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너별 보기
   daesoon.org  
대순124년(1994) 11월

이전호 다음호

 

회보 1면 대순진리회(大巡眞理會) 대순지침 상제님의 일대기 천계탑 28수 신명의 생애 24절후 신명의 생애 대순논단 종단소식 24절후 소개 대순칼럼 대순문단 금강산 이야기 알립니다

28수 신명의 생애 : 오한(吳漢) 神明열전

오한(吳漢) 神明열전

            

 

 

  오한(吳漢)은 자(字)가 자안(子顔)이고 남양(南陽)의 원(苑) 사람이다. 집이 가난하여 현(懸)의 급사(給事)로 정장(亭長)을 지냈다.

  왕망(王莽) 말엽에 빈객(賓客)으로 법을 범했는데 이로 인해 어양(漁陽)으로 망명을 가게 되었다. 쓸 돈이 떨어지자 말 장수를 하면서 연(燕)과 계지방 사이를 왕래했는데 가는 곳마다 호걸들과 교분을 가졌다. 갱시(更始)가 즉위하여 사자(使者) 한홍(韓鴻)으로 하여금 하북(河北)을 순시케 하였다. 이때 어떤 이가 한홍에게 이르길 『오자안(吳子顔)은 기사입니다. 그와 더불어 일을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에 한홍이 오한을 불러 들였는데 만나 보고서 매우 흡족해 했다. 마침내 천자의 명을 받들어 그에게 안락령(安樂令)이라는 벼슬을 제수했다.
  왕랑(王郞)의 봉기를 당하여 북주(北州)가 소란스러웠다. 오한은 평소에 광무(光武)의 훌륭함을 들어왔던 터라 이 기회에 그에게 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이에 태수(太守) 팽총(彭寵)에게 말하길 『어양(漁陽) 상곡의 돌격대는 그 명성이 천하에 자자합니다. 태수께서는 어찌 두 군(郡)의 접예부대를 합하여 유공(劉公)을 따라 한단을 치지 않는 것입니까? 이는 다시 오기 어려운 기회인줄로 압니다.』 그러나 관속(官屬)들이 모두 왕랑을 따르길 원해 팽총으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오한은 이에 인사하고 나와서는 외정(外亭)에 머물렀는데 태수 관속의 무리들을 어떻게 속여서라도 해보려고 했으나 계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유생(儒生)처럼 보이는 사람이 길을 가고 있는 것을 보고 사람을 시켜 그를 부르게 하고는 먹을 것을 내주고 소문을 물었다. 지나가는 곳이면 군현(郡縣)이 그에게로 귀속되는 바이지만, 한단에서 실권을 쥐고 있는 사람은 실재로 유씨(劉氏)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오한이 크게 기뻐하며 곧바로 광무의 조서를 가장하여 어양에 격문(檄文)을 띄우고 한편으로는 그 유생으로 하여금 팽총에게 가게 하여 들은 바를 낱낱이 얘기하게 했다. 그리고 오한은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팽총이 정말 그렇겠다고 여기고 오한으로 하여금 어양의 군대와 상곡의 여러 장수들을 합군(合軍)하여 남쪽으로 내려가게 했는데 이르는 곳마다 왕랑의 장수들을 격참(擊斬)시켰다. 광무가 광아(廣阿)에 이르러서 오한을 편장군(偏將軍)으로 삼았다. 한단을 함락시키고 나서는 그에게 건책후(建策候)라는 호를 내렸다.
  오한은 사람됨이 질후(質厚)했으나 학문이 짧아 문장으로 자신의 뜻을 빨리 표달시킬 수 없었다. 등우(鄧禹)와 여러 장수들이 이 사실을 익히 알면서도 자주 천거했는데 기용되어서는 신임을 받아 늘 문하(門下)에 머물렀다.

  광무가 장차 유주의 병력(兵力)을 징발하려고 밤에 등우를 불러 누구를 보냈으면 좋을지를 물었다. 더불어 여러 번 얘기를 했었는데 『그 사람은 용기도 있고 지모(智謀)도 있어 그에 미치는 장수가 없는 것으로 압니다.』라고 하자 곧바로 오한을 대장군(大將軍)에 제수(除授)하고 부신(符信)을 주어 북으로 열 군(郡)의 돌기병(突騎兵:돌격대와 같음)을 징발토록 했다. 갱시(更始) 휘하의 유주목 묘증(苗曾)이 이를 듣고는 은밀히 군대를 통어(統御)하며 제군(諸郡)에 조서를 내려 징발에 응하지 말도록 했다. 오한은 이에 기병 스무 기(騎)를 이끌고 먼저 무종(無終)으로 달려갔는데 묘증은 오한의 군대가 방비가 없을 것으로 여겨 길가로 나가 맞아들이려고 했다. 오한이 곧바로 기병을 지휘하여 묘증의 목을 베고 그 군속(軍屬)들을 빼앗았다.
 북주(北州)가 놀라 모든 성읍(城邑)이 멀리서 소식만 듣고는 뜻을 따르기로 했다. 드디어 병력을 모두 징발하여 이들을 이끌고 남으로 내려가 광무와 청양에서 합류했다. 뭇 장수들이 오한이 돌아오는데 군사와 말이 매우 많음을 보고는 모두 말하길 『어찌 저 병사들을 갈라 다른 장수들에게 주지 않으랴.』라고 했다. 오한이 막부에 이르자 장수들이 병부(兵簿)를 올려 병사들을 많이 청했다. 이를 보다 못한 광무가 말하길 『그대들은 남에게 병사들을 주지 못해 안달이더니 이제 와서 병사를 청함이 어찌 또 그리도 많은고?』하니 병사를 청했던 장수들이 모두 부끄러워하였다.
  애초에 갱시가 상서령(尙書令) 사궁(謝躬)으로 하여금 여섯 장군을 이끌고 왕랑을 공격하게 했는데 항복시키지 못했다. 광무가 당도하여 함께 하단을 평정했다. 그런데 사궁의 부장군(副將軍)이 약탈을 일삼고 상관의 지시를 잘 받지 않아 광무가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비록 함께 하단성 안에 있었으나 마침내는 성(城)을 나누어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서로 안부는 취할 수 있었다. 사궁은 늘 직무에 근실했는데 광무가 칭찬하기를 『사상서령(謝尙書令)이 진짜 관리이다.』라 했다. 그러자 사궁은 광무를 의심치 않았다. 사궁은 이미 그 병사들을 거느리고 업으로 돌아가 진을 치고 있었다. 이때 광무는 남쪽으로 내려가 청독(靑犢)을 치고는 사궁에게 말했다. 『나는 사견에서 적들을 따라가 꼭 쳐부수겠다. 군도들로 산양에 머무는 놈들은 이로 인해 기세가 꺾여 도망칠 것이다. 만일 그대의 위력으로 이들을 쳐 대오를 흐트린다면 반드시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이에 사궁은 쾌히 응낙했다. 광무가 청독을 함락시키자 군도들이 과연 북쪽 용려산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사궁이 이와 때를 맞추어 대장군 유경과 위군태수 진강을 머물게 하여 업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여러 장군들을 이끌고 도망가는 군도들을 추격했다.
  궁지에 빠진 도적들이 사력을 다해 덤벼들었는데 그 날카로운 기세를 당할 수 없었다. 마침내 사궁은 크게 패하였고 죽은 자도 수천이 되었다.

  광무가 사궁의 성 밖에 있는 틈을 타 오한과 잠팽을 시켜 그 성을 치게 했다. 오한이 우선 변사를 보내 진강에게 유세케 하였다.

  『제가 듣기로 상지자는 위험에 처하지 않고도 난을 구제하며, 중지자는 위기로 인해 공을 세우고, 하지자는 위기에 안주하려다 저절로 망한다고 했습니다. 위기와 패망의 다다름은 사람으로 인해서 생겨나는 것이니 잘 살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요새 경사(京師)는 패하여 어지럽고 사방이 소란스러움은 그대도 들어 아는 바이며 소왕의 군대가 강성하고 병사들이 좇아 하북이 그에게로 돌아섰음은 그대가 본 바입니다. 사궁이 안으로는 소왕을 배신하고 밖으로는 민심을 잃었음은 그대가 아는 바입니다. 그대는 지금 위태한 성을 지키면서 멸망의 화를 기다리고 있는데 이에 신의가 설 바가 아니요 충절 또한 이루어질 바가 아닙니다.』 <계속>

 

 

 

 

관련글 더보기 인쇄

Copyright (C) 2009 DAESOONJINRIHOE All Rights Reserved.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 강천로 882 대순진리회 교무부 tel : 031-887-9301 mail : gyomubu@daesoon.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