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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25년(1995)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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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이야기 : 사명당 유정의 전설

금강산 유점사에서 수도했던

 

사명당 유정의 전설


            

          
  임진왜란이 조선민중의 승리로 끝난 다음의 일이다. 침략전쟁에서 된 타격을 받고 쫓겨난 왜적들은 조선과의 평화조약을 맺으려고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왔다. 그들은 겉으로는 잘못을 인정하는 체 하면서도 속으로는 조선에 대한 침략야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이런 조건에서 조선 측에서는 적의 동정도 탐지하고 승리자의 위세도 드높이 왜적의 항복을 받아올 만한, 외교 군사 두 방면에 다 유능한 사람을 보내야 했다.
  1604년에 조선 봉건정부에서는 오랫동안 논의하던 끝에 중의병 대장이었던 사명당을 보내기로 하였다.

  왜 조정에서는 유명한 중인 사명당이 사신으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속으로는 켕기었으나 갖은 방책을 다하여 그를 놀라게 함으로써 저들의 요구를 관철해 보려고 획책하였다. 그들은 먼저 조선사신이 오는 길목에 3백60칸 짜리 긴 병풍을 세워두고 거기에 한시를 가득 써 놓았다. 그리고 왕궁의 대문 앞에 이르러 더 들어가지 않고 품안에 염주구슬을 꺼내더니 문간에 던졌다. 「쟁강」하는 유리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는 접대하는 관리를 불러 큰 소리로 호령하였다.

  『내 필경 네 놈들이 이런 장난을 하리라는 것을 미리 알았노라 빨리 함정을 메꿀지어다.』
  왜왕은 그의 혜안에 놀라 그를 별궁으로 인도하게 하였다.

  이날 밤 왜왕은 어려운 문제를 걸어 사명당을 곤경에 몰아놓으려고 시도하면서 3백60칸 병풍에 쓴 글을 다 보았겠는데 한 번 외워주면 좋겠다고 하였다. 사명당은『그만한 것쯤 외우지 못하겠는가?』하더니 1만 9천여귀에 달하는 시를 한자도 빼놓지 않고 줄줄 다 외우는 것이었다. 다만 마지막 병풍 한 칸의 글은 외우지 않았다. 왜왕이 그 사유를 물은 즉, 그는 『접혀 있던 것까지야 어떻게 볼 수 있었겠소.』라고 대답하였다. 왜왕이 사람을 시켜 알아보니 과연 마지막 한 칸은 펴지 않은 채로 있었다. 왜왕은 그의 비상한 재능에 그만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날 왜 조정에서는 조선사신을 철판으로 만든 배에 태워 큰못에 띄어놓으면 필경 물에 빠져 죽을 것이라고들 의논하였다. 그래서 좋은 경치를 구경시켜주마고 사명당을 철판배에 앉혀서 물위로 밀쳐 보냈는데 철판 배는 순풍에 돛을 달고 동서남북으로 평지를 다니듯 왔다갔다하였다. 두 번째로 실패한 왜왕은 이번에는 구리집을 짓고 사방에서 숯을 피워 태워 죽일 계책을 꾸몄다. 사명당은 그런 줄을 뻔히 알고 있었으나 서슴없이 구리 방 안에 들어가더니 네 벽에다「서리 상」자를 써 붙이고 바닥에는「얼음 빙」자를 써놓았다. 왜적들은 구리집 두리에 백탄을 가득 쌓고 풀무질을 하면서 불을 세차게 일구었다. 밤새껏 구리 집을 달군 끝에 이제는 틀림없이 죽어서 잿가루가 되었으려니 하고 문을 열어보니 사명당의 눈썹에는 성에가 하얗게 끼고 수염에는 고드름이 주렁주렁 달려있었다. 왜왕은 마지막으로 조선사신을 철마에 태운 다음 고열로 무쇠 말을 녹이려고 하였다. 사명당이 배운 도술로써는 이에 대한 방어대책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철마 앞에 나가 서서 자기 스승인 서산대사를 생각하며 서북쪽 하늘을 향하여 두 번 머리 숙여 절을 하였다. 이윽하여 조선 쪽에서 검은 구름이 밀려오더니 뇌성벽력이 치며 폭우가 쏟아지고 세찬 바람이 불었다.
  사명당이 서 있는 곳에는 빗방울 하나가 떨어지지 않았으나 일본 전국에는 큰물이 나서 집과 논밭이 다 떠내려가고 왜놈들이 무리로 죽었으며 국왕이 있는 성까지도 무너졌다. 아무리 기다려도 비는 개일 줄을 몰랐다. 왜왕은 너무도 황급하여 항복서를 써보냈으나 사명당은 퇴를 놓으면서 『왜왕의 목을 베어와야 그치게 하겠노라.』고 호통을 쳤다. 왜 조정의 모든 관리들이 와서『제발 그것만은 면하게 해주십사.』고 엎드려 빌므로『그렇다면 항복서를 바치고 조공으로 구리 3만6천근, 후추 3백석, 황금 30근을 해마다 어김없이 바치라.』고 하였다. 왜왕이 하는 수 없이 그대로 항복서를 바치니 그제서야 뇌성벽력과 폭풍우가 멎었다. 사명당은 또한 임진왜란 때 적들에게 붙잡혀갔던 조선사람 3천 수백명을 되찾아서 고국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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