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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15년(1985)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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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 大巡思想의 基本方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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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巡思想의 基本方向


東西洋思想의 綜合과 統一



 최동희 박사<고대 철학과 교수>


  적어도 천여년 동안에 형성된 우리 固有思想은 이웃 중국을 통해 儒敎·佛敎·道敎등 外來思想을 만나게 되자 새로운 思想史를 전개하게 되었다. 固有思想 중에는 끝내 外來思想과 맞섬으로써 歷史의 변두리에 남아서 어떤 變動期를 맞아 다시 작용하는 것도 있었을 것이다. 혹은 저항을 하면서도 歷史 전개에 참여하는 미묘한 思想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복잡하고 미묘한 固有思想이 17世紀 전반에 처음으로 중국을 통해 西洋의 文物을 만나게 되었다. 가장 먼저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된 것은 世界地圖·天主實義등이었다. 이 天主實義는 마테오 릿치(Matteo Ricci)가 지은 天主敎 敎理에 관한 책이다. 明나라 使臣으로 갔다가 1631년에 北京으로부터 돌아온 鄭斗源은 그곳에서 天主敎 神父로부터 받은 天主·地理·曆算에 관한 漢譯 科學書籍과 千里鏡(望遠鏡)·自鳴鐘(時計)·紅夷砲(洋砲)등을 임금에게 바쳤다.
  그 동안 儒敎·佛敎 등을 받아들여 전개되어 오던 우리 사상은 이제 서양의 사상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이리하여 17世紀부터 새로운 思想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것이 곧 實學思想이다. 이것은 西洋思想을 받아들임으로써 새로 엮어진 우리 思想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그 짜임새는 아직 엉성한 데가 있어서 다만 우리 思想의 새로운 편성을 위한 첫 試圖라는 점에서 注目될 뿐이다. 그러나 實學思想은 저 중국의 詩歌·文章이나 朱子의 性理學을 주로 하는 공부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리고 學脈·黨脈의 갈림을 자극하는 번거로운 禮論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 이것은 실속 없는 原理나 번거로운 理論이 아닌 現實生活에 관한 問題解決에 보다 깊은 關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實學者들은 아직도 儒敎的인 것을 理想으로서 내세우고 있었다. 예컨데 茶山 (1762~1836)은 朱子의 性理學을 날카롭게 비판하지만 이것은 공자의 옛 가르침을 세상에 밝히려는 뜻 때문이었다. 이렇게 實學者들은 아직도 儒敎라는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었다.
  19세기 후반에는 崔濟愚(1824~1864)에 의하여 東學思想이 새로 일어나게 되었다. 이것도 실학사상과 마찬가지로 西洋의 思想을 만남으로써 새로 편성된 우리 思想이다. 그러나 實學은 비교적 적은 수의 學者들 사이에서 맴돌게 된 데 대해 東學은 널리 民衆속으로 뻗어갔다는 점에서는 매우 對照的이다. 이것은 前者가 아직도 儒敎的인 것을 내세우고 있는데 대해 後者는 우리 民族的인 것을 감연히 내세우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崔濟愚는 「儒道·佛道 수천년에 運이 역시 다했던가」라고 감연히 외쳤다. 그는 직접 하느님을 모실 수 있다고 믿었을 뿐만 아니라 입교한 사람들에게 그의 呪文을 통해 하느님을 모실 수 있는 길을 가르쳤다. 아직도 儒敎的인 理念이 지배하는 당시의 우리 社會에서는 東學思想은 많은 「순교자」를 낼 수 밖에 없었다. 이 東學은 西學 곧 天主敎에 대해서도 맞섰다. 崔濟愚는 西學을 東學과 「비슷하면서 다르다」고 선언하였다. 원래 東學이라는 이름 자체가 西學에 대한 이름이었다.
  이렇게 儒敎·佛敎에 대해서도 그리고 西學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東學思想은 우리의 固有思想과 깊이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東學의 하느님은 저 옛날 우리 祖上들이 祭天式에서 제사를 드리던 하느님이나 檀君神話에 나오는 桓因(하느님)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東學은 儒敎·佛敎등을 받아들여 歷史를 전개한 우리 固有思想보다 우리 歷史의 변두리에, 곧 民衆속에 남아 있는 固有思想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그런 점에서 民衆的이었다. 또 그러므로 당시의 支配層과 거듭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 東學은 西學에 대한 대립이라는 점에서 民族的이었다. 그러므로 東學은 外勢와의 충돌을 벗어날 수 없었다. 이러한 宿命的인 충돌이 결국 저 甲午東學運動으로 나타났다. 두 차례에 걸친 이 運動은 바로 支配層과 外勢에 대한 충돌이었다. 곧 1894년 (甲午) 봄의 東學運動이 「除暴救民」곧 포악한 政治를 물리쳐 백성을 구해낼 것을 내세우고 당시 支配層과 싸운 것이라면 이해 가을의 東學運動은 「斥洋斥倭」 곧 西洋과 日本 세력을 몰아낼 것을 내세우고 주로 日本軍隊와 싸운 것이다.

  그러나 東學運動은 日本이 우리 疆土에서 淸나라와 戰爭을 일으키는 구실이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戰爭까지 일으키면서 우리의 國土를 노리는 日帝의 近代化된 軍隊에 의해 무참하게 꺾이고 말았다. 이렇게 東學思想이 支配層의 세력과 國際的인 세력과의 現實的인 투쟁에서 힘이 모자라 꺾인 뒤에 나타난 것이 大巡思想이다. 이것도 우리 思想이 西洋의 思想과 만남으로써 새로 편성된 思想임을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大巡思想은 지극히 平和的이고 實容的이라는 점에서 反抗的이고 투쟁적인 東學思想과는 매우 對照的이다. 이것은 東學이 저 甲午東學運動이라는 적극적인 現實參與에서 무참히 꺾인 歷史的인 現實과 깊이 관련되어있다.

  「全琫準이 虐政에 분개하여 동학도들을 모아 義兵을 일으킨 후 더욱 세태는 흉동하여져 그들의 분노가 충천하여 그 기세는 날로 심해져가고 있었도다. 이 때에 상제께서 그 동학군들의 전도가 불리함을 알으시고 여름 어느날 「月黑雁飛高 單于夜遁逃 欲將輕騎逐 大雪滿弓刀」의 글을 여러 사람에게 외워주시며 동학군이 눈이 내릴 시기에 이르러 실패할 것을 밝히시고 여러 사람에게 동학에 들지말라고 권유하셨느니라. 과연 이해 겨울에 동학군이 관군에게 패멸되고 상제의 말씀을 좇은 사람은 화를 면하였도다」(전경행록1장 23절)

  이렇게 甑山은 東學軍의 앞길을 염려하고 東學軍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자진하여 말렸다고 한다. 여기에는 당시의 우리나라 歷史的인 現實에 대한 甑山의 태도가 반영되어 있다. 곧 甑山은 당시의 우리 나라 現實을 거의 絶望的으로 진단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는 抵抗이나 武力 같은 어떠한 運動도 현실을 타개할 수 없다고 믿었다. 이러한 信念은 당시의 우리 서울에는 淸·日·露·美·英·佛·獨등 여러 나라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으면서 우리 나라 政治에 관여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經濟的으로도 그 勢力을 넓히고 있는 現實과도 관련이 있다. 특히 軍事的으로 日本·러시아 등을 비롯하여 각국의 武官·軍事顧問團·軍人들이 우리 나라에 주둔하고 있는 現實에서는 우리 民衆의 어떠한 武力的인 運動도 의미가 없다고 믿어질 수 밖에 없었다.


▲ 오선위기



  대체로 이러한 사정으로 大巡思想은 매우 平和的이고 實容的인 性格을 띠게 되었다. 여기서는 이러한 大巡思想의 理念을 韓國思想이라는 觀點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여기서 理念이라는 말은 「최고의 목표」를 뜻하는 말일 뿐이다. 우리는 여기서 새로 西洋思想을 만난 우리 韓國思想이 새로운 편성을 시도한 것이 大巡思想이라고 본다. 그리고 그 시도하는 최고의 목표를 甑山의 理念이라고 말한다. 과연 그 理念은 어떠한 것일까?
「仙道와 佛道와 儒道와 西道는 세계 각 족속의 문화의 바탕이 되었나니 이제 崔水雲을 仙道의 宗長으로, 震默을 佛敎의 宗長으로, 利瑪竇를 西道의 종장으로 각각 세우노라」고 하셨도다(전경 교운 1장 65절)

  「상제께서 모든 도통신과 문명신을 거느리고 각 민족들 사이에 나타난 여러 갈래 문화의 精髓를 뽑아 통일하시고 물 샐틈없이 도수를 짜 놓으시니라」(전경예시12절) 여기서 仙道·佛道·儒道는 물론 종래의 東洋思想을 대표하는 것들이다. 西道란 그리스도敎를 말하는데 여기서 西洋思想을 대표하고 있다. 이렇게 東洋思想과 西洋思想을 종합하고 통일하겠다는 것은 이렇게 우리思想을 새로 편성하겠다는 理念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東西의 思想을 통일한다는 것은 그저 外的으로 東西의 思想을 묶어놓는 것이 아닐 것이다.
  東學의 思想을 그저 묶어놓는데 그치지 않고 통일하려면 그것을 融合할 수 있는 바탕이 있어야 한다. 大巡思想에 있어서는 이러한 바탕이 곧 우리 民族固有思想이라는 것이 그저 전제되어 있을 뿐이다. 甑山이 샤아머니즘的인 측면을 짙게 보이는 것이 이것을 뒷받침해준다. 그리고 甑山 자신이 이러한 통일을 한다는 것이 이것을 뒷받침한다. 과연 東西의 思想을 통일한다면 그것은 실로 놀라운 能力이 아닐 수 없다. 「이제 하늘도 뜯어고치고 땅도 뜯어 고쳐 물샐 틈 없이 度數를 짜 놓았으니 제 한도에 돌아닿는대로 새 기틀이 열리리라」(전경 교법 제3장 4절)


  이렇게 하늘과 땅을 뜯어고치는 能力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思想的으로는 우리 民族이 온 人類를 위해 이바지하겠다는 民族的인 理念을 나타낸 것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특히 注目되는 것은 仙道와 佛道의 宗長을 崔水雲·震默이라고 한 점이다. 이것은 우리 民族이 받아들여 소화한 仙敎·佛敎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儒道·西道의 宗長도 注目할 만 하다. 儒敎의 宗長을 朱子라 하고 그리스도敎의 宗長을 마테오릿치(利瑪竇)라고 한 것은 역시 매우 韓國的인 생각이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 民衆의 소박한 생각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西道는 그저 그리스도敎에 그치지 않고 西洋의 近代文明까지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이 西洋 近代文明의 受容이야 말로 大巡思想의 가장 절실한 과제라고 말할 수 있다.


「서양인 利瑪竇가 동양에 와서 지상 천국을 세우려 하였으되 오랫동안 뿌리를 박은 유교의 폐습으로 쉽사리 개혁할 수 없어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도다. 다만 천상과 지하의 경계를 개방하여 제각기의 지역을 굳게 지켜 서로 넘나들지 못하던 신명을 서로 왕래케 하고 그가 사후에 동양의 文明神을 거느리고 서양에 가서 文運을 열었느니라.

  이로부터 地下神은 天上의 모든 묘법을 본받아 人世에 그것을 베풀었노라. 서양의 모든 문물은 天國의 모형을 본딴 것이라」이르시고 「그 문명은 물질에 치우쳐서 도리어 인류의 교만을 조장하고 마침내 天理를 흔들고 자연을 정복하려는 데서 모든 죄악을 끊임없이 저질러 神道의 권위를 떨어뜨렸으므로 天道와 人事의 常道가 어겨지고 三界가 혼란하여 도의 근원이 끊어지게 되니…」(전경 교운 1장 9절)

 

  西洋의 科學·技術은 「天國의 모형을 본떴다」고 보는 것이다. 그 정묘한 機械를 발명해 내는 科學·技術이 당시의 우리 民族에게는 「天上에 올라가 모든 奇妙한 법을 받아내려 온 것」이라고 推理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科學·技術을 중심으로 하는 西洋 近代文明은 놀랍고도 부러운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면서도 이 「近代 文明이 도리어 天地를 흔들며 自然을 정복하려는 기세로써」모든 罪惡을 꺼리낌 없이 범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것은 日本을 비롯한 外國들의 近代式 軍隊가 이 疆土를 짓밟고 있는 現實에 대한 反感이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西洋 近代文明에 대한 서로 반대되는 두 가지 反應은 그 受容이 절실한 과제임을 더욱 잘 말해 준다. 여기서 受容이란 우리 旣成文化 體系안에 포섭하는 것을 말한다. 우선 甑山은 그나름대로 近代文明의 잠정적인 受容이나마 시도했다. 그는 「東洋의 文明神」이 西洋에 건너가 근대문명을 이룩한 것이라고 풀이하였다. 곧 利瑪竇가 죽은 뒤에 東洋의 文明神을 거느리고 西洋으로 돌아가서 近代文明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震默이 天上에 올라가서 온갖 묘법을 배워 내려 人世에 그것을 베풀고자 하였으나 金鳳谷에게 참혹히 죽은 후에 원을 품고 동양의 道通神을 거느리고 서양에 가서 문화계발에 역사하였나니라. 이제 그를 解시켜 故國으로 데려와서 仙境건설에 역사케 하리라」(전경 권지 2장 37절)


  여기서는 우리 나라 사람인 震默이 죽어서 東洋의 道通神을 거느리고 西洋에 건너가서 近代文明을 개발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近代文明의 일종의 受容이라고 볼 수 있는 동시에 우리 民族의 主體性을 내세우려는 시도라고 볼 수도 있다.
  우리는 여기서 大巡思想을 韓國思想이라는 觀點에서 그 理念을 문제삼으려고 한다. 西洋의 近代文明은 그 近代式 武力으로써 우리 民衆에게 크나큰 충격을 주었다. 이러한 사정 밑에서 우리思想은 西洋思想을 어떻게든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 이리하여 甑山은 이제 東西의 思想을 통일하여 결정적으로 새로운 韓國思想을 전개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그는 이렇게 東西의 모든 思想을 관대하게 받아들여 통일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통일의 바탕으로서 우리 民族 固有思想을 거의 무조건 전제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관대하게 받아들이려고 하면서도 우리 民族의 主體性은 끝내 관철시키려고 했다. 西洋의 近代文明도 우리 나라 震默이 개발한 것이라고 보게 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때문이다. 그러나 近代文明의 威力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東西의 모든 思想을 골고루 받아들임으로써 참된 韓國思想을 세우려는 理念임에 틀림없다. 甑山의 解相生도 思想의 受容이라는 관점에서는 우리 民族이 다른 思想들을 받아들임에 있어서 참된 消化를 통해 잘 조화된 主體的인 韓國思想을 확립하라는 것을 뜻한다. 어느 하나의 思想에 치우쳐 다른 많은 思想의 원을 사게 되면 정말 世界 속의 참된 韓國思想일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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