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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22년(1992)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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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속의 역사인물 소개 : 이윤(伊尹)

이윤(伊尹)

 

「이윤(伊尹)이 오십이지사십구년지비(五十而知四十九年之非)를 깨닫고 성탕(成湯)을

도와 대업을 이루었나니 제 도수(度數)에 돌아닿는 대로 새 기틀이 열리리라.」

 

                             

  姜相年 <연구위원>

 

  중국 역사에 있어서 태평시대라고 하면 생각나는 것이 요순시대이다. 그 뒤 우(禹)가 왕위를 물려받아 이끌어 가다가 우의 아들 계(啓)에 이르러 세습 왕조 체제로 바뀌어 하왕조(夏王朝)가 이어진다. 

  하왕조 17대에 와서 걸왕(桀王)은 매희(妹喜)라는 절세 미녀에 빠져 폭정을 폈기 때문에 은(殷)의 탕왕(湯王)에게 멸망하였다. 이윤은 걸을 망하게 하고 탕을 도와 왕도정치를 펴서 은나라를 부흥시킨 훌륭한 재상(宰相)이다. 그럼 후세에 명재상으로 이름을 남긴 이윤은 어떤 인물인가?

  이윤의 본명은 지(摯) 혹은 아형(阿衡)이다. 이윤은 본래 유신씨(有辛氏)의 들에서 농사를 지으며 자기의 재능을 숨기고 산야에 묻혀 살았다. 탕이 그의 현명함을 알고 사람을 보내어 맞아들이려 하였으나 쉽게 응하지 않았다. 탕은 세 번이나 사신을 보내어 예를 갖추어 청한 후에야 비로소 부름에 응하였다.(史記, 書經)

  「여씨춘추(呂氏春秋)」나「열자(列子)」에는 이윤의 출생 경위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윤의 어머니는 이수(伊水)가에 살고 있었다. 거기서 이윤을 잉태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꿈에 신령이 나타나 말하기를

  『만약 이수에 절구통이 떠내려오거든 너는 그것을 보는 즉시 동쪽을 향하여 달리되 절대로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였다. 이튿날 이수에 가보니 과연 절구통이 떠내려오는지라 그녀는 무조건 동쪽으로 달렸다.

  10리쯤 달리고 나서 이제는 괜찮겠지 하고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 순간 마을은 완전히 물바다로 변했고 그녀는 속이 빈 뽕나무로 변해 벼렸다. 뽕을 따러 온 여인이 뽕나무 속에 어린아이가 있는 것을 발견하였는데 이 아이가 이윤이라는 것이다.

  이 이상한 아기를 유신국(有辛國)의 왕에게 드렸는데 임금은 이 아기를 주방책임자에게 맡겨 기르도록 명하였다. 이윤은 요리 솜씨가 뛰어났으며, 이로 인하여 탕으로부터 인정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탕은 걸이 학정을 일삼는 것을 보고 이윤 같은 사람이 걸을 보좌하면 나라가 올바르게 다스려 질 것이라 믿고 이윤을 걸에게 보냈지만 걸은 『선관(膳官-궁궐 안의 주방을 맡은 관리) 주제에 무슨 참견이냐』하며 들은 척도 아니하여 이윤은 매번 다시 돌아와야만 했다.

  날이 갈수록 걸이 나라 일에는 관심이 없고, 매희라는 여자에 빠져 궁중에는 수풀처럼 많은 고기를 쌓아 놓고, 못을 파서 거기다 술을 가득히 부어 배를 띄워서 즐겼다고 한다. 나라 형편이 점점 피폐해지자 충신 관룡봉(關龍逢)이 간언을 하였지만 처형을 당하였다. 이를 지켜본 이윤은 마음을 바꾸어 탕한테 충성하기로 결심을 하였다.

  혹은 이런 이야기도 있다. 어느 날 술 취한 사람이

  『왜 박으로 가지 않는가? 왜 박으로 가지 않는가? 박은 크기만 한데 깨어나라! 깨어나라! 나의 운명은 이미 결정되었다네. 암흑을 버리고 광명을 찾을거나 무엇이 걱정이란 말이냐!』(주‥여기서 박은 은나라의 수도)라는 노래를 하기에 이제까지 자기가 걸왕을 섬겨 온 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깨닫고 훌륭한 재상이 되어 탕을 도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걸왕의 횡포가 나날이 심해지자. 민심이 떠나 버린 것을 알아차린 탕은 이윤의 덕으로 폭군 걸왕을 몰아 내고 천자의 자리에 올라 덕치(德治)에 힘을 기울여 왕도정치를 실현하였다.

  탕이 백성의 뜻을 받들어 걸왕을 칠 수 있었던 것은 천도(天道)에 따른 것이며 (天道敎桀於惡 天道敎湯於善(천도교걸어악 천도교탕어선)… 공사 3장 39절), 또한 이윤과 같은 현명한 재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상제님께서도 걸이 망하고 탕이 흥한 것은 이윤에게 있다고(桀之亡湯之興在伊尹(걸지망탕지흥재이윤)… 공사 3장 39절) 말씀하셨다.

  탕왕이 죽은 후 태자 태정(太丁)은 일찍 죽었으므로, 아우 외병(外丙)이 즉위했다. 2년 만에 외병이 죽고, 다시 그 아우 중임(仲壬)이 즉위했는데 4년 만에 죽으니, 태정의 아들 태갑(太甲)이 즉위했다.

  그러나 태갑은 어리석고 포악하여 조부인 탕왕의 법을 어기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일이 많았다. 그리하여 이윤은 그를 동궁(棟宮-별궁)에 가두었다. 태갑은 3년 동안 선왕(先王) 중임의 옷을 입고 나서 크게 깨달아 잘못을 뉘우치고 자신의 부덕함을 깨닫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이윤은 태갑을 은의 수도 박으로 모셔 왔다. 그로부터 태갑은 덕을 닦았으므로 제후들이 모두 잘 따랐다. 태갑이 얼마 후 죽자 그의 아들 옥정(沃丁)이 즉위하였는데 이윤이 죽은 것도 이때이다.

  이윤이 죽자 은나라에서는 그를 조상묘(祖上廟)에 배향하는 파격적인 은혜를 베풀었다. 이윤이 없었다면 은나라는 천자국이 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를 선조(先祖)의 사당에 배향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렇게 이윤이 탕임금을 도와 대업을 이루었던 내용이 상제님의 공사에서 도수로써 쓰여지게 된다.

  「전경」에『천지공사를 마치신 후 「포교 오십년 공부종필(布敎 五十年 工夫終畢)」이라 쓰신 종이를 불사르시고 종도들에게 가라사대 「이윤이 오십이지 사십구년지비 (伊尹 五十而知 四十九年之非)」를 깨닫고 성탕(成湯)을 도와 대업을 이루었나니 이제 그 도수를 써서 물샐틈없이 굳게 짜놓았으니 제 도수에 돌아 닿는대로 새 기틀이 열리리라.』 (공사 3장 37절) 『…문왕의 도수와 이윤의 도수가 있으니 그 도수를 맡으려면 극히 어려우니라.』 (공사 2절 16절)라는 구절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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