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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25년(1995)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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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절후 신명의 생애 : 淸明절후 관장하는 이정(李靖)

淸明절후 관장하는

이정(李靖)

         

 

                   

  이정(李靖)은 자가 약사(藥師)이고 경조(京兆) 삼원(三原) 사람이다. 용모가 매우 빼어났고 <서경(書經)>과 <사기(史記)>에 능통했다. 늘 친구에게 말하길『장부가 때를 만나면 마땅히 공명으로 부귀를 얻어야지, 어찌 문장이나 짓는 유학자가 될 소냐.』라고 하였다. 그의 외삼촌 한금호(韓擒虎)와 더불어 매번 병법(兵法)을 논할 때마다, 외삼촌이 감탄하여 말하길『더불어 손자(孫子)와 오자(吳子)를 이야기 할 만한 자가 이 사람이 아니면 누구리요!』라고 하였다. 수(隋)에 벼슬하여 전내직장(殿內直長)이 되었는데, 이부상서(吏部尙書)인 우홍(牛弘)이 정(靖)을 보고 말하길『임금을 보필할 인재로다!』 좌복야인 양소(楊素)는 자기의 자리를 어루만지며 말하길『그대는 종내 이 자리에 마땅히 앉아야 하오.』라고 하였다.
  대업(大業) 말년에 마읍(馬邑)의 승상이 되었다. 고조가 돌궐족을 공격할 때에 정은 고조에게 비범한 뜻이 있음을 알리는 서찰을 올려 강도(江都)로 전송되어지는 도중 장안(長安)에 이르러 길이 막혔다. 고조가 이미 수도지역을 평정하고 난 뒤 정을 목을 베려 하였는데, 정이 울면서 말하길『공(公)께서 병사를 일으키신 것은 천하를 위하여 난폭한 이들을 제거하고자 하심 입니다. 큰 일을 이루고자 하시면서 사사로운 원한 때문에 정의로운 선비를 죽이시겠습니까?』진왕 또한 정을 위하여 간청하여 석방되었고, 삼위(三衛)로 발탁되었다. 임금을 좇아 왕세충(王世充)을 평정하고 그 공로로 개부(開府)를 배수 받았다.
  소선(瀟銑)이 강릉(江陵)지역을 점거하자 정에게 잘 무마하라는 조서가 내려졌다. 몇 명의 어린 기마병을 쫓아 금주(金州)를 지나는데 오랑캐 적인 등세낙(鄧世洛)의 병사 수만 명이 계곡사이에 주둔하여 있었다. 이에 영(嶺) 땅을 지나 계주(桂州)에 이르러 길을 나누어 회유하니, 추장 풍앙(馮央)등이 모두 자제(子弟)의 예를 갖추고 와서 배열하여, 이로써 남쪽 지역이 모두 평정되었다. 공적을 헤아려 상을 줌에 관례에 따라 관직을 받았다. 승리해 얻은 지역이 96개 군(郡)이요, 가구가 60여만 호(戶)였으니, 노고를 치하하는 조서가 내려지고 영남(嶺南)지역 무위대사(撫慰大使), 계주(桂州)지역 검교총관(檢校總管)을 배수했다. 산마루와 바다로 가로막혀 수도권으로부터 매우 먼 궁벽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오래도록 임금의 성덕을 보지 못하여, 무력의 위엄을 떨치고 예의를 보여주지 않으면 풍속을 바꿀 수 가 없었다. 그리하여 병사들의 지역마다 노고를 위로하고 장로들을 불러 만나면 천자(天子)의 은혜를 널리 펴니, 멀리 있거나 가까이 있는 이들이 기쁜 마음으로 복종했다.
  보공석(輔公石)이 단양(丹陽)을 점거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조서를 내려 효공(孝恭)을 장수로 삼고 정을 조정으로 불러들여 책략을 받아들인 후 공의 부장군으로 삼아 동족을 토벌케 했다. 이세적(李世勣)을 비롯한 일곱 명의 총관(總管)들은 모두 절도사 직을 배수 받았다. 공석(公石)은 풍혜량(馮惠亮)을 보내어 수군(水軍) 3만 명을 거느리고 당도(當塗)지역에 주둔케 하고, 또 진정통(陳正通)을 보내어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데리고 청림(靑林) 지역에 주둔케 하여 양산(梁山) 땅으로부터 연쇄적으로 강(江)지역의 길을 차단했다. 또 초생달 모양의 성을 쌓았는데 길이가 십여 리에 달했으나 이로써 앞 뒤 협공의 형세가 형성되었다. 여러 장수들이 의논하여 말하기를『적들의 날랜 병사가 방책을 연이어 쌓고 있어 재차 싸우지 않더라도 우리 병사를 괴롭힐 것입니다. 만일 단양(丹陽)을 직접 탈취하여 그 소굴을 폐허로 만든다면 혜량(蕙亮) 등이 스스로 항복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정이 말하길『아닙니다. 우리의 수군과 보명, 기병이 아무리 정예 부대라 하여도, 공석이 거느리는 병졸들 또한 만만치가 않습니다. 이미 석두(石頭)지역에 보루를 쌓았으니 견고하여 함락 시킬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 군대가 머물렀다가 뜻을 얻지 못하고 퇴각할 경우에도 위험이 있으니 배와 등에 화를 입을 형세이라 안전한 계책이 되지 못합니다. 또한 혜량이나 정통 등은 수 많은 전투에서 살아 남은 적들이며 평야에서의 싸움을 겁내지 않으니, 지금 바야흐로 우리가 강경책을 견지한다면, 이는 다만 고석이 계책을 세우도록 도와주는 꼴이 될 것입니다. 만약 불시에 출병하여 적의 성을 공격한다면 필시 격파할 수 있을 것이며 혜량을 항복 시키고 공석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효공이 정의 계책을 따랐다. 정이 황군한(黃君漢)등 수군, 육군을 거느리고 총공격을 개시하여 치열하게 싸워 만여 명을 살상하니 혜량 등은 도망갔다.
  정이 날랜 병사를 거느리고 단양(丹陽)에 도착하니, 공석이 두려워하여 병사가 오히려 많았음에도 싸우지 못하여, 이에 달려나가 그를 사로잡았으니 강남지역이 평정되었다. 동남도(東南道) 행대(行臺)를 설치하여 행대의 병부상서(兵部尙書)로 삼았다. 예물 천 종류와 노비 백명과 말 백필을 하사했다. 행대가 폐하여 지자 양주(楊州) 대도독부(大都督府) 장사(長史) 직을 맡았다. 임금이 말하길『정은 소선(瀟銑)과 공석이 제일 두려워하는 자이다. 옛날 한신(漢信), 백기(白起), 위청(衛靑). 곽거병(藿去病)이 어찌 이보다 나았으리!』라고 하였다.
  무덕(武德) 8년에 돌궐족이 태원(太原) 지역에서 노략질을 하니 정은 행군총관(行軍總管)이 되어 강(江), 회(淮) 지역에 병사 만 명을 거느리고 태곡(太谷) 땅에 주둔했다. 이 당시에 장수들은 패배하는 자가 많았는데 유독 정만이 군대를 온전히 보존하여 돌아왔다. 얼마 후에 임시로 안주(安州)의 대도독(大都督)을 맡았다. 태종(太宗)이 즉위하자, 형부상서(刑部尙書)를 배수받았고, 공적을 따져 실질적인 봉읍 4백호를 하사 받고 중서령(中書令)을 겸하여 맡게 되었다. 돌궐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임금이 진격하여 정복하고자 하여,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정양도(定襄道) 지역의 행군총관(行軍總管)으로 삼고, 용감한 기병 삼천 명을 거느리고 마읍(馬邑)으로부터 악양령(惡陽嶺)으로 달려나가게 하였다. 힐리칸이 크게 놀라서 말하길『적군이 우리나라를 무너뜨릴 기세가 아니라면 정이 감히 소수의 군대를 이끌고 여기까지 오겠는가?』라고 하였고 이리하여 그들 부족은 수 차례 두려워하였다. 정은 첩자를 보내 적장의 심복들을 이간질 시키고, 야밤에 정양(定襄) 땅을 습격하여 격파하니 오랑캐의 왕, 즉 칸은 사막으로 피신하였다. 정은 대국공(代國公)으로 진급되어 봉해졌다. 임금이 말하길『이릉(李陵)은 보병 오천으로 사막을 차단했으나, 끝내는 흉노적에게 항복했는데도, 그의 공적이 오히려 죽백(竹帛)에 기록되어 전해진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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