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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기
대원사(大院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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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제님께서 49일간의 공부 끝에 천지대도를 여신 곳이자 도주님께서도 백일 도수를 보신 대원사(大院寺)는 전주 모악산(母岳山)의 동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모악산 서쪽에 위치해 있는 금산사가 거의 평지에 있어 사람들의 왕래가 많고 잘 알려진 대규모의 사찰인 것과는 달리, 대원사는 2.8km 정도의 산길을 따라 등산을 해야만 갈 수 있으며 입구는 울창한 대나무 숲으로 가려져 완전히 들어서기 전까지는 절의 건물이 잘 보이지 않는다.

  절의 규모 또한 생각보다 훨씬 작은데 상제님께서 사람들의 접근을 물리치고 49일간의 불음불식 공부를 하시기에는 오히려 적합한 곳이 아니었을까 싶다.

  대원사(大院寺)는 통일신라시대였던 670년에 일승(一乘), 심정(心正), 대원(大原)이라는 세 승려들에 의하여 세워졌다. 이들은 모두 신라 열반종(涅槃宗)의 개조(開祖)인 보덕(普德)의 제자들로 당시 스승이 머물고 있던 고대산(孤大山) 경복사(景福寺)가 보이는 이곳에 절을 짓고 대원사(大原寺)라 하였다. 한때는 절의 이름이 대원사(大圓寺)로 표기되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대원사(大院寺)라고 한다.

  창건 이후 대원사는 여러 차례 중창되었는데, 그 중 진묵대사(震   大師)와 금곡(錦谷)에 의한 중창이 눈에 띤다. 진묵(震   )은 정유재란(1597년)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1606년(선조39)에 중창하였으며 이후 이 절에서 20년간을 수행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래서인지 대웅전 내부 좌측 벽면에는 진묵대사의 영정이, 대웅전 뒤편에는 그의 부도(浮屠: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봉안한 묘탑)가 모셔져 있다.

  건봉사(乾鳳寺: 강원도 고성군 오대면 냉천리에 있는 절)의 승려였던 금곡은 1886년(고종23)부터 이 절을 중창하기 시작하였는데, 상제님께서 “그대는 전생이 월광대사(月光大師)인 바 그 후신으로서 대원사에 오게 되었느니라. 그대가 할 일은 이 절을 중수하는 것이고 내가 그대의 수명을 연장시켜 주리니 九十세가 넘어서 입적하리라.”(행록 2장 13절中)라고 하신 바와 같이 그는 대웅전(大雄殿)과 명부전(冥府殿)을 다시 지었고 칠성각을 새로 지었으며 산내 암자인 내원암(內院庵)에 있던 염불당을 옮겨 왔다.

  전경의 ‘상제께서 신축(辛丑)년 五월 중순부터 전주 모악산 대원사(大院寺)에 가셔서 그 절 주지승 박 금곡(朴錦谷)에게 조용한 방 한간을 치우게 하고 사람들의 근접을 일체 금하고 불음 불식의 공부를 계속하셔서 四十九日이 지나니 금곡이 초조해지니라. 마침내 七월 五일에 오룡허풍(五龍噓風)에 천지대도(天地大道)를 열으시고 방안에서 금곡을 불러 미음 한잔만 가지고 오라 하시니 금곡이 반겨 곧 미음을 올렸느니라.…(행록 2장 12절中)’라는 구절에 나오는 조용한 방 한 칸은 바로 금곡이 당시 새로 지었던 칠성각인데, 그 칠성각은 6·25동란 때 절의 다른 건물들과 함께 소실되었고 현재는 이 장소에 다른 용도의 건물이 들어서 있다.

  한편 교운 2장 21절 ‘종도들에게 칠성경을 외우게 하시고 도주께서 대원사에 들어가셔서 백일 도수를 마치셨도다. 마치신 날이 바로 신유년 칠월 칠석날이라, 그때에야 종도들이 칠성경을 외운 뜻을 깨달으니라. 그들을 보시고 도주께서 「이곳이 바로 상제께서 천지신명을 심판한 곳이니라. 아직 응기 하여 있는 것을 내가 풀었노라」고 말씀하셨도다.’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도주님께서도 대원사에서 백일 도수를 보셨다. 현재 그 장소는 정확히 알 수가 없으나, 대원사 승려의 증언에 따르면 아마도 대웅전 위쪽에 위치한 승방이 유력한 장소인 것 같다.          

<교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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