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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24년(1994)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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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수 신명의 생애 : 등우(鄧禹)神明 열전

등우(鄧禹)神明 열전

 

등우는 문장이 밝고 행동이 돈독, 천하평정된 후 충·효·열의 귀감돼

난세에 국가를 위해 봉사, 반란세력 막는데 헌신

                       

               

  지금 봉거도위(奉車都尉)를 통해 대사도의 도장과 그에 맞는 도장 끈을 보내어 등우를 제후로 봉하고 만 호의 식읍을 내리나니 공경할 진저! 이 당시 우의 나이는 스물넷이었다.

  마침내 분음하를 건너 하양 땅에 들어갔다. 경시의 중랑장 좌보도위인 공승이 군사 십만을 이끌고 좌빙의 군사와 더불어 아현에서 우를 막으니, 우가 다시 그들을 패주시켰다. 한편 적미가 수도 장안으로 침입해 이 때에 경기지역을 지키는 삼보(三輔) 관리들이 연달아 거듭 패했고, 적미(赤眉)가 지나가는 곳은 많은 사람들이 살상(殺傷) 당하니, 백성들이 의지할 데가 없었다. 그러던 중 우가 승승장구하고 그의 군사들은 행동에 규율이 있어 포악하지 않다는 소문을 듣고는 모두들 우를 고대하여 혹은 처자를 거느리고 혹은 짐을 등에 지고 와서 우의 군사를 맞이하니, 항복해 오는 자가 하루에 천명이 넘었고 군사는 백만을 헤아렸다. 우는 지나는 곳마다 모두 수레를 멈추고 속도를 늦춰 투항해 오는 자들을 위로하니, 머리가 반백이 된 노인네 아직 상투도 틀지 않은 어린 아이들이 그이 수레아래 모여들어 감동하고 기뻐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에 명성이 광서 지역에 떨쳐지니, 광무제가 기뻐하여 여러 번 서신을 보내 칭찬하셨다. 여러 호걸 장수들이 등우에게 장안을 빨리 공격하자고 간청했다.
  우가 말하길 『안 된다. 지금 우리 군사가 비록 많다 하나 능히 싸울 수 있는 자는 적고, 현재 군량미도 넉넉지 않은데다가 앞으로도 물자를 보충하기가 어렵다. 반면 적미는 이제 막 장안을 함락시킨 터라 군수물자가 넉넉하고 무기도 날카로우니 당해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무릇 적미의 무리는 도적떼들이 모여 있는 것이라 하루를 지탱할 만한 계략도 없으니, 비록 군수물자가 풍부하다고 하나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상태다. 그러니 견고히 장안을 지키지 못할 것이다. 마침 상군과 북지군 안정 세 개 군은 땅이 넓고 사람은 적으며 곡식과 가축이 많으니, 나는 그곳에 머물며 군사를 휴식시키고 군량미를 보충해 병사들을 먹이리라. 그러면서 적미의 무리가 쇠약해지기를 기다려 공격하리라.』 그리하여 군사를 이끌고 북쪽으로 가 순읍에 이르렀다. 우가 도착하여 적미측의 진영을 격파하니 군읍의 관리들이 성문을 열고 투항해 왔다. 서하태노인 종육이 아들을 통해 항복문을 올려 보내니 우가 광무제가 계신 낙양으로 그것을 보냈다.
  관중지역은 아직 평정되지 않았는데 우가 오래도록 출병치 않자 무제께서 칙명을 내려 말씀하길 『요임금께서 망하려는 적은 흉포한 임금과 같다. 이제 난세를 당하여, 장안의 관리들이 의지할 데 없이 불안하고 다급해있다. 그대는 마땅히 이 때를 틈타 출병하여 서경을 진압하고 백성들의 마음을 동요치 않게 하라.』 우는 이와 같은 뜻을 받고 곧 장군들을 파견하여 상군 지역의 여러 현을 각기 공략케 하고, 병사와 곡식을 보충하여 북지군의 대요현으로 돌아왔다. 적노장군 빙석과 거기장군 종흠을 파견하여 순읍을 지키도록 했는데, 두 사람이 권력을 다투어 서로를 공격하여 마침내 빙석이 종흠을 살해하고 이어서 우를 공격하니 우가 저령을 보내어 무제께 이 사실을 알렸다. 무제께서 전령에서 묻기를 『빙석과 제일 친한 이가 누구냐?』 아뢰길 『호군 황방입니다.』 무제께서는 빙석과 황방의 사이가 오래가지 못할 것이고 서로를 반드시 미워하게 될 것이라고 헤아리셔서, 우에게 전하여 말씀하길 『빙석을 잡을 자는 반드시 황방이다.』 그리고는 상서 종광을 보내어 부절(符節)을 가지고 가서 황방을 항복시키도록 했다. 그로부터 한달 남짓 되어 황방이 과연 빙석을 잡아들이고, 그 군대를 거느리고 돌아와 처벌해 줄 것을 청했다. 경시의 장군 왕광 호은 등도 종광에게 와서 항복하여, 모두 함께 동도(東都)로 돌아오는데, 도중 아읍에 이르러서 그들이 도망치려 하자 종광이 모두 목을 베어 버렸다. 빙석은 낙양에 돌아와서 사면 받아 죽음을 면했다.
  건무 2년 봄에 광무는 다시 사자를 보내어 우를 양후로 봉하고 식읍으로 네 개 현을 내렸다. 이때에 적미는 서쪽 부풍군으로 달아나 있었다. 우는 남쪽으로 장안에 이르러 곤명지(昆明池)에 주둔하고는 크게 잔치를 베풀어 병사들을 먹였다. 그리고는 장군들을 거느리고 목욕재계하고 길일을 택하여 고묘(高廟)에서 정성스럽게 제사를 지냈다. 그곳에서 11제신주(帝神主)를 모셔다가 사신을 시켜 낙양으로 받들어 가게 하여 능에다 이사(吏士)를 두어 지키게 하였다.
  등우가 병사를 거느리고 남전에서 연잠과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운양으로 다시 돌아와 살았다. 한중왕(漢中王) 유가(劉嘉)가 등우에게 가서 항복하도록 하였다. 유가의 재상 이보(李寶)가 거만하고 무례하여 등우가 그의 목을 베었다. 이보의 아우가 이보의 부곡민을 거느리고 등우를 공격하여 그의 장군 경흔을 죽였다.
  빙석이 반란을 일으킨 후에 등우의 위세가 점점 약해지고 식량도 떨어져서 등우에게 귀속했던 사람들이 흩어져 떠나갔다. 그때 적미가 다시 장안으로 들어왔는데 등우가 그들과 싸우다 패하여 고등까지 달아났다. 그러나 군사들은 굶주려서 모두 대추와 채소만을 먹었다. 황제가 이에 등우를 불러들여 칙명을 내려 말하기를,

  『적미가 식량이 없어 동쪽으로 온 것이니 내가 그들을 꾸짖을 테니 여러 장군들은 걱정할 바가 아니다. 경망스럽게 진병하지 말아라.』 

  등우는 임무를 받고도 공을 이루지 못했음을 부끄러이 여겨 여러 차례 굶주린 병사들을 이끌고 싸움을 걸었으나 매번 불리하였다.
  건무 3년 봄, 거기 장군 등홍(鄧弘)과 적미를 공격하였으나 마침내 패하여 병사들은 모두 죽고 흩어졌다. 그 일은 빙이전(憑異傳)에 보인다. 등우는 홀로 24기병을 이끌고 의양에 들어와 대사도 양흔의 인끈을 바치고 사죄하였다. 왕은 조서를 내려 제후의 인끈을 되돌려 주었다. 몇 개월 후, 우장군(右將軍)을 배수받았다.
  연잠이 동양에서 패하여 마침내 진흥과 합세하였는데, 건무 4년 봄, 순양에서 다시 노략질하였다. 왕은 등우를 파견하여 복한장군 등엽, 보한장군 우광을 도와 연잠을 등현에서 격파하고 무당까지 추격하여 다시 그들을 깨뜨렸다. 연잠이 한중으로 도망갔는데 나머지 무리들은 모두 항복하였다.
  건무 13년, 천하가 평정되자 왕은 여러 공신들의 호읍(戶邑)을 더해주었다. 등우는 고밀후(高密侯)로 완전히 봉해져 고밀·창안·이안·순우(高密·昌安·夷安·淳于) 등 4개 현을 식읍으로 다스렸다. 황제는 등우의 공이 높다고 여겨 그 아우 등관(鄧寬)을 명친후(明親侯)로 삼았다. 그 후 좌우장군의 관직이 없어지자 특진으로 조청에 봉해졌다.
  등우는 안으로 문장이 밝고 행동이 돈독하며 부모를 효성스럽게 섬겼다. 세상이 편안해지자 항상 국가와 사회가 화평하기를 바랐다. 자식이 열 셋이 있었는데 각기 한 가지 재주씩은 갖추도록 하였다. 규문(閨門)을 잘 다스리고 자손을 가르쳤으니 후세의 모범이 될 만 하였다. 식읍에서 거두어들인 것만으로 살림을 하였으며 이익을 추구하지 않았다. 황제가 더욱 그를 중히 여겼다. 중원(中元) 원년 다시 사도의 일을 보다가 동쪽으로 왕을 좇아 순수하여 대종(垈宗)을 배수받았다.
  현종이 즉위하여 등우가 선제(先帝)의 으뜸 공신임을 어여삐 여겨 태부(太傅)로 삼았다. 알현할 때 동쪽으로 향하게 하니 그에 대한 총애와 존경이 매우 심하였다. 1년여를 더 살다가 병이 들었다. 황제는 여러 번 몸소 병문안을 가서 두 아들을 랑(朗)으로 삼았다.

  영평(永平) 원년 57세로 죽으니 시호를 원후(元候)라 하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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