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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28년(1998)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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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수 신명의 생애 : 室 별을 관장하는 풍이(馮異) 神明열전

室 별을 관장하는 풍이(馮異) 神明 열전

 

 

 

  풍이는 다시 성벽을 굳게 하고 흩어진 병사들을 수습하고 여타 진영의 병사 수만 명을 불러모아 적과 싸울 것을 기약하였다.

  풍이는 건장한 병사에게 적미족과 똑같이 변장하고서 길옆에 매복해 있으라고 하였다. 그 다음날 아침, 적미족은 병사 만여 명으로 하여금 풍이의 선봉대를 공격하게 하였는데 풍이는 병사를 조금만 내보내서 그들을 구조하였다.

  적들은 풍이의 세력이 약하다고 판단하고 모든 군대를 동원해 풍이를 공격하니 풍이도 병사를 풀어 크게 싸웠다. 해가 기울자 적병들은 기운이 떨어졌다. 그 틈에 복병들이 갑자기 일어나 옷이 서로 섞었으나 적미족은 식별을 하지 못하고 군대가 마침내 당황하여 무너졌다. 풍이는 추격하여 효저에서 그들을 대파하고 남 · 여 8만 명의 항복을 받았다.

  나머지 군사도 10여만 명이 있었으나 동쪽으로 의양(宜陽)으로 패주하여 항복하였다. 왕은 편지를 내려 풍이를 위로하면서 말하였다.

  『적미족을 깨뜨리고 평정시켰으니 병사들이 수고로웠소. 처음에는 비록 회계(回谿)로 도망갔었으나 마침내는 면지(冕池)에서 분연히 일어났으니 아침에 잃었다가 저녁에 다시 찾아 거두었다고 할만하오. 공을 논하여 상을 내려 큰 공훈에 답하리라.』

  그때 적미가 비록 항복했다고는 하나 도적들은 여전히 성하였다.

  연잠(延岑)은 남전(藍田)에 근거하고 왕흠(王歆)은 하규(下邽)에 근거하고 방단(芳丹)은 신풍(新豊)에 근거하고 장진(蔣震)은 패릉(覇陵)에 근거하고 장한(張邯)은 장안(長安)에 근거하고 공손수(公孫守)는 장릉(長陵)에 주둔하고 양주(揚周)는 곡구(谷口)에 주둔하고 여유는 진창(陳倉)에 근거하고 각굉(角閎)은 연(연)에 주둔하고 임랑(任良)은 호에 근거하고 여장(汝章)은 회리에 근거하여 각각 장군이라 사칭하면서 병사가 많은 자는 만여 명이었고 적은 자는 수천 명으로 돌아가면서 공격하였다.

  풍이는 한편 싸우고 한편 행군하면서 상림원(上林苑)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연잠은 적미가 깨져 버리자 스스로 무안왕(武安王)이라 칭하고 목수(牧守)를 배치하였으며 관중(關中)에 근거하면서 장한(張邯)·임랑(任良)과 함께 풍이를 공격하려고 하였다. 풍이는 그들을 격파하여 천여 명의 목을 베자 여러 진영·요새에서 연잠에 붙어 지키던 사람들이 모두 와서 항복하고 풍이에게 귀의하였다.

  연잠은 도망했다가 석(析)을 공격하였는데 풍이는 복한장군(僕漢將軍) 등엽(鄧曄)·보한장군(輔漢將軍) 우광(于匡)을 보내 연잠을 공격하게 하여 그를 대파하였다.

  또한 그의 장수 소신(蘇臣) 등 8천여 명의 항복을 받았다. 연잠은 마침내 무관(無關)에서 남양(南陽)으로 달아났다. 그 때는 백성들이 굶주려서 사람을 잡아먹고 황금 한 근은 콩 다섯 되와 맞바꾸었다. 길은 막히고 군수품은 이르지 않아 병사들은 모두 나무열매로 끼니를 때웠다.

  왕은 명령을 내려 남양(南陽)의 조광(趙匡)으로 하여금 우부풍(右扶風)이 되어 병사를 이끌고 풍이를 돕게 하고 아울러 비단과 곡식을 보내니 군(軍) 중에서는 모두 만세를 불렀다.

  풍이는 군량이 풍족해지자 호족 가운데 명령에 따르지 않았던 자들은 주살하거나 벌을 주고, 항복한 사람 가운데 공로가 있는 자는 포상하여 주었으며 그들의 우두머리는 경사(京師)로 보내고 군대를 해산시켜 본업에 돌아가도록 하였다. 풍이의 위의는 관중(關中)에 널리 펴졌다.

  그러나 여유(呂鮪)·장한(張邯)·장진(蔣震)은 사신을 보내 촉(蜀)에 항복하였고 그 나머지는 모두 평정되었다.

  그 다음해 공손술(公孫述)은 장수 정언(程焉)을 파견해서 수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여유에게 나아가 진창(陳倉)에서 주둔하도록 하였다. 풍이는 조광(趙匡)과 그들을 맞아 싸워 대파하니 정언은 한천(漢川)으로 패주하였다. 풍이는 그들을 추격하여 기곡(奇曲)에서 싸워 다시 대파하고 돌아와 여유(呂鮪)를 격파하니 요새에서 항복하는 자가 대단히 많았다. 그 후, 촉(蜀)에서는 여러 차례 장수를 파견해 출병하였으나 풍이는 그때마다 그들을 꺾어 버렸다. 백성들을 품어주고 억울한 사건들을 해결해 주니 드나든 지 3년 만에 상림(上林)에는 귀화하는 자가 도읍을 이룰만 했다.

  풍이는 너무 오래 변방에 있어서 스스로 편안치 않았다. 그래서 조정을 생각하여 임금 가까이에 있고 싶다고 글을 올렸으나 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 뒤에 어떤 사람이 장(章)을 올려 말하기를 『풍이가 관중(關中)에서 권력을 휘둘러 장안(長安)의 현령을 목베고 그의 권위가 대단히 강해서 백성들이 그에게 귀의하여 그를 「함양왕(咸陽王)」이라 부른다』고 하였다. 왕은 사신을 보내 그 장(章)을 풍이에게 보여주었다. 풍이는 놀랍고 당황하여 사죄하는 글을 올렸다.

  『신은 본래 유생(儒生)으로 다행히 명(命)을 받을 기회를 만나 왕의 군대에 몸담게 되어 사사로운 은혜를 과분하게 받고 대장이 되고 제후로 봉직을 받았습니다. 임무를 받아서 미미하나마 공을 세우게 된 것은 모두 주상께서 염려해 주신 덕분이지 우매한 제가 미칠 수 있는 바는 아니었습니다. 신이 엎드려 생각하기에, 왕의 명령을 받고 전공(戰功)을 세우는 것은 매번 뜻대로 되었으나 때로 제 마음대로 결단하는 것은 후회해 보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주상의 탁월한 식견을 접한 지가 오래될수록 더욱 멀어져서 이제야 「성(性)과 천도(天道)는 얻어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병사를 처음 일으키던 어지러운 때에는 호걸들이 서로 다투어 사람을 미혹케 하는 자가 천을 헤아렸습니다. 신은 다행히 주상을 만나 성스러운 주상의 명견(明見)에 몸을 위탁하였습니다. 그러한 위급하고 어지러운 중에서도 감히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았거늘 하물며 천하가 평정되고 상하의 질서가 잡힌 지금, 신이 왕께 받은 작위가 높고 높아 헤아릴 수 없지 않습니까? 진실로 바라는 것은 왕의 칙명에 삼가 따라서 봉록을 죽을 때까지 다할까 하는 것뿐입니다. 신에게 보여주신 장(章)을 보니 두렵고 떨리는 마음뿐입니다. 엎드려 생각하는 것은 밝으신 주상께서 신의 우매함을 알고 계시어 이 기회에 두서없이 변명하는 것입니다.』 왕은 답장하기를 『장군은 짐에게 있어서 의(義)로는 군신(君臣) 관계이고 은혜로는 부자(父子)지간이다.

  무엇을 걱정 근심하며 두려워하는가?』라고 하였다.

  건무 6년 봄, 풍이는 경사(京師)로 왕을 조견(朝見)하였다. 광무제는 공경들에게 말하였다.

  『이 사람은 내가 병사를 일으킬 때의 주부(注簿)였다. 나를 위해 온갖 고난을 겪고 관중(關中)을 평정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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