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보 1면 대순진리회(大巡眞理會) 대순지침 상제님의 일대기 천계탑 28수 신명의 생애 24절후 신명의 생애 대순논단 종단소식 24절후 소개 대순칼럼 대순문단 금강산 이야기 알립니다
28수 신명의 생애 : 오한(吳漢) 神明열전
오한(吳漢) 神明열전
오한(吳漢)은 자(字)가 자안(子顔)이고 남양(南陽)의 원(苑) 사람이다. 집이 가난하여 현(懸)의 급사(給事)로 정장(亭長)을 지냈다. 왕망(王莽) 말엽에 빈객(賓客)으로 법을 범했는데 이로 인해 어양(漁陽)으로 망명을 가게 되었다. 쓸 돈이 떨어지자 말 장수를 하면서 연(燕)과 계지방 사이를 왕래했는데 가는 곳마다 호걸들과 교분을 가졌다. 갱시(更始)가 즉위하여 사자(使者) 한홍(韓鴻)으로 하여금 하북(河北)을 순시케 하였다. 이때 어떤 이가 한홍에게 이르길 『오자안(吳子顔)은 기사입니다. 그와 더불어 일을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에 한홍이 오한을 불러 들였는데 만나 보고서 매우 흡족해 했다. 마침내 천자의 명을 받들어 그에게 안락령(安樂令)이라는 벼슬을 제수했다. 광무가 장차 유주의 병력(兵力)을 징발하려고 밤에 등우를 불러 누구를 보냈으면 좋을지를 물었다. 더불어 여러 번 얘기를 했었는데 『그 사람은 용기도 있고 지모(智謀)도 있어 그에 미치는 장수가 없는 것으로 압니다.』라고 하자 곧바로 오한을 대장군(大將軍)에 제수(除授)하고 부신(符信)을 주어 북으로 열 군(郡)의 돌기병(突騎兵:돌격대와 같음)을 징발토록 했다. 갱시(更始) 휘하의 유주목 묘증(苗曾)이 이를 듣고는 은밀히 군대를 통어(統御)하며 제군(諸郡)에 조서를 내려 징발에 응하지 말도록 했다. 오한은 이에 기병 스무 기(騎)를 이끌고 먼저 무종(無終)으로 달려갔는데 묘증은 오한의 군대가 방비가 없을 것으로 여겨 길가로 나가 맞아들이려고 했다. 오한이 곧바로 기병을 지휘하여 묘증의 목을 베고 그 군속(軍屬)들을 빼앗았다. 비록 함께 하단성 안에 있었으나 마침내는 성(城)을 나누어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서로 안부는 취할 수 있었다. 사궁은 늘 직무에 근실했는데 광무가 칭찬하기를 『사상서령(謝尙書令)이 진짜 관리이다.』라 했다. 그러자 사궁은 광무를 의심치 않았다. 사궁은 이미 그 병사들을 거느리고 업으로 돌아가 진을 치고 있었다. 이때 광무는 남쪽으로 내려가 청독(靑犢)을 치고는 사궁에게 말했다. 『나는 사견에서 적들을 따라가 꼭 쳐부수겠다. 군도들로 산양에 머무는 놈들은 이로 인해 기세가 꺾여 도망칠 것이다. 만일 그대의 위력으로 이들을 쳐 대오를 흐트린다면 반드시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이에 사궁은 쾌히 응낙했다. 광무가 청독을 함락시키자 군도들이 과연 북쪽 용려산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사궁이 이와 때를 맞추어 대장군 유경과 위군태수 진강을 머물게 하여 업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여러 장군들을 이끌고 도망가는 군도들을 추격했다. 광무가 사궁의 성 밖에 있는 틈을 타 오한과 잠팽을 시켜 그 성을 치게 했다. 오한이 우선 변사를 보내 진강에게 유세케 하였다. 『제가 듣기로 상지자는 위험에 처하지 않고도 난을 구제하며, 중지자는 위기로 인해 공을 세우고, 하지자는 위기에 안주하려다 저절로 망한다고 했습니다. 위기와 패망의 다다름은 사람으로 인해서 생겨나는 것이니 잘 살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요새 경사(京師)는 패하여 어지럽고 사방이 소란스러움은 그대도 들어 아는 바이며 소왕의 군대가 강성하고 병사들이 좇아 하북이 그에게로 돌아섰음은 그대가 본 바입니다. 사궁이 안으로는 소왕을 배신하고 밖으로는 민심을 잃었음은 그대가 아는 바입니다. 그대는 지금 위태한 성을 지키면서 멸망의 화를 기다리고 있는데 이에 신의가 설 바가 아니요 충절 또한 이루어질 바가 아닙니다.』 <계속>
|
Copyright (C) 2009 DAESOONJINRIHOE All Rights Reserved.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 강천로 882 대순진리회 교무부 tel : 031-887-9301 mail : gyomubu@daesoon.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