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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문화와 함께 읽는 전경 : 고부화액 시기의 의병 활동과 혐의

고부화액 시기의 의병 활동과 혐의



교무부 김현진



▲ 「한국에서의 소란」, 대한제국군과 일본제국군간의 전투, 프랑스 언론 《르 프티 주르날》에 실린 남대문 전투 (출처: 위키미디어)



  영화 <화평의 길>에는 고부화액을 겪으시는 상제님의 행적이 잘 그려져 있다. 고부화액 당시의 시대 상황을 보면 대단히 급박했던 때로, 무고한 많은 사람이 희생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던 시기였다. 이에 대한 대략적인 내용이 『전경』에 나타나 있다.


이튿날부터 고부 경무청은 심문을 시작하였느니라. 상제께 경무관이 “네가 의병이냐”는 물음에 가라사대 “나는 의병이 아니라 천하를 도모하는 중이로다.” 이 말씀에 경무관이 놀라 “그것이 무슨 말이냐”고 되묻기에 상제께서 “사람마다 도략(韜略)이 부족하므로 천하를 도모치 못하노니 만일 웅재대략이 있으면 어찌 가만히 있으랴. 나는 실로 천하를 도모하여 창생을 건지려 하노라”고 이르시니라. 경무관은 상제의 머리를 풀어헤쳐 보기도 하고 달아매는 등 심한 고문을 가한 뒤에 옥중에 가두고 다른 사람은 문초도 받지 않고 옥에 갇혔도다. 여러 사람들이 상제를 원망하기 그지없었도다.
때마침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일병과 충돌하였도다. 의병을 가장하여 노략질하는 비도도 있었으므로 의병의 혐의로 체포된 자는 시비를 불문하고 총살되었으니 모든 종도들이 의병의 혐의에 공포를 느끼고 벌벌 떨고 있었도다.
(행록 3장 58절)


  위 구절을 보면 심문을 시작할 때 경무관이 ‘의병이냐’고 묻는 것은 의병인지 아닌지가 매우 중요한 문제였던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를 말해주는 것이다. 경무관의 질문에 상제님께서 “천하를 도모하는 중이로다”라고 하시자 더 심하게 고문을 가해 의병 혐의에 대한 진술을 받으려 했던 상황으로 보인다. 이때는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일본군과 충돌하였고 의병이나 동조자로 의심받은 사람들이 일본군에 의해 총살당하던 시기였다. 고부화액 때 투옥된 종도들이 의병 혐의에 공포를 느꼈던 것은 이러한 시대 상황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고부화액과 비슷한 시기에 발생한 전라북도에서의 의병 활동과 일본의 대응을 간략히 알아보고, 의병 혐의를 받는다는 사실이 얼마나 위험한 일이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본문에서는 이해의 편의를 위해 고부화액이 음력 1907(정미)년 12월 25일부터 1908(무신)년 2월 4일까지의 일이지만,01 역사적 자료가 모두 양력으로 기술되어 있어서 양력 1908년 1월 25일부터 3월 6일까지의 시기로 보고 글을 전개하였다.



정미의병
  고부화액을 전후로 일어난 의병 항쟁은 1907년 8월부터 1910년 사이에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정미의병이다. 정미의병의 봉기는 일본이 대한제국의 행정권, 입법권, 군사권을 강탈하는 것에 대항하여 일어났다. 사건의 시작은 1907년 6월에 있었던 헤이그 특사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일본은 이를 빌미로 7월에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행정권과 사법권을 장악하는 한일 신협약(정미 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뒤, 8월에는 대한제국 군대(약 8,000여 명)를 모두 해산시켜 군사권까지 장악하였다. 이에 분노한 대한제국의 양민과 해산당한 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하여 의병 항쟁에 참여하였고, 이는 삼남 지방(충청도, 전라도, 경상도)과 황해도 등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일본의 국권 침탈에 대항하여 일어난 정미의병은 을미의병(1895년), 을사의병(1905~1906년)과 달리 의병 전쟁이라 할 만큼 아주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 1907년 영국인 종군기자 맥켄지가 양평군 지평 인근에서 촬영한 의병대 모습: 『The tragedy of Korea』 (1908년에 뉴욕에서 발간 된 책) p.207, 사진: 맥캔지(F. A. McKenzie) / 자료출처: 위키미디어



  고부화액이 일어나기 한 달여 전인 1907년 12월에는 전국의 의병장들이 경기도 양주에서 ‘13도 창의군’을 결성하고 10,000명(대한제국 육군 출신 의병 3,000명 포함)의 병력을 집결하여 1908년 1월에 ‘서울 진공 작전’을 추진하기도 하였다.02 하지만 작전이 성공하지 못하자 의병장들은 퇴각을 결정하고 연고지로 돌아가 독자적으로 항쟁을 이어갔다. 정미의병은 유생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던 을미의병ㆍ을사의병 때와 달리 해산된 군인들이 함께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기와 병력의 편제가 정예화되어 전투력이 크게 향상되어 있었다. 특히 상인ㆍ공인ㆍ노동자ㆍ농민 등 전 계층의 적극적인 지지와 참여로 전국적인 항일전을 전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객관적인 군비 면에서 칼, 창, 화승총 등 재래식 무기를 사용하는 의병은 38식 소총, 기관총 등의 최신식 무기를 사용하는 일본군에 비해 절대적으로 열세였다. 특히 일본은 대한제국을 무력으로 장악하기 위해 이미 ‘주차군’이라 하여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었는데 병력은 2개 사단의 규모로 총 18,400여 명이었다. 그리고 고종 퇴위 반대 시위가 1907년 7월 9일 종로에서 일어나자, 본국에 즉시 연락하여, 23개 사단 중 최강이라는 제12여단 5,800여 명을 긴급히 더 증파한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의병들은 더욱더 전력의 열세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03



전국에서 의병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전라도
  전국적으로 활발히 일어났던 의병 활동 중에서 특히 상제님께서 계셨던 전라도는 의병들의 전투가 가장 치열하게 전개된 곳이었다. 1908년까지 일본군과 의병의 교전 수를 보면 전국적으로 제일 많았으며 활동 인원도 가장 많았다. 1906년부터 1910년까지 의병들이 재판받은 건수를 보더라도 전라도가 403건으로 전체 지역의 44.04%를 차지하였다.04  


[지도1] 전라북도 의병 활동 지역



  호남 지역에서 많은 의병이 활동할 수 있었던 데에는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의 역할이 컸다. 호남창의회맹소는 1907년 10월 기삼연(奇參衍, 1851~1908)이 참여했던 일심계(一心契)라는 계 조직과 장성(長城)의 유림이 연합하여 만들어졌다. 그들은 지역별로 의병을 모집하여 연합부대를 만들었고 이들의 영향을 받은 인사들도 독자적인 의병을 일으켰다. 호남창의회맹소는 일본군과의 전투뿐만 아니라 미곡 유출 방지, 외래품 판매 금지, 납세 거부 등의 항쟁을 병행하여 일본에 타격을 가하였다.05 이들의 이러한 활동은 1908년∼1909년 호남 지역이 의병 항쟁의 중심 무대로 떠오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고부화액(1908년 1월~3월)의 배경이 된 전라북도에서 활동한 의병장들로는 이규홍, 이석용, 전해산, 김동신, 양진여, 박도경, 양윤숙 등이다. 이들은 호남창의회맹소와 협력관계를 유지하며 정보를 공유하고 있었다. 의병장들의 활동 시기와 지역, 규모는 [표 1]과 같다. 활동 시기를 보면 대부분 1907년 8월 이후부터 1909년 사이로 고부화액이 있었던 때를 포함하며 의병 수는 최소 300명에서 최대 1,200명 정도였다.06 [지도 1]에서 와룡리는 상제님과 종도들이 체포된 장소이고 고부 경무청은 수감되었던 곳이다.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전라북도 일대에서 활동한 의병들은 주로 산간 지역을 중심 근거지로 삼았다. 회문산 인근인 태인 행단에서 일어났던 시천교인 사건(1908년 9월 11일)07도 양윤숙08이 회문산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을 때 일본군에 의해서 벌어진 일로 보인다. 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 의병장들의 활동 시기와 지역을 표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907년 8월을 전후로 호남창의회맹소를 비롯한 의병 항쟁이 활발하게 일어나자, 일본은 1907년 10월 초에 1개 기병 연대 약 700여 명을 추가로 전라도에 주둔시켰다.09 이에 대항하여 당시 의병들은 일본군과의 전력 차이를 효과적인 전술로 극복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산간지대를 중심으로 지역민들의 지지와 보급을 받아 가며 유격 전술을 전개했다. 의병들은 산간지대와 평야 지대를 오가며 동에서 공격하여 서로 이동하고, 남에서 공격해서 북으로 이동하는 기동전을 펴며 일본군과 교전을 벌였다.
  한편 의병을 가장한 비도(도둑 무리)도 기승을 부렸는데 이들은 의병을 지지하는 지역민들을 속이고 피해를 입혀 민심을 이반시켰기 때문에 의병들은 이들과도 싸워야 했다. 비도가 의병을 가장하여 약탈한 사실은 전라남도 경무과에서 생산한 기록(1913년)에서 확인할 수 있다.


본도(전라남도: 필자 주)에서 봉기한 폭도사실을 적음에 있어 편의상 이를 3기로 구분한다.

제1기 광무 10년 1월부터 융희 원년 12월까지
제2기 융희 2년 1월부터 동년 12월까지
제3기 융희 3년 1월부터 동년 12월까지

  제1기의 대표적 거괴는 최익현(崔益鉉) 고광순(高光洵) 기삼연(奇參衍) 등이며, 모두 명문 벌족 출신으로 경서나 사기에 통달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최익현 같은 사람은 가장 뛰어난 인물이다. 제2기에 이르러서는 이따금 놀고먹는 무리들이 사욕을 채우기 위해 의병의 미명을 빌어 약탈을 하는 자가 있었다. 이 기의 대표적 거괴는 김태원, 김율 형제다. 제2기의 후반기에서 제3기에 걸쳐서는 의적과 화적이 이리저리 몰려다녀 편안한 날이 없었고 백성들은 잠시라도 안심할 수 없었다. 이 기의 대표적 거괴는 전해산, 심남일, 안계홍의 세 사람이다.10


  위 기록은 일본의 입장에서 썼기 때문에 제1기인 1906년~1907년에 당시 활동했던 유명한 의병장들을 거괴(巨魁)로 표현하고 있다. 이 시기에는 비도가 활동한 기록은 없지만 제2기인 1908년(융희 2년)부터 제3기인 1909년(융희 3년)에 걸쳐 의병을 사칭하여 노략질하는 비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전해산이 의병 활동을 하며 1908년에 기록한 『전해산진중일기』에도 1909(기유)년 윤달 2월 15일에 “피를 흘리는 아이가 찾아와 북포(北布)를 팔아 번 돈을 가짜 의병에게 빼앗긴 것에 대하여 전수용(전해산)에게 그들을 잡아 벌하고 돈을 찾아 주기를 요청하였고 전수용은 허락하며 이범진을 보냈다.”11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비적들의 약탈은 민심을 교란하여 의병 활동을 방해하는 심각한 장애 요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대응
  국권 침탈에 대항하여 일어난 의병들의 항쟁에 대하여 일본은 무자비한 탄압으로 대응하였다. 특히 상제님께서 계시던 전라도는 전국에서 의병의 수도 제일 많고 조직적으로 가장 격렬히 활동하던 곳이었기에 탄압이 집중되었다. 의병에 대한 일본군의 대응은 의병과의 전투뿐만 아니라 활동 지역 일대에 있던 양민들까지 의병 혐의로 몰아 학살하는 지경이었다. 사례를 보면 1907년 충북 제천에서 의병들이 일본군의 연락망을 훼손하기 위해 전신주를 뽑자, 일본군은 마을 사람들이 보고도 막지 않았으니, 의병과 같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붙여 집안을 휘젓고 다니며 물건을 빼앗고 불을 질렀다. 이때 일본군은 집이 불타는 것을 막으려던 노인을 쏘아 죽이기도 하였고, 한 젊은이가 들판에서 풀을 베고 있는 것을 보고 그를 의병이라 칭하며 총을 쏘아 죽였다.12 당시 일본군은 의병 진압을 위해 경기 이천에서 충청 제천을 거쳐 강원 원주까지 이동하였는데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불타 황폐해진 마을만이 남았다고 한다.


▲ 호남지역 의병장들: 일본군이 만든 『남한대토벌 기념사진첩』에서 발견된 체포되었던 호남지역 의병장들의 모습



  이러한 일본군의 행태는 『전해산진중일기』에도 나타난다. “일병이 한인 3명을 총살했는데, 그 3명 안에 1명은 본동 거 노부로서 산에 올라가 땔나무를 모으는 것을 죽였고, 1명은 9세의 어린아이로서 땔나무를 옮기기 위해서 산에 오르는 것을 탄환이 다리 부분에 명중하여 거의 빈사의 몸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1908년 9월 29일 자에도 “의병 조경환이 순사대장을 죽이자 왜놈이 독을 부려 거문돌 윗 마을에 불을 지르고 사람들을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다.13
  1908년 초반의 고부화액 시기에 일본이 어떤 만행을 자행하였는지에 대한 직접적인 자료는 없지만 1907년 여름과 1908년에 일본군이 저지른 작전들은 의병을 진압하는 군사 작전의 일관된 형태로 보인다. 일본군은 양민과 의병을 가리지 않고 죽여서 사람들로 하여금 공포에 떨게 하는 심리전을 전개하였다.14



  이렇듯 상제님께서 고부화액을 겪으시던 시기는 반일 감정이 한껏 고조되어 전국적으로 격렬한 항쟁을 벌이던 시기였다. 국권을 침탈하려는 일본군은 학살에 가까운 탄압을 자행하였고, 이 시기에 의병 혐의로 체포된다는 것은 목숨을 위협받을 만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상제님을 따랐던 종도들도 의병 혐의라는 말에 벌벌 떨며 공포에 휩싸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상제님께서 “비록 몇십만 인이 이러한 화액을 당하였을지라도 일호의 상처가 없이 다 풀리게 할지니 조금도 염려 말라”15 하신 말씀과 같이 모두 무사히 풀려나왔다. 사실 당시 기록을 보면 의병 혐의를 받고도 무혐의로 풀려나는 비율은 1.31%에16 불과할 정도로 어려운 일이었으니 가히 기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01 행록 3장 55절을 보면 고부화액은 1907년 12월 25일에 시작되고, 64절에서는 다음 해 2월 4일 경칩일(驚蟄日)에 상제님께서 의병 혐의가 풀려 출옥하시는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02 「십삼도창의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03 이용창, 「일진회와 자위단의 의병사냥」, 『내일을 여는 역사』 30 (2007), p.221 참조.
04 김항기, 「1906~1910년간 일제의 의병 판결실태와 그 성격」, 『한국독립운동사 연구』 61 (2018), p.20 참조.
05 「호남창의회맹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06 국사편찬위원회, 「신편한국사, 호남의병-전북」, https://db.history.go.kr/.
07 행록 3장 18절 참조.
08 양윤숙은 최익현이 순창에서 의병을 일으켰을 때 그의 부대에 참가하였고 추후 회문산에서 독자적으로 의병을 조직하여 일본군과 교전하고 남원수비대를 기습하기도 하였다.
09 이용창, 앞의 글, p.221 참조.
10 이일용, 『비록 한말전남의병전투사』, (광주: 전남일보인서관, 1977), pp.8-9 재인용.
11 은혜주 「『전해산진중일기』와 『일본군 보병 제14연대 진중일지』의 비교분석을 통한 해산 전수용의 의병 활동 재구성」 (동아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18), p.28.
12 F. A. 메켄지, 『대한제국의 비극』, 신복룡 역주 (서울: 집문당, 1999), p.176 참조.
13 은혜주, 앞의 글, pp.9-11.
14 일본군은 사형에 해당되는 내란죄를 적용하거나 강도죄에 다른 죄까지 과중히 부과하여 최소 10년 이상의 징역을 살게 하는 무거운 벌을 내리는 부당함을 보였다. 김항기, 앞의 글, p.25.
15 행록 3장 61절.
16 김항기, 앞의 글,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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