히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화산폭발로 생긴 거대한 칼데라 호수인 아시호수는 화산 대폭발 당시에 마그마가 일시에 분출하면서 산꼭대기와 산등성이가 함몰된 거대한 분지가 형성되었고, 그 함몰된 곳에 물이 가득 차면서 형성되었다.

  17일에는 도쿄의 명치신궁(明治神宮)을 둘러보았다. 도로의 양쪽이 숲을 이루고 있었고, 입구인 신궁 문은 하늘 천 자형을 이루고 있었다. 천 년 전에 다듬어진 나무의 둘레는 두 발 규모쯤 되었는데 나무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으니 향냄새가 났다. 신궁은 천왕이나 천왕의 선조로 여겨지는 신이 있는 곳을 뜻한다. 명치신궁은 1920년에 건립된 신사(神社)로서 ‘메이지 천왕’의 혼을 모셨다고 한다.

  신궁 앞에 큰 나무가 두 그루 있고, 왼새끼를 꼬아서 두 나무를 뭉쳐놓았는데, 부부화목(夫婦和睦)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모든 분들과 화평하게 잘 지내는 나무라고 쓰여 있었다. 명치신궁에는 일본 국민들이 각자 한 그루씩 가지고 와서 식수한 나무들이 많이 있었는데, 모두 365종으로 16만 그루가 자라고 있다고 한다 .

  도쿄 시내 전역을 둘러보는 길에 도쿄도청 45층 전망대에 올라 사방의 전망을 두루 보게 되었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니 도쿄의 규모가 얼마나 넓은지 실감할 수 있었다. 도쿄의 인구가 1천 500만 명이고, 외곽 인구까지 합하면 3천만 명이나 된다고 하였는데 시야가 모자라 시내의 끝을 볼 수가 없었다. 이어 도쿄 시내에 있는 천초사(淺草寺)에 들렀다. 본전(本殿)을 보니 일본의 무사를 모신 듯한 신위(神位)가 있었으며 옆의 건물로 가보니 관세음보살과 그 외의 보살을 모시고 있었다. 밖으로 나와 5층탑을 보았지만 너무나도 사람이 많아 그야말로 인산인해의 파도를 헤치는 듯하며 밖으로 나왔다.

  18일에는 공항으로 가는 차를 타고 가다가 공항 근처의 나리타(成田) 신승사(新勝寺)에 들렀다. 정문으로 갔지만 참배하는 사람이 하도 많아 횡행문(橫行門)으로 본전에 들어가 보았다. 부동명왕진궁(不動明王眞宮)이라고 기록된 현판만 있고 부동명왕은 모셔져 있는 곳은 없어 다시 위로 위로 오르니 개산당(開山堂)이 있고, 광명당(光明堂)이 있고 그 위로 더 오르니 목조인지 철제인지 알 수 없으나 부동명왕이 모셔져 있었다. 주위는 1천 년이 지나는 동안 인공(人工)으로 정성을 다하여 가꾼 수목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었다.

  이번 여행을 돌아보니 후지산 2천 500미터 지점에 도착하여 사진을 찍을 때 뼛속까지 스며들던 냉기가 특히 기억에 남았다. 한편 일본 전역이 숲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가정집에도 나무 몇 그루는 심는 문화가 성숙되어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5일 동안 도로변에 주차되어 있는 차량의 모습을 보지 못했을 정도로 깨끗한 환경을 가꾸기 위해 노력하는 일본인들의 시민의식을 본받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2008.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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