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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24년(1994)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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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절후 신명의 생애 : 방현령(房玄齡)

우수(雨水)절후 관장하는

방현령(房玄齡)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그칠 줄 알면 편안하다.」
  시기할 줄 몰랐고 남의 장점을 들으면 자기를 칭찬하듯 생활
  현령은 자기의 장점으로 남을 평가하지 않아
          

         
  다시 현령을 양국공(梁國公)으로 옮겨주려 하였는데, 신하들이 벼슬을 세습하는 일을 반대하므로, 지사 벼슬은 폐하고 양국공으로만 임명했다. 얼마 되지 않아 태자를 보좌하는 소사(小師)가 되었는데, 동궁(東宮)으로 처음 감에 황태자가 그에게 절하려 하니, 현령이 사양하며 감히 알현하지 못하므로, 그제서야 절하고자 함을 그쳤다. 재상(宰相)의 직위에 있은 지 십 오 년에 딸은 왕비가 되고 아들은 오히려 주인 노릇하니 스스로 황제의 총애와 권세가 극에 달했다고 여겨, 수 차례 사퇴의 뜻을 비쳤으나 황제는 듣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공(司空)으로 진급되어 조정의 일을 총괄하게 되었다. 그러나 현령은 굳이 사양하니, 황제께서 관리를 파견해 이르기를『사양이란 미덕임에 틀림없지만 국가가 오래도록 아끼고 의지해 왔는데, 하루아침에 좋은 보필을 잃으니 마치 양손을 다 잃어버린 것과 같소. 짐이 보건대 공은 아직 근력이 남아 있으니 그리 심하게 사양치 마시오.』라고 했다. 진왕(秦王)이 황태자가 되자 태자의 태부(太傅)가 되어 문하성(門下省)의 일을 살폈다. 현령이 모친상(喪)을 당하자, 황제께서 묘지(墓地)로 소릉(昭陵)동산을 내리셨다. 상(喪)을 마치고 다시 관직에 복귀되었다. 요(遼)를 정벌하러 가게 되자, 현령은 수도경비를 맡아 남아있게 되었다. 황제께서 말하기를『공(公)께서 한(漢)의 개국 공신 소하(蕭何)의 역할을 맡아 해낼 것이니, 짐은 서쪽을 염려치 않을 것이오.』라고 했다. 무릇 양식과 무기와 수레와 군대의 행렬 등 모든 일을 현령이 맡아 총괄하였다. 현령은 수 차례 황제에게 글을 올려, 적을 너무 가벼이 여기지 말고 오래도록 오랑캐를 잘 관찰하여 행동하도록 권고했다. 태자의 태부(太傅)직책을 거듭 사양하여 마침내 황제께서 허락했다.
  현령이 노년에 병이 많자, 이에 황제께서 친히 옥화궁(玉華宮)에 드시어, 현령으로 하여금 거처하면서 누워서도 정사를 처리할 수 있도록 조치(措置)했다. 더욱 야위어 가자 가마를 타고 궁궐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여 현령을 들도록 했다. 황제께서 현령을 보고 눈물을 흘리시고, 현령 또한 감격과 감회에 젖어 소리 죽여 울었다. 황제께서는 명의(名醫)로 하여금 돌보도록 하고 좋은 음식을 하사하며 매일 현령의 상태를 보고하도록 하여, 조금이라도 차도가 있다 하면 곧 얼굴에 기쁜 빛을 감추지 못했다. 현령이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하기를『오늘날 천하의 일은 부득이한 것이 없는데 오직 고려(高麗)만을 아직 정벌치 못했습니다. 황제께서 노기(怒氣)를 나타내실 까 두려워 군신(君臣)들은 감히 이 일을 입밖에 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나 나마저 말씀드리지 않는다면, 나는 죽어서도 부끄러움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다음과 같이 상소를 올렸다.
  『옛부터 신하노릇 하지 않던 자들도 폐하께서 모두 신하로 만드셨습니다. 옛부터 다스려지지 않던 자들도 폐하께서 모두 다스리셨습니다. 이제 중원(中原)의 근심은 돌궐족(突厥族) 같은 것이 없는데, 그러나 크고 작은 칸(몽고의 왕)들을 차례로 정복하여, 변발을 풀고 칼을 잡고 변경지대를 나누어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연타(延陀) 철륵(鐵勒)을 주(州) 현(縣)으로 만들고, 고창(高昌) 토혼(吐渾)도 적은 군사로 진압하였습니다. 그런데 유독 고려(高麗)만은 역대로 명령을 내렸음에도 다 토벌하지를 못하였습니다. 이제 폐하께서 신하로서 임금을 시해한 자들을 문책하시고, 몸소 육군(六軍)을 거느려 그 먼 변경으로 행군하신다면, 열흘이 못되어 요동(遼東)을 정벌하실 것이요, 포로로도 수십만을 잡으실 것이며, 나머지 군중들과 그 사악한 군주는 기가 죽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게 될 것이니, 이렇게 되면 폐하의 업적은 전대(前代)의 배(倍)가 되시는 것입니다.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나아감과 물러남, 존속됨과 망함을 알아 그 바름을 잃지 않는 자는 오직 성인 뿐이련가!」라고 하였습니다. 무릇 나아갈 때에도 물러나야 할 기미는 있는 것이며, 존속될 때에도 망할 틈새는 있는 것이니, 있고 없음의 이치를 아는 것 바로 이것이 제가 폐하를 위해 애석하게 생각하는 점입니다. 전해오는 말에「족한 줄을 알면 욕되지 아니하고, 그칠 줄을 알면 위태롭지 아니하다.」라고 하였습니다. 폐하의 명성과 업적은 이미 족하다고 할 수 있고, 땅을 개척하여 국경을 넓히는 것 또한 이제는 그치셔도 됩니다. 변방 오랑캐의 추잡한 무리는 인의(仁義)로써 대하기에 부족하니 상례(常禮)로써 문책하셔야 하며, 그러기에 옛 분들은 그들을 짐승이나 물고기를 기르듯 하셨습니다. 반드시 그것을 멸종시키는 것은 짐승들이 위기에 몰리면 덤벼들어 구차히 생명을 보존코자 하지 않을 까를 염려해서입니다.
  또한 폐하께서는 사형의 죄를 판결하실 때에는 여러 번 상황을 진술케 하고 거듭 자세히 살피시며 기름진 음식을 피하시고 음악도 멈추도록 하셨으니, 이는 인명(人命)의 귀중함을 절감하셔서 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아무 죄도 없는 백성을 군대의 행렬 사이로 몰고 칼과 화살이 쏟아지는 곳에 버려 두셔서 간담을 서늘케 하시고, 늙은 아비와 어린 자식, 홀로된 아내와 자애로운 어미로 하여금 전사자를 실은 구레를 바라보며 해골을 부여안고 찢어질 듯한 가슴에 얼굴을 가리고 울게 하시니, 이는 아마도 음양(陰痒)이 뒤바뀌고 조화로운 기운이 상한 까닭이니 실로 천하의 아픔이 아니겠습니까?

  가령 고려(高麗)로 하여금 스스로 새로워지게 하시고 고려를 치러 갈 배를 불사르고 소집한 병사들을 돌려보내신다면, 신(臣)은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황제가 이 상소문을 읽고 고양공주(高陽公主)에게 말하길,『이미 늙고 병든 이 사람이 아직도 나라 일을 걱정하고 있구나!』라고 했다. 현령의 병이 심해지자 동산의 담장을 뚫어 현령의 안부를 물으러 가기에 편리하도록 하고, 몸소 현령의 손을 잡고 이별했다. 태자를 불러 가서 살피도록 명했다. 현령의 아들 유애(遺愛)를 우위중랑장(右衛中郞將)으로, 유칙(遺則)을 조산대부(朝散大夫)로 임명하고 와서 알현토록 했다. 현령이 죽으니 나이 칠십일 세였다. 태위(太尉)와 병주도독(幷州都督) 벼슬을 내리고 시호(諡號)를 문소(文昭)라고 칭했다. 반검(班劍)과 우보(羽葆)와 고취(鼓吹) 및 비단 이천 단(段)과 곡식 이천 곡(斛)을 하사하고, 소릉(昭陵)에서 장사 지내도록 했다. 고종(高宗)의 사당에서 현령을 제사 지내도록 했다. 현령은 국가의 일을 맡아서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수고를 아끼지 않았고, 공직에 임해서는 충절을 다했으며 한 물건이라도 그 위치에서 잃게 하지 않았다.
  시기할 줄 몰랐고, 다른 사람의 장점을 들으면 마치 자기를 칭찬하는 듯 좋아했다. 관리로서의 다스림에 통달했고 거기에다 문아(文鴉)함을 겸했으며, 법을 처리하고 명령을 내릴 때에는 공평하고 관대하기를 힘썼다. 자기의 장점으로 남을 평가하지 않았으며, 사람을 쓸 때에도 완벽한 인재를 구하지 아니하고 비록 미천한 사람일지라도 지닌 바의 능력을 모두 발휘하도록 했다. 간혹 일 때문에 타인의 양보를 받으면 반드시 머리를 조아려 송구스러움을 표하고, 삼가 두려워하는 것이 마치 용납되지 못하는 듯 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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