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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기
해인사(海印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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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안내도

 

 

도주님께서 갑오년(甲午年, 1954) 가을에 공부하셨던 해인사(海印寺)는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의 가야산(伽倻山) 기슭에 있다. 가야산은 해인사의 주산(主山)으로 조선 8경 중 하나로 알려져 있으며, 우리말로 가람 혹은 개[犬]에서 비롯된 말이라고 하고, 또는 석가모니부처께서 수행하셨던 붓다가야의 가야산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가야산의 주봉인 상왕봉(1,430m)은 우두산(牛頭山)이라고 하며, 산의 남녘에는 신선의 세계인 만수동이 있다고 할 정도로 산세가 수려하여 예로부터 해동의 십승지로 알려졌다. 가야산을 경계로 경북 성주군과 경남 합천군이 나뉘어지는데, 북쪽인 성주군으로는 산이 가파르고 험하며, 남쪽인 합천군으로는 산이 부드럽게 내려오고 있다.

88고속도로 해인사 나들목에서 10km 정도의 거리에 위치한 법보사찰(法寶寺刹) 해인사는 대장경을 보관하고 있으며,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는 불보사찰(佛寶寺刹) 통도사(通度寺)와 고려시대 16명의 국사(國師)를 배출한 승보사찰(僧寶寺刹) 송광사(松廣寺)와 함께 우리나라 3대 사찰로 알려져 있다.

〈신라가야산해인사선안주원벽기(新羅伽倻山海印寺善安住院壁記)〉와 〈가야산해인사고적(伽倻山海印寺古籍)〉에 의하면, 신림(神林)의 제자인 순응(順應)이 766년(혜공왕 2) 중국에 건너가서 불법을 전수받고 귀국한 뒤 802년(애장왕 3) 가야산에 해인사를 창건하다가 갑자기 죽자 이정(利貞)이 그의 뒤를 이어 절을 완성했다고 한다.

해인사 상가를 지나 30분 정도 올라가면 일주문이 있고, 보통의 사찰과는 달리 봉황문(鳳凰門)과 해탈문(解脫門)이 이어져 있어 이채롭다. 천왕문(天王門)이나 금강문(金剛門)에 해당하는 봉황문에는 탱화로 그려진 사천왕상이 있으며, 해탈문은 불이문(不二門)에 해당한다. 봉황문과 해탈문 사이에는 국사단(局司壇)이 있다. 해탈문을 지나면 해인사 경내의 가운데라 할 수 있는 구광루(九光樓)가 정면으로 보인다. 구광루를 지나면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신 대적광전(大寂光殿)이 위치하고 있어 해인사가 화엄사찰(華嚴寺刹)임을 알 수 있게 한다. 대적광전 위로 대장경(大藏經)을 보관하고 있는 장경각이 있다.

 

관음전과 심검당 현판

 

 

팔만대장경은 고려 고종 19년(1232) 몽고의 침입으로 불에 타버린 대장경 대신 민심을 모으고 부처님의 가호로 국난을 이겨내기 위하여 고종 38년(1398)에 다시 만든 것으로 처음에는 강화도 선원사에 모셔두었다고 한다. 고려 말과 조선 초의 왜구의 노략질 때문에 조선 태조7년(1398)에 서울 지천사에 잠시 두었다가 이곳 해인사로 옮겼다고 한다. 지금은 유네스코에 의해 대장경(국보 32호)과 장경판전(藏經板殿, 국보 52호)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구광루 오른쪽에 관음전(觀音殿)이 있는데 현재는 강원(講院, 승가대학)으로 사용되고 있다. 건물의 현판은 두 개로 그 하나가 심검당(尋劍堂)이다. 칼을 찾는다는 말로 번뇌를 끊어버릴 수 있는 지혜의 칼을 찾는다는 의미라고 하니 수도의 간절함과 단호함을 나타내는 말이라 할 수 있다. 도주님께서 공부하셨던 다로경권(茶爐經卷)의 현판이나 건물은 발견할 수가 없고, 관음전 뒤로 ㄷ자 형태의 건물 중 하나가 아닐까 추측할 수 있다.

독성각 뒤로는 최치원이 심었다는 수령(樹齡) 천년이 넘은 학사대(學士臺) 전나무가 있다. 고운(孤雲) 최치원 선생이 말년(末年)에 기울어져 가는 신라왕조에 대한 시름을 거문고를 튕기며 달랬던 곳이라 한다. 그때 제자들 앞에서 지팡이를 거꾸로 심으며 “내가 살아 있다면 이 지팡이도 또한 살아 있을 것이니 학문에 열중하거라.”는 유언을 남기고 홍제암 뒤 진대밭골로 유유히 홀로 들어갔다고 한다.

“도주께서 다음 달에 박한경(朴漢慶)과 김용화(金容和)·김해구(金海九)·오치국(吳治國)·류철규(柳喆珪)·이윤섭(李允燮)·류한규(柳漢珪)·김영하(金永河)·오영식(吳永植) 등을 데리시고 해인사(海印寺) 경내에 있는 관음전(觀音殿)이자 심검당(尋劒堂) 뒤편의 다로경권(茶爐經卷)에서 사흘 동안 공부를 하셨도다. 그러나 공부에 관한 말씀은 없으시고 「사명당(四溟堂)의 입적실에 가서 불공이나 드리고 가리라」 말씀하시니 박한경과 그 외 세 사람이 먼저 그곳을 돌아보고 와서 가시기를 청하니 「너희들이 다녀왔으면 되었다」고 말씀하시고 근처에 있는 백련암과 그 외 여러 암자를 돌아보시고 길에 오르셨도다.”(교운2-54)는 전경 구절에 나오는 사명당(四溟堂)의 입적실은 홍제암(弘濟庵)을 말하는 것으로 일주문에서 서쪽으로 200m 정도 떨어져 있다. 임진왜란 후 이곳에서 은거하던 사명당은 67세의 나이로 광해군 2년(1609)에 입적하였다. 백련암(白蓮庵)은 일주문에서 동쪽으로 1km 정도 올라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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