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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39년(2009)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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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소개 : 입하(立夏) 절후를 관장하는 단지현(段志玄)

입하(立夏) 절후를 관장하는 단지현(段志玄)

 

 

글 교무부

 

 

 

당 창업에 큰 공을 세운 단지현

 

  단지현(段志玄, ?~642)은 제주(齊州) 임치(臨淄)01사람이다. 단지현의 아버지 단언사(段偃師)는 수(隋)나라 말엽에 태원(太原)의 사법서좌(司法書佐)를 지냈다.

  이때 태원 유수는 당나라를 세운 고조(高祖) 이연(李淵)이었다. 태원은 고조 이연이 군사를 일으켜 당 창업의 첫발을 내딛은 곳이다. 단언사는 고조 이연의 거병에 동조하여 당 건국에 공로를 세우게 되었고 뒷날 관직이 영주자사(州刺史)에 이르게 되었다.

  단지현은 아버지 단언사를 따라 태원에 갔는데 체격이 좋고 잘 생긴 용모에 재빠르고 용감하기까지 하여 태원 주변의 여러 무뢰배(無賴輩)들과 악동(惡童)들로부터 존경과 함께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 널리 알려졌다. 훗날 당 태종이 되는 이세민이 단지현에 대한 소문을 듣고 교류하게 되었다.

  그리고 당고조 이연의 거병(擧兵)에 단지현도 참여하게 되는데 이 당시의 정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연이 유수로 있던 태원은 군사적 요충지였다. 태원은 중국 북방의 강대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던 돌궐이 수도 장안(長安)을 공격하기 위해선 반드시 경유해야 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수 황실의 인척이었던 이연이 부임하였던 것이다.

  당시 수나라는 수양제(隋煬帝)의 3차에 걸친 고구려 원정이 인명과 국고의 막대한 손실만을 초래하고 마친 시점이었다. 고구려 원정의 참담한 실패로 인한 민심의 이반(離反)이 심각한 상황이었으나 양제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양제에게는 민심을 안정시키는 일보다는 천자로서의 자기 과시가 먼저였다. 그 결과 양제는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고 중국 전역은 천하대란이라고 할 정도의 혼란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양제가 이연을 태원 유수로 임명하기는 하였으나 이연을 신임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때 항간(巷間)에는 “이씨가 천하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었다. 시의심(猜疑心) 많은 양제의 의심을 사게 되면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것이 이연의 운명이었다. 이연 주변의 관리들은 이연에 대한 수양제의 의중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까닭으로 이연의 주변에 믿을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이연이 태원 수비대 이외의 별도의 군대를 소집할 수 있었던 것은 너무나도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던 당시 중국의 정세 덕분이었다. 중국 각지의 반란은 이미 기정사실이 되었다. 태원도 안전지대가 아니었다. 중국을 휩쓸고 있는 도둑의 무리가 언제 태원을 공략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장안으로 이르는 모든 길이 전국적인 반란으로 봉쇄되어 군대 소집이라는 비상 조치도 중앙정부의 승인을 얻지 않고 시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02

  이연이 당 창업의 첫발을 내딛는 군사를 소집하였을 때 그 수는 만 명에 불과했다. 이때 단지현은 1,000여 명을 모집하여 이 군대에 힘을 보태었으니 당 창업에 적지 않은 공을 세운 것이다. 단지현은 우영대도독부(右領大都督府) 군두(軍頭)가 되었고 당의 군대가 주변을 복속시켜 나갈 때 그 선봉에 섰다. 단지현은 곽읍(邑)과 강군(絳郡)03을 함락시키고 영풍창(永豊倉)을 공격할 때 선봉장이었다. 단지현은 이 공로로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에 임명되었다.

  단지현은 유문정(劉文靜)04을 좇아 굴돌통[屈突通: 망종(芒種) 절후를 관장]을 동관(潼關)05에서 막았다.

  유문정이 적병에게 습격당하고 군사들이 이미 흩어지게 되자 단지현은 소수의 기병(騎兵)을 이끌고 적진으로 진격하여 적병 십여 명을 베었는데 이 과정에서 화살을 맞았음에도 전투가 끝날 때까지 말하지 않고 군사들을 독려하였다. 단지현의 분전으로 적진이 혼란에 빠지고 이로 인해 군대를 수습할 시간을 벌게 된 당군은 재반격에 나서게 되었다. 단지현의 분전으로 전세를 역전시킨 당군은 적을 크게 무찌를 수 있었다. 이 전투의 결과 굴돌통도 패주하다가 여러 부하장수들과 함께 조상(稠桑)06에서 잡혔다. 이 싸움의 공로로 단지현은 낙유부거기장군(樂游府車騎將軍)에 제수되었다.

  단지현은 왕세충(王世充, ?~622)07 두건덕(竇建德, 573~621)08 토벌에도 공을 세우게 된다. 단지현이 왕세충의 군대와 싸우다 적진 깊숙이 침투한 적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낙마한 단지현은 왕세충의 군사에게 붙잡혔는데 두 명의 기병이 그의 상투를 양쪽에서 잡고 낙수(洛水)를 건너려고 하였다. 단지현은 몸을 솟구쳐 두 사람의 기병을 말에서 떨어뜨리고 그들의 말을 타고 귀환하였다. 단지현의 기세에 놀란 적은 수백의 기병이었으나 그의 뒤를 쫓기만 할 뿐 감히 압박해 오지 못하였다.

  당이 천하대란의 혼란을 수습하고 중국을 재통일하자 고조 이후의 대권을 놓고 내부 권력 투쟁이 전개되었다. 태자(太子) 건성(建成)과 제왕(齊王) 원길(元吉)은 진왕(秦王) 이세민의 수족(手足)들에게 대대적인 뇌물 공세를 폈다. 여기에는 단지현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태자 건성이 금과 비단으로 단지현을 유혹하였는데 그는 거절하고 받지 않았다.

  626년[무덕(武德) 9] 이세민이 현무문(玄武門)의 정변(政變)을 통해 즉위하자 단지현은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으로 승진하고 번국공(樊國公)에 봉해졌는데 식읍(食邑)이 900호(戶)에 달했다.

  단지현은 당태종의 명령으로 병사들을 거느리고 청해(靑海)에 가서 토욕혼(土谷渾)이 키우는 말을 빼앗았는데 이는 주변 민족들을 복속시키기 위한 당의 전략에 의한 것이었다.

  636년[정관(貞觀) 10] 문덕황후(文德皇后, 601~636)09의 장례식 때에 우문사급(宇文士及, ?~642)10과 함께 장무문(章武門)을 지켰는데 당태종이 밤에 사신을 보냈다. 우문사급은 문을 열고 황제의 사신을 맞아들이려 했는데 단지현이 막아서며 말했다.

  “군문(軍門)은 밤에 여는 것이 아닙니다.”

  사신이 황제의 친서를 직접 보였으나 단지현은 단호했다.

  “밤이라서 그 진위(眞僞)를 가릴 수 없습니다.”

  결국 당태종의 사신은 새벽이 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당태종이 이 일을 전해 듣고 감탄하면서 말했다.

  “진정한 장군이로다. 주아부(周亞夫)가 어찌 그대보다 나을 것인가!”11

  이 일이 있고 난 뒤 단지현은 포국공(褒國公)에 봉해지고 진군대장군(鎭軍大將軍)을 겸했다.

  642년[정관(貞觀) 16] 단지현이 병에 걸리자 태종이 직접 방문하여 이별하였다. 황제가 병상에서 울면서 말했다.

  “마땅히 경(卿)에게 오품(五品)의 관직을 내리겠노라.”

  단지현이 머리를 조아려 감사를 표하고 나서 그 관직을 동생에게 줄 것을 청하니 동생 단지감(段志感)이 좌위랑장(左衛郞將)을 배수 받았다.

  단지현이 죽자 황제가 그의 죽음에 통곡하면서 애도했다. 단지현에게는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 양주도독(揚州都督)이 증직(贈職)되고 그의 유해는 소릉(昭陵)에 안장되었는데 시호(諡號)를 장숙(壯肅)이라 했다.

  당의 창업과정에서 당태종을 도운 많은 장군들이 있었다. 그러나 울지경덕[尉遲敬德, 춘분(春分) 절후를 관장]과 굴돌통처럼 이른바 천하대란의 평정과정에서 편입되어 공훈을 세운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단지현과 같이 처음부터 태원 거병에서부터 참여하여 선봉에 선 장군은 드물었다.

 

 

 

 


01 제(齊)나라의 도읍지로 현재 산동성(山東省)에 있는 현(縣).

02 『대순회보』 90호, 「춘분(春分) 절후를 관장하는 울지경덕(尉遲敬德)1」, pp. 31~32 참조.

03 산서성(山西省) 신강현(新絳縣).

04 팽성[彭城, 현재 강소성(江蘇省) 서주(徐州)] 사람. 대대로 경조(京兆) 무공[武功, 현재 섬서성(陝西省) 무공(武功)]에서 살았다. 그의 아버지 유소(劉韶)가 전몰유공자(戰歿有功者)였던 까닭으로 관직이 내려졌는데 어린 유문정이 그 아버지의 관직을 잇게 되면서 관계(官界)에 진출하였다. 그는 수(隋)나라 말에 진양령(晉陽令)이 되었는데 이때 진양궁감(晉陽宮監)이었던 배적(裴寂)을 알게 되었다. 배적, 이세민과 함께 당시 태원 유수였던 당 고조 이연을 설득하여 수나라를 타도할 군사를 일으키도록 하였다. 고조가 군대를 일으키자 돌궐의 시필가한(始畢可汗)에게 사절로 갈 것을 자청하여 강력한 세력을 가진 돌궐의 군사력을 빌리고 이들이 당의 배후를 공략하는 것을 사전에 막았다. 그는 고조 이연이 대장군부(大將軍府)를 열었을 때 군사마(軍司馬), 고조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을 때 납언(納言)이 되었다. 당 창업 초기 고조는 유문정에 명하여 수나라의 개황율령(開皇律令)에 첨삭을 가하여 당의 법령으로 사용하였다. 유문정은 자신이 공로에 대한 자부심으로 공공연히 배적과 자신의 처지를 비교하여 권력 내부의 긴장을 형성하였다. 배적이 이 일로 고조에게 후환을 남기지 말자는 취지의 진언(進言)을 했는데 고조가 이를 받아들여 죽임을 당하니 그의 나이 52세였다.

05 섬서성(陝西省)에 있는 현(縣)의 이름으로 낙양(洛陽)과 장안(長安) 사이에 위치한 요새.

06 하남성(河南省) 운보현 북쪽.

07 경사(經史)에 밝고 병법에 정통하였으며 수(隋) 양제(煬帝)의 신임을 얻어 강도통수(江都通守)가 되었다. 수나라 말기에 일어난 농민 반란으로 동도(東都)인 낙양(洛陽)이 위험해지자 양제의 명으로 낙양을 구원하였다. 618년 양제가 죽자 낙양에서 월왕(越王) 양통(楊)을 황제로 추대하였다. 이후 강력한 반군이었던 이밀(李密)을 패퇴시키고 다음해인 619년 양통을 폐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국호를 ‘정(鄭)’이라 했다. 621년 이세민이 이끈 당군에 패하여 투항하였으며 장안으로 압송된 후 원한을 품은 사람들에게 피살되었다.

08 수(隋)나라 말기에 일어난 농민 반란의 우두머리들 중의 하나로 양자강(揚子江) 이북 지역을 근거지로 삼았다. 무리를 모아 618년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하(夏)’라 하고 스스로 ‘하왕(夏王)’임을 선포했다. 621년 당(唐)이 이세민을 보내 낙양(洛陽)의 왕세충(王世充)을 공격하였는데, 왕세충이 두건덕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왕세충을 구원하기 위해 병사를 움직였으나 호뢰관(虎牢關)에서 당군(唐軍)에게 패하고 장안에서 참수되었다.

09 장손씨(長孫氏). 수(隋) 효위장군(驍衛將軍) 장손성(長孫晟)의 딸로 장손무기[長孫無忌, 동지(冬至)절후를 관장]의 누이동생이다. 13세 이세민에 출가하여 618년(武德 元年) 진왕비(秦王妃)로 책봉되고 태종(太宗)이 즉위하자 황후로 책봉되었다. 636년[정관(貞觀) 10]에 36세의 나이로 죽으니 시호(諡號)를 문덕(文德)이라 했는데 『여칙(女則)』 10권을 남겼다.

10 수양제(隋煬帝)의 집권에 공을 세운 우문술(宇文述)에게는 화급(化及), 지급(智及), 사급의 삼형제가 있었는데 그 중 막내. 수(隋) 개황(開皇) 말년에 신성현공(新城縣公)에 봉해지고 양제의 딸인 남양공주(南陽公主)와 결혼하여 부마가 되었다. 양제를 따라 강도(江都)까지 수행하였고 우문화급이 양제를 시해하였을 때 촉왕(蜀王)에 봉해지기도 했다. 우문화급이 두건덕에 패배하자 당에 귀순하였다. 사급의 누이가 당고조 이연의 소의(昭儀)가 되어 총애를 받게 되고 사급에게도 그 여파가 미치게 되었다. 당의 천하통일 과정에서 공을 세워 영국공(國公)에 봉해졌고, 현무문(玄武門)의 정변(政變)에서 이세민 측에 가담하여 태종(太宗)이 즉위하고 나서 중서령(中書令)이 되었다. 죽을 때 전중감(殿中監)이었는데 좌위대장군(左衛大將軍)과 양주도독(凉州都督)이 증직(贈職)되고 소릉(昭陵)에 안장되었다.

11 주아부(기원전 ?~기원전 143)는 전한(前漢)의 창업공신인 주발(周勃)의 아들로 문제(文帝), 경제(景帝) 때의 인물이다. 문제 때 주아부는 흉노(匈奴)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군대를 맡았다. 문제가 친히 주아부의 군대를 시찰하기 위해 군영에 도착하였는데, 병사들이 “병영에서는 장군의 명령이 우선이며 천자의 어명이라도 따를 수 없다.”라는 말로 문제를 맞이하지 않았다. 문제가 천자의 부절(符節)을 주어 주아부를 찾아가게 하자 그제서야 군영의 문을 열게 하였다. 이 일로 문제는 주아부를 ‘진정한 장군’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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