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너별 보기
   daesoon.org  
대순124년(1994) 6월

이전호 다음호

 

회보 1면 4강령(四綱領) 대순지침 상제님의 일대기 천계탑 28수 신명의 생애 제주도연수 종단소식 24절후 신명의 생애 대순문단 금강산이야기 24절후 소개 알립니다

24절후 신명의 생애 : 고사렴(高士廉)

고사렴(高士廉)

 

백성을 교화하여 풍속을 교정

유생들에게 경전과 무예를 가르치니 학교가 興起

             

              

  고검(高檢)은 자(子)가 사렴(士廉)으로,사렴(士廉)으로써 더 잘 알려져 있다. 제(齊)나라 청하왕(淸河王) 악(岳)의 자손으로, 아버지 여악안왕은 수(隋)나라로 들어가 조주자사(兆州刺史) 벼슬을 했다. 고사렴은 민첩하고 지혜롭고 도량이 있었으며, 용모는 마치 그림 같았고 책을 읽을 때는 한 번 보면 곧 암송하였으며 점치는 일을 잘 했다. 수 나라의 사예대부(司隸大夫)인 설도형(薛道衡)과 기거사인(起居舍人) 최조준(崔組濬)은 모두 나라의 오랜 신하로서 존중받는 이들이었는데 고사렴이 그들과 더불어 나이를 초월한 우정을 맺어 유명해졌다.
  스스로는 제(齊)의 종실(宗室)이기 때문에 널리 교유하고자 하지 않아, 종남산(終南山) 기슭에 숨어살았다. 이부시랑(吏部侍郞)인 고효기(高孝基)가 그에게 벼슬할 곳을 권하니, 인수(仁壽)년간 중에 문재갑과(文才甲科)에 과거시험을 보아 치예랑(治禮郞)으로 임명되었다. 곡사정(斛斯政)이 고려(高麗)로 달아나자 그와 친분이 두터웠던 까닭으로 연루되어, 주연주부(朱鳶主簿)로 되었다. 어머니가 연로하여 풍토병이 있는 지역에 거처할 수가 없었으므로, 아내 선우씨(鮮于氏)에게 받들어 봉양케 하고는 떠났다. 때마침 세상이 크게 어지러워 수도 지역의 길이 끊겨버리자 교지의 태수(太守)인 구화(丘和)가 그를 사법서좌(司法書佐)로 임명했다. 이 때에 흠주(欽州) 리현(俚縣)의 장수인 녕장진(寗長眞)이 군사를 이끌고 교지 땅을 침공하니, 악화는 두려워서 성을 나가 녕장진의 군대를 맞이하려 하였다. 고사렴이 말하기를 『녕장진의 군사가 비록 많다 하더라도 일개 현(縣)의 군사로서 멀리서 왔으니, 세력을 오래 지탱할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 성내에는 전쟁에서 이겨 남은 병사들이 있어 여전히 싸울 만 하니 어찌 남의 다스림을 받으리요?』라고 하니, 악화가 고사렴을 행군사마(行軍司馬)로 삼아 출격하여 그들을 격파했다.
  고조(高祖)가 사신을 보내어 영남(嶺南)지역을 돌아보게 하니, 무덕(武德) 5년에 고사렴은 악화와 더불어 와서 항복했다. 이때에 진왕(秦王)이 옹주(雍州)의 목(牧)으로 있었는데, 고사렴을 천거하여 치중(治中)이 되게 하고 친히 그를 중시하였다. 은태자(隱太子)가 왕과 더불어 사이가 많이 벌어지자, 고사렴은 장손무기(長孫無忌)와 더불어 은태자를 토벌하기로 은밀히 계획을 세웠다. 그 날에 병졸을 거느리고 죄수들을 석방하고 갑옷을 주어 방림문(芳林門)으로 달려가 싸움을 도왔다. 왕이 황태자가 되자 우서자(右庶子)를 배수하고 시중(侍中)으로 승진시켰으며, 의흥군공(義興郡公)으로 봉했다. 왕규(王珪)를 숨겨두고 제때에 상주(上奏)하지 않았기 때문에 연좌되어 안주도독(安州都督)으로 좌천되었다.
  고사렴이 익주(益州) 대도독부(大都督部) 장사(長史)로 진급되었다. 촉(蜀)지방 사람들은 귀신을 두려워하고 질병을 싫어하여 비록 부모가 병에 걸리더라도 다 버려 두고 떠나가 멀리서 집을 향해 음식을 던져 부모를 먹이며, 형제라도 서로 재물을 빌려주지 않았다. 고사렴이 그들을 위하여 가르침을 펴고 깨우쳐 알려주고 격려하니 풍속이 평화롭게 변해졌다. 또한 유생들을 데려다가 경전과 무예를 가르치니 학교가 다시 흥기 했다. 진(秦)나라 때에 이빙(李氷)이 문강(汶江)의 물을 전답의 관계용수로 써서, 물가의 전답 일경(一頃)에 천금(千金)이나 하니 백성들이 마구 침범했다. 고사렴이 옛 수로를 붙여 나누어 곁 갈래를 쳐서 관계수로를 넓히니 이로써 백성들이 부유해졌다.
  들어와 이부상서(吏部尙書)가 되었고 허국공(許國共)으로 승진되어 봉해졌다. 평소 감식력이 있다고 자부하였고 또 족보에 밝아 사람을 등용할 때에 가문이나 출신지역에 타당치 않음이 없었다. 고조(高祖)가 서거하자 사공(司空)직을 맡고 나라의 산과 구릉을 관리하였다. 특진 되어 상서우복야(尙書右僕耶)로 옮겨졌다. 고사렴의 집안은 사대가 이 관직을 지내니 세상에서 그 존귀함을 영광으로 삼았다.
  태종(太宗)이 낙양(洛陽)으로 행차하자, 태자가 나라 일을 보살피게 되어 고사렴을 소사(小師)로 임명했다. 친히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삼천(三川)지역을 무위(無爲)로 다스리면서 관중(關中) 땅을 걱정치 않는 것은 경(卿)에게 맡겨 두었기 때문이요.』라고 했다. 오랜 세월이 지나 고사렴이 관직을 그만 둘 것을 청하자, 허락하여 복야(僕耶)직을 그만두게 하고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와 동중서문하삼품(同中書門下三品)을 내려 정사에 참여케 했다. 임금이 고려(高麗)를 정벌할 때에, 황태자는 나라를 보살피며 정주(定州)에 머물러 있었는데, 다시 고사렴을 태부(太傅)로 임명하여 함께 기밀(機密)한 정무(政務)를 장악했다. 태자가 명령을 내려 말하기를 『과인은 공의 가르침을 입어 근래에 정사를 다스리게 되었소. 책상에 걸터앉아 공을 대하자니 마음이 편치 못하오. 관청에 응당 별도로 책상을 마련하여 태부(太傅)를 받들도록 하겠오.』라고 하니, 고사렴이 굳이 사양했다.
  돌아와 병주(幷州)에 이르렀는데 병에 걸렸다. 임금이 친히 고사렴이 거처하는 곳에 행차하여 병문안을 했다. 정관(貞觀) 21년에 행차하여 그를 위해 눈물을 흘렸다. 고사렴이 죽은 때는 칠십 일세였다. 임금이 조문(弔問)하러 갈려고 하였는데, 방현령(房玄齡)이 임금이 단약(丹藥)을 복용하고 있으므로 상가(喪家)를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고 간언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짐에게는 오랜 친구이며 인척이라는 중대한 의무가 있고 또 임금과 신하의 관계이니 공은 참견말고 아무 말도 하지 마시오.』라고 하며, 곧 수백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대궐문을 나섰다. 장손무기(長孫無忌)가 말 앞에 엎드려 고사렴의 유언을 전하면서 상가에 가지 말도록 애걸하였으나, 임금이 여전히 허락하지 않았다. 장손무기가 눈물로 하소연함에 임금이 궁궐로 되돌아와, 동쪽 정원으로 가서 남쪽을 향해 곡(哭)했다. 조서를 내려 사도(司徒)와 병주도독(幷州都督)직을 증수하고, 시호를 문헌(文獻)이라 했으며, 소릉(昭陵)에 배장(陪葬)했다. 바야흐로 한식(寒食)일이 되자, 상궁에게 칙령을 내려 네 수레분의 음식을 가지고 가서 제사 지내게 하고 임금이 직접 제문을 썼다. 상여가 횡교(橫橋)를 벗어나자 성의 서북쪽 누대에 올라가 멀리서 바라보고 곡(哭)을 하며 상여를 전송했다. 고종(高宗)이 즉위하자 태위(太尉)직을 덧붙여 증수하고, 태종(太宗)의 묘정(墓廷)에서 제사 지냈다. <끝>

 

 

 

 

관련글 더보기 인쇄

Copyright (C) 2009 DAESOONJINRIHOE All Rights Reserved.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 강천로 882 대순진리회 교무부 tel : 031-887-9301 mail : gyomubu@daesoon.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