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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25년(1995)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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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수 신명의 생애 : 오한(吳漢)神明 열전

오한(吳漢)神明 열전

           

             

  문을 열어 우리 군대를 받아들임이 전화위복(轉禍爲福)의 계기가 됨은 물론 하지자의 패망을 면하고 중지자의 공을 거두는 길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도모할 수 있는 최상의 방책입니다. 이를 듣고 진강은 그렇다고 여기고 유경과 사궁의 처자(妻子)들을 잡아들이고 성문을 열어 오한 등을 맞아 들였다. 사궁이 융려(隆慮)로부터 업으로 돌아왔는데 진강이 이미 그를 배신했음을 알지 못했으므로 수백 명의 기병과 함께 가벼이 성으로 들어왔다. 오한의 복병들이 사궁을 잡아 손으로 쳐죽이자 따르던 그의 병사들이 모두 항복했다.
  사궁의 자는 자장(子張)으로 남양(南陽) 사람이었다. 

  애초에 그의 처가 광무가 그를 제대로 대하는 것이 아닌 것을 알고 늘 사궁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당신과 유공(劉公)은 전력(戰力)면에서 서로 능가할 수 없는데도 그 사람의 헛소리를 믿고 방비를 하지 않는다면 마침내 제압당하고 말 것입니다.』라 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그와 같은 난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광무가 북진해 군적(群賊)을 쳐부술 때 오한은 늘 돌격대 5천기를 거느리고 선봉에 섰는데 자주 앞장서서 성에 올라 진(陳)을 허물어뜨리곤 했다. 하북(河北)이 평정되자, 오한과 여러 장수들이 도서(圖書)를 받들고 존호(尊號)를 올렸다. 광무가 즉위하여 오한에게 대사마(大司馬)를 제수하고 다시 무양후(舞陽侯)에 봉했다.
  건무 2년 봄에 오한은 대사공(大司空) 왕량(王梁)과 건의대장군(建義大將軍) 주우(朱祐), 대장군 두무(杜武), 집금오(執金吾) 가복(賈復), 양화장군(揚化將軍) 견심 편장군(偏將軍) 왕패(王覇) 기도위(騎都尉) 유융(劉隆)·마무(馬武)·음식(陰識) 등과 함께 업성 동쪽 장수(獐水) 근처에서 단향적(檀鄕賊)들을 공격하여 크게 격파했는데 항복한 사람의 수가 10여 만에 달했다. 광무제가 사자(使者) 편에서 새서(璽書)를 보내 오한을 광평후(廣平侯)로 삼고 광평 척장(斥獐), 곡주(曲周), 광년(廣年) 등의 네 현을 식읍으로 주었다.
  오한은 다시 여러 장수들을 이끌고 업의 서산적(西山賊), 여백경 등과 하내(河內)의 수무적 등 여기저기서 주둔하던 적들을 모두 격파했다. 어가(御駕)가 당도해 수고를 치하했다. 다시 오한으로 하여금 남양으로 진격하여 왼, 열(涅), 양(陽), 양(孃), 신야(新野) 등의 여러 성을 치게 했는데 모두 함락시켰다. 군대를 이끌고 남으로 내려가 진풍과 황우수(黃郵水) 근처에서 싸워 격파시켰다. 또 편장군 풍이와 함께 창성오루적(昌城五樓賊) 장문(張文) 등을 쳐부수고 신안(新安)에서 동마(銅馬)·오번(五燔) 적을 공격했는데 모두 격파했다.
  그 이듬해 봄에 건위대장군(建威大將軍) 경감과 호아대장군(虎牙大將軍) 합연을 거느리고 지의 서쪽에서 청독(靑犢)을 크게 부수고 항복시켰다. 또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두무(杜茂) 감노장군 진준(陳俊) 등을 거느리고 광락(廣樂)에서 소무(蘇茂)를 포위하였다.
  유영(劉永)이 주건(周建)을 거느리고 별도로 군사를 10여만 명 불러 모아 광락을 구원하게 하였다. 오한이 날랜 기병을 거느리고 이들을 맞아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한데다 말에서 떨어져 무릎을 다쳐 군영(軍瀯)으로 되돌아갔다. 주건 등은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성안으로 들어갔다. 여러 장수들이 오한에게 이르길『대적(大敵)이 눈앞에 있는데 공(公)께서는 다쳐 누웠으니 뭇 병사들이 마음속으로 두려워하는 것 같습니다.』라 하니 오한은 이에 의연히 붕대를 감고 일어났다. 소를 잡아 병사들에게 먹이고 군중(軍中)에 이르길『적(賊)의 무리가 비록 많다고는 하나 겁탈과 노략질을 일삼는 군도(群盜)에 불과하다. 승리는 양보할 수 없는 것이고 패멸(敗滅)엔 구제(救濟)도 없다.』고 했다. 『금일 제후로 봉해지려는 순간이니 병사들은 힘쓰도록 하라!』고 하자 병사들은 사기가 충천했다. 이튿날 주건과 소무가 병사들을 내보내 오한을 포위했다. 오한은 사부(四部)의 정병인 황두(黃頭)의 오하(吳河) 등과 오한의 돌기병 3천여 명을 뽑아 일제히 북을 치면서 진군케 했다.
  접전 후 주건의 군대가 크게 궤멸되어 성으로 도망치려 했다. 오한이 계속 쫓아가 성문 근처에서 싸우다가 함께 성안으로 들어가서 크게 격파했다. 이에 소무와 주건은 성을 버리고 도주했다. 오한은 두무와 진준 등을 남게 하여 광락을 수비케 하고 자신은 군대를 이끌고 수양에서 유영을 포위하고 있던 합연을 도우러 갔다. 얼마 후에 유영은 죽고 두 성 모두 함락되었다.
  그 다음해에 또 진준 및 전장군(前將軍) 왕량(王梁)을 거느리고 임평(臨平)에서 오교적(五校賊)을 격파했는데 동군(東郡)의 기산까지 쫓아가 섬멸시켰다. 북으로 청하(靑河), 장직(長直) 및 평원(平原)의 오리적(五里賊)을 쳐 모두 평정시켰다. 이때 격현의 다섯 성(姓)이 공모하여 현의 수장(守長)을 쫓아내고 성을 근거리로 반란을 일으켰다. 여러 장수들이 다투어 그들을 쳐부수자고 했으나 오한은 이를 듣지 않고 말하기를『격현에 반란이 생기게 한 것은 모두 수장(守長)의 죄이다. 감히 가벼이 군대를 내보내는 자는 베어버리겠다.』라 하고는 또 사람을 시켜 성중(城中)의 사람들에게 사죄하게 했다. 다섯 성(姓)의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여 곧바로 아랫사람들을 거느리고 와서 투항(投降)했다. 여러 장수들이 이에 탄복하면서 말하기를『전쟁을 하지 않고도 성(城)을 항복시켰으니 우리들이 미칠 바가 못되는 것이다.』라 했다.
  그해 겨울에 오한은 건위대장군 경감과 한충대장군(漢忠大將軍) 왕상(王常) 등을 거느리고 평원(平原)에서 부평적(富平賊)과 획삭적을 격파했다. 그 이듬해 봄에 도적들이 5만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밤중에 오한의 군영(軍營)을 공격해 왔는데 군중(軍中)이 놀라 법석을 떨었으나 오한은 누운 채로 있으면서 동요되지 않았다. 얼마 안 있어 잠잠해지자, 곧바로 정병(精兵)을 내보내 돌격하게 하여 그 무리들을 크게 무찔렀다. 그 잔당을 쫓으면서 마침내 무염(無鹽)까지 이르렀는데 발해(渤海)에서 격파하여 모두 평정시켰다. 또 동헌(董憲)을 무너뜨리고자 구성을 포위하고 이듬해 봄에 성을 함락시켜 동헌을 참수(斬首)했다.
  이에 관한 기록은 유영전(劉永傳)에 나온다. 동방이 평정됨에 군대를 정돈하여 경사(京師)로 돌아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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