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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42년(2012)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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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典經』지명 답사 : 태인 관왕묘

태인 관왕묘

 

 

연구위원 신상미

 

 

 

  얼굴의 솜털을 간질이는 시원한 바람을 따라 전라도 태인에 이르렀다. 상제님께서는 전국 많은 곳을 다니셨지만 태인은 유독 상제님과 종도들의 숨결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전경』을 보면 도주님께서 감오득도하신 후 “왜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느냐. 태인에 가서 나를 찾으라.”라는 상제님의 명을 받고 태인에 오셔서 무극도장을 마련하셨다.01 그리고 상제께서 자주 태인에 머무셨던 것은 도창현(道昌峴)이 있었기 때문이고, 그곳에 신경원(辛京元) ⋅ 최내경(崔乃敬) ⋅ 최창조(崔昌祚) ⋅ 김경학(金京學) 등의 종도들이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02

  상제께서 도창현이 있기에 태인에 자주 머무셨다고 한 것을 보면, 도창현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지명인 듯하다. 도창현은 도챙이 고개, 돌챙이 고개라고도 하며 삼리(三里) 마을 동북쪽에서 독양(犢養) 마을로 넘어가는 항가산(恒伽山) 중턱의 고개를 가리킨다. 항가산은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 태흥리에 있는 야트막한 산으로 조선 시대에 사림(士林)의 소유지였으며 풍치가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항가산에는 한국불교태고종 소속 전통사찰인 다천사(茶泉寺)가 있으며, 1855년 태인 현감이 선비들에게 문학을 권장하기 위해 처음 세웠다는 읍원정(揖遠亭)과 조선 중기에 태인 현감 · 상주목사 등을 지낸 신잠(申潛, 1491~1554)의 사당도 있다. 또한 항가산 중턱에 중국 삼국시대 촉나라의 무장 관우(關羽, 관운장)를 모시는 관왕묘(關王廟)가 있었다. 관왕묘는 1831년(순조 31)03에 송석진(宋錫珍)이 세웠다는 설과 1891년(고종 28)04에 세웠다는 두 설이 있으며, 1980년 후반쯤에 없어졌다.

  이곳 관왕묘는 종도 신경언(辛敬彦)이 상제님을 따르기 전에 제원으로 있던 곳으로 비록 사라지고 없지만 우리가 알아두어야 할 곳 중의 하나이다. 『전경』에 상제께서 신원일을 데리고 신경언과 그의 가족에게 “관운장이 조선에 와서 받은 극진한 공대의 보답으로 공사 때에 반드시 진력함이 가하리로다” 하시고 양지에 글을 써서 불사르셨다는 부분이 있다. 그 후 이튿날 봉심할 때 관운장의 삼각수 한 갈래가 떨어져 간 곳이 없으므로 제원들이 괴상히 여겼는데 신경언은 상제께서 행하신 일이라 생각하고 공사에 진력하기 위하여 비록 초상으로도 그 힘씀을 나타내는 것이라 깨닫고05 상제님을 따르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 사라지고 없는 관왕묘는 읍원정 뒤편의 숲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즉, 읍원정의 주소가 정읍시 태인면 태흥리 152-2번지이고, 관왕묘의 주소가 정읍시 태인면 태흥리 152번지였다. 관왕묘를 지켰던 송석진의 자손인 송수현의 친구 박노환(69)씨를 통해 사라진 태인 관왕묘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06 송석진의 꿈에 관운장이 나타나서 “이곳에 사당을 세워라!” 하였기에 항가산 중턱에 자비로 관왕묘를 지어 자손 대대로 관리해 왔다고 한다. 그러나 후손 송수현이 전주 사람인 이의철에게 팔아 버렸다. 그 후에 이 소식을 들은 제원들이 다시 찾고자 전국 방방곡곡을 다녔지만 그 행방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박노환씨는 하마비(下馬碑)07만은 보존해야겠다는 생각에 관리하고 있다.

  제원들은 관운장의 영(靈)이 이곳에 계신다고 하면서 빈터에 찾아와 관운장의 생신일인 음력 6월 24일과 기일인 음력 10월 19일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젠 그 터마저 사라지고 당시에 믿었던 제원들도 돌아가신 분들이 많아서 발걸음이 끊긴 상태다.

 

 

 

  관왕묘가 사라지고 뒤이어 관왕묘가 있던 항가산의 일부분도 사라져 더욱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항가산의 일부분은 태인-원평간 도로건설공사 중 터널공사를 위한 발파작업으로 인해 사라진 것인데 마치 그 모습이 산을 크게 한입 베어 먹은 듯하다.

  관왕묘의 모습을 알 길 없었으나 박노환씨의 인터뷰와 자료들로 짐작이나마 할 수 있었다. 관왕묘의 입구에는 솟을대문08으로 되어 있었으며 입구 가운데는 신도(神道)라 하여 다니지 못하도록 창 두 개가 X자 모양으로 가로막고 있었다고 한다. 양 옆으로 있는 두 문의 벽화에는 장비(張飛)가 문을 지키듯 그려져 있었고, 대문 옆으로는 대대로 송씨의 장손들이 관리하며 살았던 초가삼간이 있었다고 한다. 관왕묘 건물은 기와 맞배지붕09, 정면 3칸에 측면 2칸으로 현판에는 ‘성제묘(聖帝廟)’라 적혀 있었다. 관성제군은 조각상으로 유리관에 모셔져 있었고 긴 수염에 붉은 옷을 입고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박노환씨는 『전경』에 나온 대로 관운장의 수염 중에 한 개가 없어진 것을 보았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고 하였다.

  상제께서 관운장이 조선에 와서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고 말씀하신 만큼 당시에는 관제신앙이 정말 활발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왕실에서 먼저 관제를 모시기 시작하였다. 조선 숙종 이후 영조, 정조 등의 왕들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관제신앙을 강조하였으며 특히 고종은 혼란한 정세에서 야기된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명성황후와 함께 개인적으로 무속적인 관제신앙에 더욱 심취하였다고 전한다. 고종이 황제로 등극한 이후 1902년에 관왕을 관제로 높이고 ‘현령소덕의열무안관제(顯靈昭德義烈武安關帝)’라는 시호를 내릴 정도였다. 임진왜란 시기에는 타의적으로 강요된 신앙이었기에 위정자들조차 믿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 후 한양에 동묘(東廟)와 남묘(南廟)를 창건하여 관운장의 제사를 모시는 등 적극적인 정책을 편 결과 민간에게도 관제신앙이 퍼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고종 대에 자신의 몸에 관제가 내렸다고 주장하는 무당이 많이 나타나 민간에 급속도로 퍼져 나간 것이라 한다.10

 『전경』 권지 1장 20절에서는 상제께서 관운장의 얼굴 모습으로 변신하시는 내용이 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관운장에 대해 상당한 호감을 느꼈으며, 제자들에게 관운장의 충의를 기리고 삶의 교훈으로 삼으라는 가르침을 내린 것으로 생각된다. 비록 상제님과 종도 신경언이 있었던 때의 관왕묘는 사라지고 없지만 우리에게 관제는 전쟁 때 무(武)를 과시하는 신격이 아니라, 삿된 기운으로부터 수도인을 보호하는 신격으로 신앙되고 있음은 변치 않고 있다.

 

 

 


01 교운 2장 7절.

02 행록 4장 6절.

03 『정읍시사 -上』, 정읍시사편찬위원회, 2003, p.167. 또는 임남곤, 『정읍향리지』, 정읍문화원, 2002, p.619.

04 『정읍문화재지』, 정읍문화원, 1999, p.550.

05 권지 2장 21절.

06 2011. 8. 4. 인터뷰.

07 그 앞을 지날 때에는 신분의 고하(高下)를 막론하고 누구나 타고 가던 말에서 내리라는 뜻을 새긴 석비(石碑)이다. 대개 왕장(王將)이나 성현, 또는 명사ㆍ고관의 출생지나 분묘 앞에 세워졌다.

08 좌우의 행랑채보다 기둥을 훨씬 높이어 우뚝 솟게 지은 대문.

09 건물의 모서리에 추녀가 없이 용마루까지 측면 벽이 삼각형으로 된 지붕.

10 『신종교연구』10집, 한국 신종교학회, 2004, pp.5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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