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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소개 : 성(星) 별을 관장하는 경순(耿純)신명
성(星) 별을 관장하는 경순(耿純)신명
글 교무부
경순[耿純:?~37, 자(字)는 백산(伯山)]은 거록군 송자현(鉅鹿郡 宋子縣:현 하북성 조현 동북쪽 宋城村)의 호족(豪族)출신으로 광무제(光武帝)를 도와 후한(後漢:25~220)01을 세우고 나라의 기반을 다지는데 많은 공적을 남긴 장수이다. 왕망(王莽)02이 패하고 갱시제(更始帝:劉玄)03이 서자 무음왕(舞陰王) 이질(李)로 하여금 여러 군국(郡國)의 항복을 받도록 하였다. 이때 경순의 아버지 경애(耿艾)도 항복하여 제남(濟南:현 산동성 장구시 서쪽)의 태수(太守)가 되었다. 경순은 이질(李)을 알현한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왕께서는 용과 호랑이의 모습으로 풍운의 때를 만나 민첩하게 일어나니, 불과 한 달여 만에 왕의 칭호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민(士民)들은 대왕의 덕망(德望)과 신의(信義)에 대해 들어본 바가 없고, 대왕의 공로(功勞) 또한 백성들에게 아직 베풀어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총애와 녹봉을 급하게 받으셨으나, 이는 예로부터 지혜로운 자들이 꺼려하는 바입니다. 조심하고 삼가며 스스로를 바르게 하여 오직 성취하지 못할까 두려워해야 하거늘, 대왕께서는 이런 상황에서 오히려 여유가 있고 자족(自足)하니 어찌 성공했다 할 수 있겠습니까?” 이질은 경순의 말이 범상하지 않았고 또한 그가 거록군(鉅鹿郡)의 명망 있는 호족이었던지라 법제에 따라 기도위(騎都尉)를 제수하였고, 부절(符節)04을 주어 조(趙)05·위(魏)06 땅을 평정하도록 명하였다. 마침 광무제가 황하를 지나 한단에 이르게 되자 경순이 즉시 알현하였는데, 광무제는 경순을 후대(厚待)하였다. 경순은 광무제와 그의 관속들이 병사들을 거느리는 법도가 다른 장수들과는 다름을 보고 나서, 스스로 광무제와 결탁하기로 하고 말과 비단 수백 필을 바쳤다. 또 얼마 후에는 사촌 형제 경흔(耿), 경숙(耿宿), 경식(耿植)과 함께 종족(宗族)07과 빈객(賓客) 2천여 명을 거느리고 광무제에게 합류했다. 광무제는 경순을 전장군(前將軍)에 제수하고 경향후(耿鄕侯)로 봉하였으며, 경흔(耿), 경숙(耿宿), 경식(耿植) 등에는 편장군(偏將軍)을 제수했다. 어느 날 경순은 경흔과 경숙을 시켜 고향[거록군(鉅鹿郡), 왕랑08의 근거지인 한단(邯鄲)과 인접]에 있는 그의 집을 불살라 버리게 하였다. 광무제가 경순에게 그 까닭을 묻자 이렇게 대답하였다. “지금 한단(邯鄲:왕랑을 뜻함)이 일어나자 거기에 미혹되는 군현(郡縣)들이 많이 있습니다. 제가 비록 온 가족을 이끌고 천명(天命)에 따라 왕께 귀의했다고는 하나 늙고 약한 이들이 행렬에 있어 다른 마음을 품는 자가 생길까 두렵습니다. 그래서 집을 불태워버려 아예 돌아가고 싶다는 바램을 끊어버린 것입니다.” 광무제는 그의 말을 듣고 탄식(歎息)하였다. 그 후 경순은 광무제를 따라 한단(邯鄲)을 평정하고 또한 동마적(銅馬賊)09을 깨트렸다. 광무제가 즉위(25년)하자 경순을 고양후(高陽侯)로 봉하였다. 경순은 유영(劉永)10을 제음(濟陰:현 산동성 정도현 서북)에서 공격하고 정도(定陶:현 산동성 서남단지역)를 평정하였다. 경순은 낙양으로 돌아와 자청하기를, “신(臣)은 본래 문관의 자손으로 다행히 한(漢)이 부흥하여 성스러운 왕께서 천명(天命)을 받으시는 때를 만나서 여러 장수직(將帥職)을 거치고 여러 후작의 벼슬을 지냈습니다. 이제 천하가 대충 안정되어 신(臣)의 뜻을 쓸데가 없으니, 원컨대 어느 한 군(郡)을 다스려 스스로 힘껏 노력하여 효과를 거두도록 하여 주소서.”라고 하였다. 광무제는 웃으며 말하기를, “경은 이미 무관(武官)을 지냈거늘 또 문관(文官)이 되고 싶으시오?” 하면서 동군(東郡:하남 동북과 산동 남서에 걸쳐 있던 군) 태수(太守)를 제수하였다. 당시 동군은 안정되지 않았었으나 경순이 다스린 지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아 도적이 사라지고 편안해졌다. 28년(건무 4) 경순이 광무제의 명령을 받아 병사를 이끌고 갱시제가 임명한 동평태수 범형(范荊)을 치니 범형이 항복하였다. 나아가 태산(太山)의 제남(濟南:현 산동성 장구시 서쪽) 및 평원(平原:현 산동성 평원현 서쪽)의 농민반란집단들을 쳐서 모두 평정시켰다. 동군태수로 재직한 지 4년 되던 해에 발천현(發千縣:현 산동성 관현 동남)의 장(長)에게 죄가 있어 경순이 주(奏:상소)를 올리고 포위하였는데, 상주한 것이 하달되기도 전에 그가 자살하였다. 이 일로 면직(免職)된 경순은 열후(列侯)로서 조정(朝廷)에서 왕을 받들게 되었다. 광무제를 따라 동헌(董憲)을 치러 갈 때의 일이었다. 마침 경순이 태수로 있던 동군(東郡)을 지나게 되었는데 그곳의 백성들 수천 명이 왕의 수레를 따라와 울면서 ‘다시 경군(耿君:경순)을 태수로 복직시켜 주십사’고 간청하였다. 광무제는 공경(公卿)들에게 “경순은 젊은 시절부터 무관(武官)의 일만 했을 뿐인데, 군(郡)을 다스리는데 이처럼 능숙하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30년(건무 6) 경순이 동광후(東光侯)에 봉해졌는데, 식읍(食邑)에 나아가기를 사양하자 광무제가 말하였다. “문제(文帝)11는 주발(周勃)에게 ‘승상은 내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나, 나를 위해 제후를 이끌고 식읍에 나아갔으면 좋겠다.’라고 했는데, 지금도 역시 그러하오.” 경순이 명령을 받들어 식읍으로 향하다가 업(:현 하남성 안양현 북쪽) 땅에 이르러 만 휘[斛]12의 곡식을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자신의 식읍[東光縣:현 하북성 동남부]에 이르러서는 죽은 이를 조문(弔問)하고 병자(病者)를 위문하니 백성들이 그를 경애(敬愛)하였다. 32년(건무 8)에 동군(東郡), 제음(濟陰) 지방에 도적 떼가 일어나 대사공(大司空:副승상) 이통(李通)과 횡야대장군 왕상(王常)이 파견되었다. 또 광무제는 과거 경순이 동군(東郡)태수로서 이 지역 백성들에게 위엄과 신망이 두터웠던 점을 생각하여 사신(使臣)을 시켜 경순에게 태중대부(太中大夫)를 제수하고 대병력을 이끌고 동군(東郡)으로 합류하게 하였다. 동군의 도적들은 경순이 온다는 소식을 듣자 9천여 명이 모두 경순에게 나와 항복하니 군대는 싸우지 않고 돌아갔다. 광무제가 서찰을 보내 경순을 다시 동군(東郡)태수로 삼으니 관리와 백성들이 기뻐하면서 복종하였다. 37년(건무 13) 경순은 관직에서 세상을 떠났고, 성후(成侯)라는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01 기원전 202년에 유방이 건국한 한(漢)나라는 기원후 8년에 왕망에 의해 멸망하였다. 25년에 유방의 9세손인 유수(劉秀:광무제)는 왕망이 세운 신(新)나라를 무너뜨리고 낙양에서 한(漢)나라를 재건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를 유방이 장안에 세웠던 전한(前漢)과 구별하기 위하여 후한(後漢) 또는 동한(東漢)이라고 한다. 02 AD 5년 평제를 독살한 뒤 2세의 유영(劉拏:宣帝의 현손)을 세운 뒤, 자기를 스스로 가황제(假皇帝)라 하고, 신하들에게는 섭황제(攝皇帝)라 부르게 하였다. 그 후 AD 8년 유영마저 몰아내어 한(漢)나라를 멸망시키고 국호를 ‘신(新)’이라 하여 황위(皇位)를 완전히 찬탈하였다. 03 전한(前漢)을 멸망시킨 왕망(王莽)정권에 대항하여 한나라를 재건하려는 유(劉)씨 일족들의 시도는 유수(劉秀:광무제)가 처음이 아니었다. 23년에 유현(劉玄:갱시제)은 수도를 낙양에 정하고 연호를 갱시(更始)로 하면서 한나라를 계승하였지만 지지기반이던 농민군 세력이 그에게 등을 돌림으로써 불과 2년 뒤인 25년에 권력을 잃고 살해당하였다. 04 예전에, 돌이나 대나무·옥 따위로 만들어 신표로 삼던 물건. 주로 사신(使臣)들이 가지고 다녔으며 둘로 갈라서 하나는 조정에 보관하고 하나는 본인이 가지고 다니면서 신분의 증거로 사용하였다. 05 전국칠웅(戰國七雄)의 하나. 지금의 산서성(山西省) 북부에서 하북성(河北省) 동남부까지를 영토로 했다. 06 전국칠웅(戰國七雄)의 하나. 지금의 산서성(山西省) 남서부에서 하남성(河南省) 북부 일대까지를 영토로 했다. 07 중국사회를 특징지어온 친족집단. 주대(周代)에 지배층 사이에서 ‘종법(宗法)’으로 불리는 종족조직이 만들어져 주나라 봉건제도의 기초가 되었다. 한대(漢代) 이후 역사의 표면에 나타나는 대성(大姓) ·호족(豪族)도 종족적 결합을 중추로 하는 세력이었고, 또한 남북조에서 당대(唐代)에 걸쳐 발달한 문벌귀족사회도 종족이 강화된 것이다. 송대(宋代)에 일어나기 시작한 각지의 관료적 지주층에서도 가족적 단결은 더욱 강조되고 조상의 제사를 위한 제전(祭田), 일족의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한 의전(義田), 족(族)의 규약과 계보 등을 기재한 족보(族譜)의 편집 등도 활발하게 행하여졌다.(EnCyber 두산세계대백과) 08 장안의 점술가였는데 자신을 한나라 왕실의 후예인 유자여라고 속여 반란군 세력을 규합한 다음 이를 토대로 하북 일대를 장악함(?~24). 09 하북 지방에서 노략질을 하던 농민반란집단 중 하나. 10 한(漢)의 제후왕 중 한 명. 25년(광무제가 낙양에서 즉위했던 해) 11월 수양(陽)에 도읍을 정하고 스스로 천자의 지위에 올랐던 인물. (자세한 내용은 『대순회보』 71호, 합연편 참조) 11 전한(前漢)의 5대 황제(재위 BC180~ BC157). 이름은 항(恒), 묘호는 태종(太宗)이고 고조[유방]의 둘째아들이다. 여씨(呂氏)의 난이 평정된 후 태위(太尉) 주발(周勃), 승상 진평(陳平) 등 중신의 옹립으로 즉위하였다. 고조의 군국제(郡國制)를 계승하고, 전조(田租)·인두세(人頭稅)를 감면하였다. 가혹한 형벌을 폐지하였으며, 흉노에 대한 화친정책 등으로 민생안정과 국력배양에 힘을 기울였다.(EnCyber 두산세계대백과) 12 1휘는 10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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