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순진리회 Home
진심견수
복 수 초(福壽草)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복 수 초(福壽草)

 

 

  감의 빛깔이 노을만큼 깊어가던 가을 무렵이었을 것이다. 종단 대순진리회의 주최로 열린 ‘제1회 경기도 게이트볼대회’에 취재차 참석한 나는 본부석 뒤편에서 묵묵히 배식과 식기세척을 담당하고 있는 대순진리회 내수 선감 한 분을 만날 수 있었다.

  본 지에는 매주 기독교, 천주교, 불교, 민족종교를 망라해 종단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실무자를 취재해 그 행적을 상세히 보도하는 코너(우리교단 이사람)가 있고 당시 그 코너를 위해 그 분과의 인터뷰도 약속되어 있었다.

  하지만 인터뷰가 시작되고 끝날 때까지 나는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보통 인터뷰에 응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의 사사로운 얘기까지 들춰가며 자신을 피력하기에 바쁜데, 그에 비해 그 분은 아주 간략하고 명료한 답변만을 해왔다. 엉성하게 취재가 종료되자 이 상태로는 보도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나는 종단 홍보담당자에게 그 분에 대한 자세한 약력을 요청해야만 했다.

  그런데 기사를 작성하던 중 다시 한 번 난감하게 되었다. 자료에는 그가 종단 내부의 일부터 사람들의 손이 닿지 않는 사회의 구석까지, 자신의 삶을 할애하며 고군분투한 흔적이 고스란히 기록돼 있었기 때문이다. 단 하루만 자원봉사활동을 해도 그날 일어난 사건과 느낌들이 봉사자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텐데, 그 오랜 시간 속에서 별다른 감흥을 받지 않았다니……. 분명 뭔가가 잘 못된 듯했다. 당시 나의 인터뷰 태도에 문제가 있었을 거라 결론 내린 나는, 그 선감에게 전화를 걸어 이번엔 강경한 말투로 추궁하듯 추가 인터뷰를 하였으나 여전히 돌아오는 답변은 “말주변이 없다. 당시 상황들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뿐이었다.

  결국 첨삭을 되풀이하며 기사를 마감한 나는 이 문제에 대해 경험이 많은 선임 기자에게 상담을 요청했고 그 답변은 정말 뜻밖의 것들이었다.

  이슬람교에서는 자카트(zakat)라 해서 무슬림(이슬람교도)들이 가난한 자에게 재산을 분배하게끔 의무화 하고 있다고 한다. 이 희사는 라마단(금식월) 종료쯤 해서 불우한 이웃들을 상대로 이뤄지는데, 특이한 점은 이 희사를 남몰래 행하라고 코란은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또 부처는,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진정한 수행자는 남에게 법으로서나 재물로서나 무조건적인 도움을 베풀어 주었더라도 베풀고 도와주었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마음에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예수 역시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유명한 말을 남겨 선행의 척도를 가늠케 했으며, 탈무드나 수많은 문학서적에서도 지나친 선행에 대해 비판을 가하며, “자신을 감춰라. 그러지 않으면 오히려 독이 된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대순진리회에서는 선행을 어떠한 의미로 평가하고 있을까. 감히 결론부터 말하자면 해원상생·보은상생의 진리를 펼치고 있는 종단 대순진리회는 상생의 종교라는 것이다. 선천의 맺힌 원한을 푸는데도 희생을 감수하고 남을 잘되게 하고자 하는 상생의 마음이 필요하고, 후천개벽 시, 태을주(太乙呪)와 의통(醫統)·도통(道通)의 법방(法方)으로 많은 사람을 구하는데도 인간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이 전제되어야 한다.

또한 증산 상제께서 지상천국건설을 목표로 천지공사(天地公事)를 행했을 때도 인간이 감회(感懷)할 수 없는 희생적 사랑으로 민중들을 넋 놓게 했음을 대순진리회 ‘전경’ 이곳저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것.

  이쯤에서 그 선감의 행동을 이해한 나는 세속인이 세속인의 방식대로 도인의 삶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절감했다. 요즘 인간사는 사리분별이 뛰어난 사람들로 넘쳐나 더욱 이익 집약적이고 탈 도덕적인 세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들에게 선행이라는 것은 마치 하나의 유행 같아서, 구호단체에 기부금을 내고 그 증명서를 하나씩 척척 쌓아올려 남들로부터 혹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그 행위를 평가받고 싶어 한다.

  이런 세상에서 항상 사람들의 병든 마음을 고치기 위해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는 대순진리회의 수많은 도인들이 있기에 세상은 아직도 희망의 기운으로 가득 차 있다고 본다. 그리고 후천개벽이 시작되고 증산 상제께서 병든 세상을 고치려 새 세상을 열어갈 일꾼들을 선택할 때, 그 자격에 부합되는 그 누군가는 오래전부터 사람들을 묵묵히 이롭게 한 자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바로 눈 속에서 고행을 하며 숨어 피다가 마침내 눈이 녹으면  노오란 자태를 드러내는 복수초 같은 사람들 말이다.

종교신문 김동훈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