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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40년(2010)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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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숨겨진 이야기(결의편) : 금강석 같은 충의(忠義)의 얼, 적을 감동시키다

금강석 같은 충의(忠義)의 얼, 적을 감동시키다

 

글 교무부

 

 

 

  역사의 어둠이 깊을수록 그 길을 비추는 별빛은 더 깊고 밝은 법이다. 올해로 국권 피탈 100주년을 맞은 이 때, 그 빛에 대한 새삼스런 그리움은 잊혀가는 우리 마음의 충의(忠義)에 대한 진한 향수가 아닐까 한다. 그 그리움 한가운데 안중근 의사가 의연히 빛나고 있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만주 하얼빈 역에서 그는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해 그의 비서관, 하얼빈 일본 총영사 그리고 남만주철도 이사 다나카 세이지로를 저격하고 “꼬레아 우라(대한제국 만세)!”를 외치며 체포되었다. 그런데 이들 중 안중근 의사에 의해 다리에 총상을 입은 다나카 세이지로는 훗날, 생전에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인물이 누구냐는 물음에 조금도 주저함 없이 “안중근”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일본의 영웅으로 추앙받던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고 자신까지 총상을 입힌 적을 세상에서 가장 존경한다고 말한 그의 말은 언뜻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당시 다나카 세이지로는 총에 맞으면서 안중근 의사의 눈빛을 보았는데, 그 눈빛에 서린 강한 의기에 정신이 빼앗겨 다리에 총을 맞았다는 사실조차 잊을 정도였다고 한다. “나는 당시 사건현장에서 10여 분간 안중근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가 총을 쏘고 의연히 서 있는 모습을 보는 순간 마치 신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도 음산한 신이 아니라 광명처럼 빛나는 밝은 신이었다. 그는 참으로 태연하고 늠름했다. 그같이 훌륭한 인물을 일찍이 본 적이 없다.” 다나카 세이지로의 말이다.

  다나카 세이지로만이 아니라 안중근 의사가 여순감옥에 수감되어 사형될 때까지 5개월여를 지켜보았던 간수 치바 토시치의 이야기 또한 진한 감동을 전한다. 처음에 그는 증오로 가득 차 안중근 의사를 볼 때마다 욕하고 괴롭히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안중근은 그에게 차분한 어조로 “개인과 민족과 세계는 그 자체로 귀하고 한 울타리가 되어야 하오. 하지만 당신의 영웅은 이 울타리를 파괴하고 해체한 사람이오. 나는 세계평화를 위해 전범을 제거한 것 뿐이외다.”라고 말했다. 순결하고 곧은 의지를 담은 이 짧은 말이 치바 토시치를 감동케 했고 그 후로 치바 토시치는 그에게 ‘의사’라는 존칭을 썼으며 진심과 의리를 사이에 둔 국적을 넘은 우정을 나누게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이토 히로부미 저격의 배경에 대한 정당한 논리와 안중근 의사의 흔들림 없는 인품과 생사를 초월한 의연(毅然)한 충의의 정신은 그로 하여금 훗날 안중근 의사의 영전을 모시고 명복을 빌게 만들었다. 그리고 아내에게는 자신이 죽은 후에 안중근 의사의 글씨를 소중히 간직하고 자신과 안중근 의사의 위패를 함께 모셔 조석으로 공양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치바 토시치의 아내 기츠요는 1965년 74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남편의 유언을 그대로 이행했고, 1979년에는 그들의 유족들이 안중근 의사 탄신 100주년에 그동안 가보로 간직해온 안중근 의사의 글씨를 안중근 의사 숭모회에 전달했다.

  그날 전해진 안중근 의사의 글씨에는 그에 얽힌 깊은 사연이 있다. 1910년 3월 25일 저녁 치바 토시치는 안중근 의사에게 “내일 오전 사형이 집행될 듯하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그 말에도 안중근 의사는 흔들림 없는 초연한 자세로 단지 옥중에서 집필하고 있던 『동양평화론』의 탈고를 마무리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할 뿐이었다. 다음날 새벽의 여순감옥에는 쓸쓸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안중근 의사는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어머니가 보내준 순백의 명주 한복을 입고 기도를 올렸다. 그 한복에는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한국인 전체의 공분(公憤)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 된다. 그러니 딴 맘 먹지 말고 그대로 죽어라.”는 어머니의 굳은 신념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사형 집행 시간이 다 되어 안중근 의사는 옥중문을 나서다가 간수 치바 토시치에게 “전에 내게 부탁한 글씨를 지금 씁시다.”라고 말했다. 치바 토시치는 안중근 의사의 죽음을 앞둔 그 순간 슬픔과 감격의 심정으로 비단과 필묵을 준비했다.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 : 나라 위해 몸 바침은 군인의 본분)’이라는 글과 그 마무리로 왼손 약지가 절단된 손바닥으로 수장까지 찍었다. 그 글씨는 지금의 누가 보더라도 바로 앞에 죽음을 맞은 사람의 글씨로 보기 힘들 만큼 흔들림 없는 힘찬 필체였다.

  그 후 세월이 지나 일본의 대림사(大林寺 : 다이린지)라는 절에는 안중근 의사와 치바의 우정을 기리는 현창비(顯彰碑)가 1981년 3월 26일 건립되었고 사찰 본당에는 안중근 의사와 치바 토시치의 영정, 안의사의 친필 사본이 걸려 있다. 또한 남달리 안중근 의사를 존경하는 다이헤이요산업의 야기 마사즈미 회장의 할아버지도 치바 토시치와 함께 여순 감옥의 간수로 있었다고 한다. 야기 마사즈미 회장은 안중근 의사가 조부에게 써 준 ‘언충신행독경만방가행(言忠信行篤敬蠻邦可行)’01이라는 친필을 한국에 기증했다. 그리고 현재, 해마다 일본에는 안중근 의사를 기념하는 축제와 그의 업적을 연구하는 정치인 연구모임이 있다고 한다. 더욱이 1985년 정식 설립된 안중근연구회는 ‘안중근 무죄론’,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 ‘안중근과 동양평화론’ 등의 주제를 갖고 매년 정기적으로 토론회 등을 통해 안중근 의사의 업적을 되새기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가운데 하나가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 아닐까? 또한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이 있다면 그것은 적을 감동시켜 그 마음을 얻는 것이리라. 하지만 안중근 의사는 적으로부터 진심을 얻었다. 그리고 그렇게 나눈 정은 퇴색하지 않고 시대를 이어 오고 있다. 그것은 마치 금강석의 아름다움과 같다. 시대와 인종, 이념의 거친 경계를 허물어 하나 되는 마음을 얻어낸 힘 그것을 안중근 의사가 보여준 것이다.

  그 힘은 거대한 본능으로서의 목숨에 대한 집착을 넘어서는 데서 비롯되었다. 안중근 의사는 그렇게 문자로만 볼 수 있었던 정신적 신념의 아름다움을 적들에게 발화(發火)시켜 보인 것이다. 또한 나라에 대한 사랑과 의로움에 불타오른 그는 그 과정에서 진정 인간이 하나로 소통할 수 있는 언어를 보여주었다. 말의 충실함과 믿음, 행실의 돈독함과 공경스러움, 그것을 생사를 초월한 의연함으로 실천했기에 적들마저 감동했고, 나아가 그 힘이 인류의 상생을 위한 근원적인 힘이 될 수도 있음을 조용히 시사했으리라.

 

 

 


01 말에 충실함과 믿음이 있고, 행실이 돈독하고 공경스럽다면 야만의 나라에서도 이를 따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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