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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43년(2013)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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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고전 산책 : 『노자(老子)』

『노자(老子)』

 

 

연구원 전성기

 

 

 

  현대인은 바쁜 일상과 넘쳐나는 지식과 정보, 그리고 물질만능주의로 대변되는 사회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이러한 삶은 오히려 올바른 인간의 본성이 가려지기 쉽고 삶의 진정한 가치를 망각하게 한다. 그러므로 일상의 틀에서 잠시 물러나와 물리적 에너지의 재충전과 더불어 자신의 본 모습을 돌이켜 보고 세상의 진정한 가치를 찾는 시간을 갖는 것도 의미 있을 것이다.
  여기에 적합한 동양의 고전이 『노자(老子)』 인 듯하다. 『전경』에도 “고현(苦縣),”01 “복중팔십년신명(腹中八十年神明),”02 “무위이화(無爲而化)”03 등과 같이 노자와 관련한 구절들이 등장한다. 따라서 노자가 지은 유일한 서물(書物)이 『노자』라는 점에서 이 책에 대한 대략적인 이해는 대순진리회 수도인들에게도 나름대로 가치가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1. 노자(老子)라는 사람 


  노자는 『노자』라는 책을 지은 사람 이름이고 ‘노담(老聃)’이라고도 불린다. 노자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기도 하지만, 그가 지은 『노자』라는 책이 일관된 논리구조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동일인의 저술로 보이고, 판본들이 실존하고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비롯한 사가의 기록들과 정황으로 보아 실존인물로 봐야 할 것이다.
  노자의 생존연대는 춘추 중기인 기원전 570년 무렵부터 전국 초기인 기원전 470년 무렵까지였고, 공자보다 10에서 20여 세 연장자로 추정된다. 그는 초(楚)나라 고현(苦縣)04 여향(厲鄕) 곡인리(曲仁里) 출신이다. 성은 이(李)씨, 이름은 이(耳)이고 자(字)는 백양(伯陽)으로 썼으며,05 시호를 담(聃)으로 하였다. 노자라는 호칭의 ‘노(老)’는 꼭 성씨가 아닐 수도 있고, 오래 살고 생각이 아주 노숙해서 ‘늙은이’라는 칭호로 쓴 것일 수 있다.06 
  공자(孔子)가 주(周)나라에 가서 노자에게 예를 물은 적이 있고 주나라 황실 도서관의 책임자였다고 하니, 노자는 인문주의적인 주나라 예법의 대가이고 상당한 지식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들인 종(宗)이 위(魏)나라 장수가 되어 은간(殷干)이라는 직위에 봉해졌다는 일설로 보아 지위가 높은 집안 출신으로 보인다.
  그는 주나라에서 오랫동안 살다가 주나라가 쇠망함을 보고 그곳을 떠났고 함곡관(函谷關)에 도달했을 때 뜻이 맞는 관문 수비대장 윤희(尹喜)를 만났는데, 글을 남겨 달라는 그의 청을 받고서 저술을 남기게 된다. 그 책이 『도덕경』 상·하 두 편이었으며 도(道)와 덕(德)에 관해 5천여 자로 되어있다고 한다. 그 후 그가 어디로 갔는지는 아무도 모르며 죽을 때는 산에서 신선이 되어 사라졌다는 설이 있다.
  노자는 중국 고유종교인 도교에서 신앙의 대상인 태상노군(太上老君)으로 받들어지게 되었고, 노자의 도가 사상이 없었다면 찬란한 중국 전통문화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을 정도이다. 그러므로 노자는 중국의 전통문화를 수립하는데 상당한 영향력을 끼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 녹읍 태청궁 앞 노자상 뒤편 벽화. <함곡저서> : 함곡관의 수문장인 윤희의 청에 의하여 써준 것이 『도덕경』이다.

 


2. 『노자』라는 책

 

  『노자』는 노자가 지은 책의 이름이다. 이는 판본이 여러 개 있고, 각 판본의 실제 저자는 노자 외에 노자의 사상을 계승한 후학들이 더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여기서는 중요한 판본 몇 개를 소개하고자 한다.    
  우선 현재까지 발견된 노자의 판본 중 저작 시기가 가장 빠른 것은 죽간본(竹簡本)07 『노자』이다. 이는 지난 1993년 중국 호북성(湖北省) 형문시(荊門市) 곽점(郭店) 1호 초묘(楚墓: 초나라 때 무덤)에서 발견된 갑·을·병의 세 가지 판본으로 되어 있다. 이 무덤의 주인은 초나라의 귀족으로, 매장 시기는 기원전 310년 무렵으로 추정되어 『노자』는 이미 그 이전에 존재했다는 것이 된다.
  죽간본은 모두 1,807자이니 5,200여 자로 된 통행본(通行本)08 『노자』의 5분의 2에 약간 못 미치는 셈이지만 그 자체로서 모든 내용이 온전히 갖추고 있는 판본으로서 『노자』의 원본에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저자는 노담으로 추정된다.
  둘째로는 백서본(帛書本)09이다. 이 판본은 1973년 호남성(湖南省) 장사(長沙) 마왕퇴(馬王堆) 제3호 한 묘(漢墓: 한나라 때의 묘)에서 발견된 갑본과 을본 두 개의 판본으로 된 『노자』를 말한다.
  갑본은 을본과 달리 한 고조 유방의 이름 방(邦)자를 피휘(避諱)10 하지 않고 그대로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한 고조 이전의 통행본을 베끼어 쓴 것이 분명하다. 을본은 예서체(隸書體)로 필요한 것만 뽑아 썼고, 유방(劉邦)의 이름인 방(邦)자와 함께 영(盈)자와 항(恒)자를 피휘 하였다. 따라서 을본은 한나라 혜제 이후에 만들어진 판본이다.11 저자는 태사담(太師儋, 생몰연대는 미상)일 가능성이 높다. 
  백서본의 특이한 점은 덕편(德編)이 앞에 있고 도편(道編)이 뒤에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편명(編名)이 경(經)이 아니고 편(編)이라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저작시기가 아직 『노자』가 경(經)의 위치에까지 오르지 않은 때였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는 반고(班固, 32~92)가 지은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수록된 『노자』에 관하여 전술한 문헌들이 여러 개 있다. 그리고 현행본으로는 부혁본(傅奕本)과 하상공본(河上公本)과 왕필본(王弼本)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왕필본은 위진시대 왕필12이 지은 것으로서, 가장 유명한 『노자』의 주석서(註釋書)13이다. 오늘날 전해지는 『노자』는 왕필본이다. 왕필이 주(註)를 달았다고 하여 『노자 왕필주』라고도 하며, 일반적으로 『노자도덕경』 내지는 『도덕경』이라고 알려진 저작이다.

 

▲ 가학서거 : 학을 타고 서쪽(죽음을 비유)으로 가다. (승선했다.)

 


  왕필이 현리(玄理: 매우 오묘하고 깊은 이치)의 측면에서 노자 사상을 가장 체계적으로 잘 밝혀서 사대부가 왕필노자주를 선호하였기 때문에 위진시대의 새로운 도가(道家)의 수장(首長)으로서 그가 지은 『노자 왕필주』가 가장 권위 있는 노자주(老子註)가 되었다. 그 이후 통행본으로서 수천 년 동안 가장 널리 읽혀 왔기 때문에 『노자』의 많은 주석서 가운데 왕필의 주석서가 가장 권위 있는 『도덕경』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을 것이다.
  『노자』는 고금을 막론해서 가장 많은 번역과 주석서가 나온 동양의 고전이다. 『노자』의 저작자와 저작시기에 대한 많은 논란은 대체로 동양역사의 근거자료의 기본이 되는 사마천의 『사기』 「노장신한열전(老莊申韓列傳)」 중의 뒷부분에 사마천이 이의전의(以疑傳疑)14 라고 한 기록에서 연유한 것으로 생각된다. 바로 이 구절을 믿고 연구자들이 『노자』에 관련된 고문헌을 발견하면 먼저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고 자신의 학설을 펴왔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상에서 볼 때 죽간 『노자』의 저자는 공자의 선배였던 노담으로서 늦어도 전국 초에는 그 책이 세상에 널리 유포되었으며, 100여 년 뒤의 인물인 태사담이 이 노담의 『노자』를 근거로 당시 상황에 맞는 학설들을 보충해서 오늘날 통행본(『노자 왕필주』)의 원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 『노자』를 썼다고 추정할 수 있겠다.15 이후 위나라 왕필이 노자의 사상을 계승 발전시켜 『노자 왕필주』(『노자도덕경』)로 집대성해 놓았다고 할 수 있다.
  『노자도덕경』은 5,000여 자에 불과한 짧은 글로, 간결한 운문체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 81장 중 전반부 37장은 ‘도경(道經)’, 후반부 44장은 ‘덕경(德經)’이라 한다. 그리고 도(道)라는 글자는 70여 회, 덕(德)은 40여 회 등장한다. 『노자』는 독특한 시각으로서 간결하면서 함축적인 뜻과 심오한 사상 그리고 풍부한 내용을 지닌 중국 문화의 보배이자, 도가의 가장 유명한 경전 중의 하나이다.

 

 

3. 『노자(老子)』의 주요사상

 

  이 글에서는 노자 사상의 기본적인 틀을 마련했다고 평가받는 하상공주와 왕필주(『노자도덕경』) 이 두 문헌을 위주로 살펴보겠다.
  첫째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이다. 그 의미는 “사심에 의한 인위적인 행위를 하지 말라, 그러면 백성은 본성에 의해 스스로 저절로 그렇게 된다.”는 뜻이다. 이는 다스림에 관한 정치론으로서 여기서 ‘자연(自然)’은 산과 나무 등 실체로서의 자연(nature)이 아니라, ‘저절로’, ‘스스로’의 뜻으로 자연현상, 사회현상, 심리현상 등 일체 현상의 배후에서 그들 현상을 있게 하는 것이다.

 

▲ 상선약수: 지극히 착한 것은 물과 같다. 노자사상에서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아니하는 이 세상에서 으뜸가는 선의 표본으로 여기어 이르는 말.

 


  당시는 통치자 자신의 사심 충족을 위해 하는 것이면서 전쟁에서 이겨야만 살아남고 나라와 백성을 위한 일이라고 선동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영토 확장을 위해 명분 없는 땅뺏기 전쟁을 일으키고 거기에 필요한 물자와 군사력을 백성에게서 착취했다. 그리하여 『춘추(春秋)』에 나오듯이 생산량의 삼 분의 이를 세금으로 내는 가렴주구(苛斂誅求)16가 극에 달했고 백성은 노역의 가중으로 생활을 잃고 목숨을 잃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이러한 사심에 의한 인위적 통치의 상황에 대해 노자는 강한 혐오감을 갖고 백성을 지극히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에서 무위자연을 말한 것이다. 그 취지는 “그러한 인위적 통치 행위를 하지 마라! 그러면 백성은 자신의 본성에 의해 원래 스스로 하던 대로 저절로 그렇게 생활의 안정을 찾고 바른 삶을 영위할 것이요 모든 것이 안정되고 제자리를 찾을 것이다.”라는 것이다.
  둘째는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이다.17  그 뜻은 “말로 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고 부를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즉 도(道)는 형상화된 만물(萬物)이 아니어서 무어라 이름 지을 수 없다. 극(極)까지 갔다가 근본으로 돌아오는 순환론적인 동양적 사고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 그 근본의 도라 하며 이 도는 영원한 것이다. 또한 만물을 낳는 것은 유(有), 즉 형상화된 물(物)로서의 유이고 도(道)는 이러한 유를 낳는 시초(始初)로서의 무(無)이기에 이름 지을 수 없다 하였다.18 당시는 추상적 관념세계가 깊지 않아서 그때까지 사용하던 말로는 설명이 안 되는 개념들이었던 것이다.
  도는 당시에는 사람이나 마차 등이 다니는 일반적인 ‘길’이라는 형이하학적인 말이었으나 노자가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관념의 도를 처음 제시한다. 이로써 동양의 사유는 서양철학처럼 관념주의의 세계로 나간다. 군주는 하늘의 명으로 백성에게 세금을 걷고 전쟁을 하는 것이라 했는데 노자는 결국 ‘하늘보다 더 높은 도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각자가 스스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즉 통치자들이 권위를 얻는 근거가 되던 천(天)관념보다 더 높은 도의 관념을 제시하여 치자가 백성을 괴롭히는 데 악용하지 못하도록 했다.19
  셋째는 상선약수(上善若水)이다.20 노자는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고 하여, 물 흐르듯이 살 것을 권하였다. “물처럼 낮은 곳으로 임하는 자는 사람들이 높여 준다.”라고 하며, 겸허한 삶을 살라고도 하였다. 더불어 물처럼 부드럽고 약한 것이 딱딱하고 강한 것을 이긴다 하였다.21 사람이 태어날 때는 부드럽고 약하지만, 그가 죽을 때는 단단하고 강해진다.22 단단하고 강한 것은 죽음의 무리이고, 부드럽고 약한 것은 삶의 무리이다.
  당시의 사람들은 강하고 단단하고 높은 것을 좋고 귀하게 여겼으나 노자는 이러한 가치기준은 사람들이 만든 것이므로 본래의 도는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노자는 반대로 약하고 부드럽고 낮은 것이 귀하다고 이야기했다.
  이러한 상대적인 사고는 어떤 사물이든지 그것이 발전하여 한계에 이르면 반대방향으로 변화하게 된다는 대립전화의 세계관이 바탕에 있다. 그래서 “화(禍)는 복(福)이 의지하는 바이고 복은 화가 잠복해 있는 바니 궁극을 알리오!”라고 하였다.

 

▲ 목도정변 : 정변을 목격하다.(춘추시대의 정치적 혼란을 목격하다.)

 


  또한 있음과 없음은 서로 생기게 하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 이루어지게 하며, 길고 짧음은 서로 나타나게 한다.23 이는 서로 반대되는 것을 자기 존재 성립의 전제로 삼는 상반상성(相反相成)의 원리로 사물을 변화 발전하도록 하는 기본 추진력이라고 본 것이다. 그래서 반대 방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도의 움직임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덕은 이러한 도를 따라서 몸으로 얻어지는 것이며 가장 큰 덕은 인위적으로 애써 덕을 지키려 하지도 않고 덕이라 여기지도 않는 것이라 하였다. 24이와 같이 그 몸에 덕이 깊이 체득된 경지를 가장 큰 덕이라 하며 이를 일러 도의 덕이요, 성인의 덕이라 한다.
  돌이켜 보면, 노자의 사상을 부정적으로 바라본 비판들은 대부분 오해가 적지 않다. 당시는 제후나 경대부까지도 천자의 예(禮)를 참칭하며 서로 이기적인 욕망만을 내세우고 위아래와 동료 간의 최소한의 체계와 질서마저도 무너져, 모든 사회 질서가 뿌리째 흔들리던 상황이었다. 때문에 노자는 본래의 순수했던 본성적 의미가 아닌 자신들의 이익에 맞추어 왜곡하여 악용되던 성(聖)과 인(仁)을 부정한 것일 뿐이다. 백성을 진정 아끼던 순수한 인간 본성으로서의 인의예지 등의 유가의 핵심개념들을 거부한 것이 아니다. 최근 1993년에 발견된 죽간 초간본 『노자』를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노자의 허무는 부정적·소극적 허무주의가 아니다. 도의 본체와 인간은 물론이고 만물의 순수 본성을 말하는 것이다. 『노자』는 현실 도피적인 피세(避世)주의, 은유적 신비주의, 군주의 통치술, 군사전략서, 권모술수를 획책한다는 등의 평가도 있으나 이는 그 본질적인 취지가 아니다. 힘없는 백성에 대한 지극한 애정을 갖고 사회의 인습과 거짓된 통념에 빠진 통치자와 세상을 향해 역설적으로 진리를 말한 것이다.
  노자의 사상은 중국 역대로 수많은 학파와 제왕들에게 영향을 끼쳐서 사상의 원류가 되거나 통치술의 근간이 되었다. 당 왕조의 정관(貞觀) 연간에 현장법사가 범문(梵文: 산스크리트어)으로 번역하여 인도에 전해지기도 했으며, 근대에는 유럽에 소개되면서 헤겔이나 루소 등 저명한 철학가에게 영향을 주기도 했다.

 

 

 

 


01 “상제께서 六월 유(儒)ㆍ불(佛)ㆍ선(仙) 석 자를 쓰게 하시니라. 상제께서 유 자 곁에 이구(尼丘), 불 자 곁에 서역(西域), 선 자 곁에 고현(苦縣)이라 쓰시고 그 양지를 불사르셨도다.”(행록 5장 20절). 고현은 노자의 고향이다.
02 “腹中八十年神明”(공사 3장 39절). 노자가 어머니 뱃속에서 80여 년을 있다가 백발(白髮)로 태어났다고 하여 노자(老子)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03 - “종도들이 걱정하는 일을 상제께 고하면 그 걱정은 항상 무위이화로 풀렸도다.”(행록 4장 52절), “나는 생ㆍ장ㆍ염ㆍ장(生長斂藏)의 사의(四義)를 쓰나니 이것이 곧 무위이화(無爲而化)니라.”(교법 3장 27절)
 -  무위이화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저절로 온전해 진다(교화된다)’는 의미이다. 『노자도덕경』, 57장의 아무위이민자화(我無爲而民自化: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백성이 저절로 잘 된다)에서 생겨난 말이다.(노자/이강수, 『노자』, 길, 2007, p.229 참조.; 임헌규, 『노자도덕경 해설』, 철학과 현실사, 2005, p.330 참조)
04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녹읍현(鹿邑縣) 동쪽 6km 지역.
05 시호인 담을 자(字)로 부르기도 한다.
06 고형(高亨)이라는 학자는 노자는 원래 성(性)이 노(老)씨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그가 노자(老子)라고 불렸었다라는 점과 이(李)씨 성은 춘추시대에 없었고 『전국책』에 처음 등장하며, 고대의 운(韻)에서는 노(老)와 이(李)가 소리가 유사했기 때문에 노가 이로 변했다는 것이다.(쉬캉성/ 유희재. 신창호, 『노자 평전』, 미다스북스, 2005. pp.18~19 참조)
07 대나무를 쪼개어 글을 한 줄로 써 내려간 것으로 여러 장을 합쳐서 가죽이나 비단으로 묶어 편철(編綴)한다. 이렇게 편철한 것을 책(冊)이라 불렀다. 2세기 초엽에 종이가 발명되기 전까지 가장 많이 사용된 서사재료(書寫材料)였다.
08 널리 일반(一般)에게 통(通)하여지는 책으로 유포본(流布本)이라고도 한다.
09 비단에 쓴 판본이다.
10 문장에 선왕(先王)의 이름자나 중국의 연호자, 성인(聖人)이나 선조들의 이름자가 나타나는 경우 공경과 삼가는 뜻을 표시하기 위해 획의 일부를 생략하거나 뜻이 통하는 다른 글자로 대치하는 것.(『한국민족문화대백과』 참조)
11 영(盈)은 혜제(惠帝, 재위 기원전 180~기원전 157)의 이름이고 항(恒)은 한(漢)나라 문제(文帝, 재위 기원전 195~기원전 188)의 이름이다. 그런데 백서 갑본과 을본에서는 ‘항도(恒道)’라고 썼으니 노자는 한 문제 후대에 ‘항(恒)’을 피휘하려고 상도(常道)라는 말을 쓴 것 같다.(노자/이강수, 앞의 책, p.38 참조)
12 왕필은 중국 위진남북조시대의 위나라 사람으로 노자주(老子註)와 주역주(周易註)를 쓰고 24세에 요절했다. 당시 『주역(周易)』, 『노자』, 『장자(莊子)』를 일러 3현(玄)이라고 하여 이름난 선비들의 필독서라고 할 정도였다. 왕필은 그 3권 중에 2권의 주석서를 저술하는 등 중국 역사상 최고의 천재로 일컬어지기도 하는 사상가다. 도가 사상이 풍미한 위진현학시대에 하안(何晏)과 함께 위진현학(魏晉玄學)의 시조로 일컬어진다.
13 원전이 되는 책의 낱말이나 문장의 뜻을 쉽게 풀이한 내용을 담은 책.
14 의문 나는 것은 의문 나는 대로 전한다는 뜻이다.
15 김충렬, 『김충렬교수의 노자강의』, 예문서원, 2011, p.28 참조.
16 세금을 가혹하게 거두어들이고, 무리하게 재물을 빼앗음.
17 『노자도덕경』 1장, 참조.
18 원왈반(遠曰反)(『노자도덕경』, 25장), 반자 도지동 약자 도지용 천하만물생어유 유생어무(反者, 道之動, 弱者, 道之用, 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노자도덕경』, 40장)
19 인법지 지법천 천법도 도법자연(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노자도덕경』, 25장)
20 『노자도덕경』, 8장, 참조.
21 유약승강강(柔弱勝剛强)(『노자도덕경』, 36장)
22 인지생야유약 기사야견강(人之生也柔弱, 其死也堅强)(『노자도덕경』, 76장)
23 고유무상생 난이상성 장단상교 (故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노자도덕경』, 2장)
24 상덕부덕 시이유덕 … 상덕무위이무이위 (上德不德, 是以有德, … 上德無爲而無以爲)(『노자도덕경』, 3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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