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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40년(2010)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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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의 발자취를 찾아서(48) : 신명의 박대가 심한 서교의 앞날

신명의 박대가 심한 서교(西敎)의 앞날

 

 

글 대순종교문화연구소

 

  1906[丙午]년 6월 상제님께서는 김광찬(金光贊)을 데리시고 김성화(金性化, 1858∼1931)가 살고 있는 임피(臨陂) 군둔리(軍屯里)01에서 며칠 동안 머무셨다.

  그때 김성화의 이웃 청년이 병에 걸려 다 죽게 되어 상제님께 치료해 주실 것을 애원해왔다. 그 청년의 병이 죽을병임을 아신 상제님께서는 그의 병을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승(老僧)에게 옮긴다 하시며, 그 청년으로 하여금 함열(咸悅) 숭림사(崇林寺)02에 있는 노승에게 ‘조문(弔問)’을 다녀오도록 시키셨다. 이에 따라 청년은 아픈 몸을 이끌고 20리 가까이를 겨우 걸어 노승을 만나보고 돌아오니, 어느 새 병증은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신기하게 여긴 그 청년이 다음 날 숭림사의 노승을 다시 찾아가 보았더니 그 노승은 죽어 있었다. 청년은 상제님의 말씀에 위력을 느끼고 두려워하였다.

 

 

 

 

  가을 무렵 상제님께서는 함열 회선동(會仙洞)에 사는 김보경(金甫京, 1860~1934)의 집에 계셨다. 상제님께서는 김보경에게 큰 북을 대들보에 달아매도록 시키시고, ‘병자(丙子) 정축(丁丑)’을 밤이 새도록 외우고 북을 치시며 “이 소리가 서양에까지 울리리라.”고 말씀하셨다.

  10월 어느 날, 상제님께서는 친히 예수교당에 가셔서 거기서 행하는 모든 의식과 교리를 직접 다 살펴보시고 “족히 취할 것이 없다.”고 하셨다. 상제님께서는 혼란에 빠진 우주를 바로 잡기 위하여 천지공사를 행하실 때, “옛적에는 판이 좁고 일이 간단하므로 한 가지만 써도 능히 광란을 바로 잡을 수 있었으되, 오늘날은 동서가 교류하여 판이 넓어지고 일이 복잡하여져서 모든 법을 합하여 쓰지 않고는 혼란을 능히 바로 잡지 못하리라.” 하시어 선·불·유의 법술을 모두 합하여 쓰신다고 밝히셨지만, 유독 예수교는 취할 만한 게 없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또 상제님께서는 “서교는 신명의 박대가 심하니 감히 성공하지 못하리라.”고 하시어 서교가 현재의 상태로서는 좋은 앞날을 기약할 수 없음도 알려주셨다.

  그럼에도 상제님께서는 서교가 서양 문명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는 점을 들어, 서교가 나름대로 후천에서 한 역할을 담당하도록 만드셨다. 이 사실은 상제님께서 “선도(仙道)와 불도(佛道)와 유도(儒道)와 서도(西道)는 세계 각 족속의 문화의 바탕이 되었나니 이제 최수운(崔水雲)을 선도(仙道)의 종장(宗長)으로, 진묵 을 불교(佛敎)의 종장(宗長)으로, 주회암(朱晦庵)을 유교(儒敎)의 종장(宗長)으로, 이마두(利瑪竇)를 서도(西道)의 종장(宗長)으로 각각 세우노라.”고 하신 데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마두(마테오 리치, 1552∼1610)는 31세에 가톨릭의 해외 포교를 위해 중국에 온 뒤, 30년 가까운 세월동안 중국에 머물면서 중국과 서양의 상호 이해를 위해 노력한 선구자였다. 그는 불교와 유교까지 포용하면서 평생 가톨릭의 선교를 위해 불철주야 애썼지만, 자명종·대서양금(大西洋琴) 등의 서양 문물과 『기하학 원본』 같은 학술서적 그리고 세계지도만 전해주었을 뿐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동양에 지상의 천국을 세우려다 유교의 폐습에 막혀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이마두는 천상과 지하의 경계를 개방하여 제 지역 안에만 머물고 있던 신명들을 서로 왕래케 하였다. 또한 동양의 문명신을 거느리고 서양에 건너가 문운(文運)을 열었으니, 이로부터 서양의 문명은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문명은 물질에 치우쳤고, 교만하여진 인간은 자연을 정복하려는 등 온갖 죄악을 저지르게 되었다. 이마두로 인해 펼쳐진 지상의 문명은 많은 폐해를 불러일으켰지만, 적어도 그가 가진 본래의 뜻은 인간을 이롭게 하려는 데 있었다. 상제님께서는 그런 이마두를 서도의 종장으로 삼으셨으니, 이로부터 이마두는 서교의 대표가 되어 상제님의 역사(役事)에 참여하게 되었다.

 

 

 


01 예전에 군대가 주둔했었다고 해서 군둔리(軍屯里)라고 부른다.(『한국지명총람 전북편 하』, 한글학회, 2003, 22쪽)

02 숭림사는 신라 경덕왕 때 진표율사가 창건했다는 설과 고려 충목왕 때 창건했다는 설이 있는데 확실하지 않다. 숭림사(崇林寺)는 선종(禪宗) 사찰이며, 그 이름은 달마대사가 중국 숭산 소림사에서 9년 만에 득도하였고 이로써 소림사가 최초의 선종 사찰이 되었기 때문에 숭산의 ‘숭(崇)’과 소림사의 ‘림(林)’ 글자를 딴 데서 연유한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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