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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42년(2012)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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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A 게시판 : 대순진리회요람』에서 성경신 삼요체 중 신(信)을 읽어보면 “하나를 둘이

Q&A 게시판

 

 

 

글 교무부

 

Q 『대순진리회요람』에서 성경신 삼요체 중 신(信)을 읽어보면 “하나를 둘이라 않고 셋을 셋이라 않고”란 구절이 있는데 문맥상 이해가 잘 안갑니다.

 

 

 

A 신(信)에 대한 해설의 전 문장은 이러합니다. “한 마음을 정(定)한 바엔 이익(利益)과 손해(損害)와 사(邪)와 정(正)과 편벽(偏⋅)과 의지(依支)로써 바꾸어 고치고 변(變)하여 옮기며 어긋나 차이(差異)가 생기는 일이 없어야 하며 하나를 둘이라 않고 셋을 셋이라 않고 저것을 이것이라 않고 앞을 뒤라 안하며 만고(萬古)를 통(通)하되 사시(四時)와 주야(晝夜)의 어김이 없는 것과 같이 하고 만겁(萬劫)을 경과하되 강하(江河)와 산악(山岳)이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이 하고 기약(期約)이 있어 이르는 것과 같이 하고 한도(限度)가 있어 정(定)한 것과 같이 하여 나아가고 또 나아가며 정성(精誠)하고 또 정성하여 기대(企待)한 바 목적(目的)에 도달(到達)케 하는 것을 신(信)이라 한다.”

  ‘한 마음을 정한 바엔…’으로 시작하여 중간은 믿음의 과정을 설명하고 있고 그 과정을 통하여 ‘…기대한 바의 목적에 도달케 하는 것을 신이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한번 마음으로 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의 진실을 둘로 왜곡시키지 않고 목적을 이룰 때까지 진실을 간직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것이 “하나를 둘이라 않고”가 담고 있는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한번 마음으로 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또한 그 간직한 진실을 지키기 위하여 셋을 셋이 아니라고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셋을 셋이라 않고”가 담고 있는 의미입니다.

  “셋을 셋이라 않고”는 타인을 향하는 경우와 자신을 향하는 경우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우선 타인을 향하는 경우를 예를 들어보면 일제시대에 독립운동을 하던 독립군이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심문을 받으면서 독립군의 명단을 자백하라는 강요를 받을 때, 사실을 순순히 자백한다면 - 셋을 셋이라고 한다면 - 이것은 믿음을 저버리는 행위가 될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지 않는 것 - 셋을 셋이라고 하지 않는 것 - 이 대한독립을 이루는 대업에 이 한 몸 헌신하겠다는 한번 먹은 마음을 변치 않고 기대하는 바의 대한독립을 달성케 하는 믿음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자신을 향한 경우는 자신의 마음을 내적으로 관조하여 사심(私心)을 버리고 양심(良心)을 회복하는 기전(機轉)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면 양심과 사심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사심은 물욕에 의하여 발동하는 사사로운 욕심(慾心)이고 양심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천성(天性) 그대로의 본심(本心)입니다.(『대순진리회요람』 pp.18~19) “셋을 셋이라 않고”라는 구절에서 ‘셋’을 ‘내 마음’으로 등치시켜 본다면 “내 마음을 내 마음이라 않고”가 됩니다. 앞의 ‘내 마음’이 사심이라면 뒤의 ‘내 마음’은 양심입니다.

  “내 마음을 내 마음이라 않고”를 구체적으로 기술하면 ‘물욕에 의하여 발동하는 사사로운 나의 욕심(내 마음 = 셋)을 정직하고 진실한 나의 본심(내 마음 = 셋)이라 않고’로 풀이 할 수 있습니다. 한 마음을 정하고 일을 추진하는 과정에 생길 수 있는 사사로운 욕심을 나의 본심으로 여기지 않고, 사심을 버리고 정직과 진실을 근본으로 하여 기대하는 목적을 완수하도록 정성을 다하는 것이 이 경우에 해당한다 할 것입니다.

  그 의미를 또 다른 차원에서 조명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사물을 관찰하는 데 있어서 겉모습을 보고 판단하는 우를 범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교양을 쌓고 인생의 연륜이 쌓이다보면 사물의 본질은 좀 더 깊은 곳에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이는 것은 보이는 것과 같지 않다”는 말을 합니다. 사물을 관찰하는 데 있어서도 눈으로 보이는 것과 그것을 직접 만져보고 여러 가지로 분석해 본 것과는 큰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사람을 판단하는 데 있어서도 “말은 타 봐야 알고 사람은 겪어봐야 안다”는 속담이 있듯이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 그를 옳게 판단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밤하늘의 별도 풀잎에 맺힌 이슬을 보아도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인공위성이 보내온 별의 사진은 밤하늘에 보이는 그 별의 모습이 아니며, 현미경으로 이슬을 관찰한다면 그 속에 수많은 미생물이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보이는 것과 같지 않다”는 경구(警句)는 인간의 인식의 한계를 겸허하게 받아들이게 하면서 동시에 인간 인식의 탐구영역의 무한한 확대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이런 면에서 “셋을 셋이라 않고”는 “보이는 것은 보이는 것과 같지 않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전경』 교법 3장 17절의 ‘최풍헌과 류훈장의 고사’는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믿음으로 끝까지 최풍헌의 말을 따름으로써 피난하는 길을 구하고자 했던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 믿음의 사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도인들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진행형의 도(道)를 닦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최풍헌과 류훈장의 고사’는 우리 도인들에게 현재적인 의미로 다가옵니다. 우리는 아직 궁극적으로 기대하는 바의 목적에 도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 마음을 정하여 수도에 임하였다면 수도의 목적인 도통의 완성을 위하여 “셋을 셋이라 않고” 진실을 근본으로 성심(誠心)을 다하여 수도함으로써 기대하는 바의 목적에 도달케 하여야 합니다.

  류훈장의 기대하는 바의 목적은 ‘왜군이 침입한다는 소문에 민심이 흉악해지는 터에 피난할 길’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도통을 하고자 하는 우리 도인들의 목적에 비하면 류훈장의 목적은 작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가 보여준 믿음의 크기는 보통사람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최풍헌이 언행을 거칠고 부족하게 보이게 꾸민 것이 첫 번째 시험이고 가산을 맡기라고 한 것이 두 번째 시험이며, 그 돈을 받아 날마다 술을 마시며 방탕한 것이 세 번째 시험이고 그러다 허망하게 죽은 것이 네 번째 시험이며, 유언을 남겨 지리산에 장사지내달라고 한 것이 다섯 번째 시험입니다. 어느 시험단계에서든 그의 믿음을 중지할 수 있었지만 최풍헌이 어떠한 모습을 보여주어도 “셋을 셋이라 여기지 않고” 변함없는 믿음으로 기대하는 바의 목적에 도달케 된 것입니다. 결국 지리산에서 류훈장이 보게 된 것은 기대 이상의 것입니다.

  믿음이 기대하는 바의 목적에 도달케 하는 힘이라면 기대하는 바의 목적이 클수록 믿음도 그만큼 커야 한다는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 도통의 목적과 피난의 목적을 비교해보고 피난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어떠한 시험과정을 통과하였는지를 살펴보면, 우리 도인들이 겪을 우여곡절과 도(道)에 대한 믿음의 크기가 얼마나 커야 하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최풍헌과 류훈장의 고사’처럼 우리 도인들도 도에 대한 믿음에 조금도 변함이 없이 정직과 진실을 근본으로 정성에 정성을 다함으로써 기대하는 바의 목적에 도달토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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