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너별 보기
   daesoon.org  
대순124년(1994) 2월

이전호 다음호

 

회보 1면 신앙의 대상 대순지침 천계탑 28수 신명의 생애 금강산이야기 24절후 신명의 생애 종단소식 대순문단 논단 24절후 소개 알립니다

논단 : 음양합덕(陰陽合德)은 상생의 대의(大義)

음양합덕(陰陽合德)은 상생의 대의(大義)

 

現代文明의 難題들 陰陽合德의 大巡眞理가 解結

二元論的 세계는 대립과 투쟁으로 점철 合德을 통해 창조적 통일과 승화 창출


                  

이상훈 <선무ㆍ성산방면>  

              
  사물의 질서를 일컬어 물리(物理)라고 하고 사유의 법칙을 이름하여 논리(論理)라고 한다. 그러므로 물리는 자연세계의 이법(理法)이고 논리는 생각의 원리이다. 그런데 인간의 삶은 자연과의 교호작용(交互作用)으로만 이루어진 것도 아니요, 또한 우리의 생각만으로 영위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논리와 물리의 세계를 넘어서 있는, 말하자면 전우주의 근본과 맞닿아 있는 매우 중요한 근원적인 영역이 있다고 여겨진다. 필자는 이것이 우리 대순에서 말하는 도(道)의 세계라고 생각한다.
  우리 대순(大巡)에서는 광구천하(匡救天下), 광제창생(廣濟蒼生)이라는 대의(大義)를 위해 음양합덕, 신인조화, 해원상생, 도통진경의 진리를 종교적 법리로 삼고 있다. 우선 필자는 이 중, 첫번째인 음양합덕(陰陽合德)의 사상에 대한 나름대로의 생각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수도자의 한 사람으로서 감히 도의 법리를 이러저러하게 해석한다는 것이 외람된 일이지만, 작은 생각이 모여 작은 깨달음이 이루어지고 바로 이렇게 모든 일이 시작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감히 펜을 들었다.
  사상사(思想史)라는 전체적인 시각에서 바라 볼 때,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눠진다. 그 하나는 사회를 대립적 질서의 투쟁과정으로 설명하는 방식으로서 필자는 이것을 이름하여 음양모순(陰痒矛盾)의 세계관이라고 부르고 싶다. 필자가 보기에 현대를 지배하는 서양적 세계관의 근본 특징이 바로 이런 음양모순의 이원적 세계관이다. 근세 이후 서양인들의 사고방식은 대체로 이원적이다. 다시 말해 세계는 물질과 정신, 남자와 여자,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 선과 악 등의 이원적인 요소로 나누어지며, 이들 사이에는 서로 교통할 수 없고 또한 따라서 환원 불가능한 이질(異質)적 구별이 전개된다.  그러므로 역사에서 대립과 투쟁은 필연적이다. 서로 대화가 불가능한, 통하지 않는 요소들끼리는 충돌이 불가피한 것이다. 그러나 인류의 지혜 속에는 이런 음양모순의 세계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세계를 바라 보는 또 다른 시각은 서로 다른 요소들끼리 조화를 통해 우주의 전체적 질서를 설명하는 방식이다. 필자가 보기에 바로 이런 세계관이 우리 대순에서 말하는 음양합덕의 세계관이다. 일단 음양모순에서의 이원적 음양관과는 달리 음양합덕에서의 음과 양은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님에도 불구하고 상호 배척하는 배타적 개념이 아니다. 서양과 대비해 예를 들어 보자. 서양에서 철학의 근본문제 중의 하나라고 말하는 물질과 정신의 대립을 보면, 여기서 정신을 포함하는 물질이라든가, 물질을 포함하는 정신이라는 생각은 자리 잡을 수 없다. 왜냐하면 정신을 포함하는 물질이라는 것은 이미 물질 개념에 모순되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필자가 보기에 대순의 양 개념은 이런 배타적 이질성을 갖지 않는다. 왜냐하면 음, 양 자체가 첫째, 무극에서 태극을 거쳐 나오는 개념이기에 동근성(同根性)을 가지며, 둘째, 합덕이라는 극적 어우러짐 즉 창조적 통일의 원리에 의해 뒷받침되기 때문이다. 음은 음 자체만으로 있을 수는 없으며, 양 또한 마찬가지다. 음, 양은 서로 어우러짐으로써만이 음이 음일 수 있고, 또한 양이 양일 수 있는 것이다.

  합덕은 사실 단순한 통일 이상의 의미, 즉 창조적 의미를 갖는 것으로 생각된다. 언뜻 보기에 합(合)은 나눠진 것이 있음을 전제로 사용할 수 있는 개념이다.
  그러나 덕의 합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덕은 합쳐도 그 사이에 나눠짐이 없이 하나가 된다는 뜻에서 진정한 통일을 기반으로 한다. 또한 덕의 합침은 단순한 산술적 누계(累計)가 아니라 질적 도약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갑이라는 사람이 의롭다, 덕이 두 배로 많다.』라고 말하지 않고 두 사람은 질적으로 다르다고 말한다. 이렇게 덕의 합침은 새로운 창조이자 질적으로 다르다고 말한다. 이렇게 덕의 합침은 새로운 창조이자 질적 승화인 것이다.
  따라서 필자가 보기에 대순의 음양햡덕의 원리는 그것이 음양에 토대하는 한, 오묘하게도 세계가 다양한 요소들의 결합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다원성(多元性)을 허용하는 개념이면서도, 또한 합덕에 의해 뒷바침됨으로써 이 다원적 요소들간의 배타성이 아니라 동근성을 바탕으로 한 상호교류와 창조적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놀라운 상생(相生)적 세계관의 뿌리이다. 그러므로 굳이 세속적인 표현을 빌린다면 이보다 더『매력』적인 개념이 어디 있을 수 있겠는가!
  필자가 보기에 대순의 첫 번째 종지로서의 이런 음양합덕 사상은 현대의 전세계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적극적 대안으로서 실천적 의미를 갖는다.

  서구화로 특정지어지는 현대 사회는 전(全)지구적 환경 문제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일반적으로 인간과 자연 사이에 대립이 설정되어 있고, 나아가 인간의 존엄성의 말살이라든지, 사회의 비인간화 같은 고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이 모두가 궁극적으로는 대립과 모순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데서 비롯한 것, 다시 말해 음양 모순적 세계관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은 음양합덕의 세계관은 <음양>이 <합덕>을 이룸으로써 바로 이런 현대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는 궁극적 대안으로서 탁월성을 갖는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고대 서양의 어느 현인이 어떤 책에선가『진리에 대한 추구는 경이로움에 대한 경배에서 출발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깊고 넓은 도(道)의 세계에서 보면 이제 출발점에 서 있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필자 역시도 음양합덕의 원리를 바로 그런 경외감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관련글 더보기 인쇄

Copyright (C) 2009 DAESOONJINRIHOE All Rights Reserved.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 강천로 882 대순진리회 교무부 tel : 031-887-9301 mail : gyomubu@daesoon.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