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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27년(1997)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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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논단 : 화(禍)와 복(福)에 관한 일고찰(一考察)

화(禍)와 복(福)에 관한

 

일고찰(一考察)

 

 

-종도(從徒) 연구를 통하여-

 

 

           

김상엽 <교감ㆍ연구위원>


1. 들어가는 말
  인생사란 항상 순탄하지만은 않다. 슬픈 일이 있기도 하고 혹은 좋은 일이 생길 수도 있다. 수도인의 경우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길이 있으면 흉(凶)도 있고 화(禍)가 오기도 하는 반면 예상치 못했던 덕화(德化)를 입을 수도 있다.

  그러나 수도를 하면서 항상 화(禍)가 없기만을 바랄 수는 없다. 오히려 “자고로 화복이라 하나니 이것은 복보다 화를 먼저 겪는다는 말이니 당하는 화를 견디어 잘 받아 넘겨야 복이 이르느니라.” (교법 1장 19절)는 말씀처럼 복을 얻고자 할 때는 먼저 닥치게 되는 화를 잘 넘겨야 할 것이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화와 복의 상관관계를 상제님을 추종했던 종도(從徒)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고찰해 보고자 한다.

 


2. 차경석에 있어서 화와 복에 대한 고찰
  차 경석이 상제님을 추종하기 시작한 때는 1907년 5월 이었다. 이는 김 형렬, 김 자현, 김 보경 등이 1902년부터 천지공사에 수종들기 시작한 것과 비교해 볼 때 상당히 늦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지극한 성, 경, 신으로써 상제님을 따랐던바 그것은 처음 상제님을 용암리 수침막에서 뵈었을 때 그 의표와 언어 동작이 비범하심을 알고 모시고자 하였으나 상제님께서 능욕하시기도 해보고 발로 구축해 보시기도 하였으나 그래도 따르고자 한 모습에서 엿볼 수가 있다.

  이러한 성심(誠心)을 가진 차 경석이 종도(從徒)로서 추종한 1907년 이래로 상제님께서는 정읍 대흥리에 있는 차 경석의 집에서 여러 공사를 행하셨으며 그 해 12월 3일 이종매인 고부인(高夫人)을 수부(首婦)로 천거하게까지 되었다.

  그러나 차 경석은 그러한 성(誠), 경(敬), 신(信)에 대한 결과로 복(福)을 받기 전 먼저 화(禍)의 발동을 극복해야 했으니 그것은 바로 그의 야심(野心)이었다. 1907년 12월 상제님께서는 후천(後天)에서의 음양도수를 조정하시고자 종도(從徒)들에게 오주를 수련케 하시고 도수를 보시니 차 경석은 열두 점을 찍고 십이 제국을 운운(云云)하여 스스로의 야심을 드러내었다.

  결국 그는 지극한 성 경 신을 가졌기에 상제님께서 달리 써 보실까 하였으나 오는 복마(伏魔)를 감당하지 못하고 단지 동학에서 왕후장상을 바라다가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신명들의 해원두목으로 정해지게 된 것이다.

 


3. 문공신에 있어서 화와 복에 대한 고찰
  상제님께서 후천(後天)음양 도수를 조정하시는 공사에서 차 경석이 열두 점을 찍은 것에 비해 문 공신은 한 점을 찍으면서 “건곤(乾坤)이 있을 따름이오 이곤(二坤)이 있을 수 없사오니 일음일양이 원리인 줄 아나이다.”(공사 2장 16절)라고 말씀을 올렸다. 상제님께서는 공사를 잘 보았다고 칭찬하시면서 “너는 정음정양의 도수니 그 기운을 잘 견디어 받고 정심으로 수련하라”고 분부하시고 “문왕(文王)의 도수와 이윤(伊尹)의 도수가 있으니 그 도수를 맡으려면 극히 어려우니라” (공사 2장 16절)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에게 역시 복마의 발동을 잘 견디어 낼 것을 강조하셨다.

  음양도수에서 공사를 올바르게 받들은 문 공신에 대한 시련은 고부화액이었다. 음양도수를 보신 직후인 1907년 12월에 상제님께서는 고부 와룡리에 있는 문공신과 신경수의 두 집에 왕래를 하시면서 백의군왕, 백의장군 도수를 보시었다. 그러던 중 12월 25일 밤 무장한 순검 수십 명이 상제님과 김형렬, 김자현, 문공신, 신경수, 박장근, 이화춘 등 종도(從徒) 이십 여명을 포박하여 고부 경무청에 압송하니 바로 백의군왕 공사에 따른 고부화액이었다.

  그러나 문 공신 역시 이 관문을 극복하지 못하였다. 고부화액을 겪는 도중 문 공신은 순검들에게 옆구리를 발로 채여 거의 사경에 처했다가 상제님의 제생의 덕화를 입어 소생하게 되었다. 다른 종도(從徒)들과는 달리 문 공신만이 그런 곤욕을 치른 것에 대해 상제님께서 “순창 농암에 사흘 동안 계속 머물면서 너를 만나 여러 가지 큰 공사를 참관케 하였고 또한 고부도수에 감당할 사람이 마땅치 않아 네게 주인을 정하여 독조사 도수를 붙였노라” (행록 3장 65절)고 설명을 해주셨으나 그는 박장근, 이화춘과 더불어 고부화액 후 상제님을 원망하면서 불경한 패설을 일삼았던 것이다.

 


4. 김형렬에 있어서 화와 복에 대한 고찰
  김형렬은 여러 종도(從徒)들 중에 어느 누구 못지않게 진실된 마음으로 상제님을 추종한 종도(從徒)이다. 종도(從徒)로서 추종하게 된 것은 1902년 4월부터이지만 상제님과의 인연은 1894년 상제님께서 금구 내주평 정남기의 집에서 글방을 열었을 때부터였다. 김형렬의 진실한 마음에 대해서는 상제님께서 “네가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나를 쫓고 금전과 권세를 얻고자 좇지 아니하는 도다.”(교운 1장 7절)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짐작할 수 있다.

  그는 형편이 궁핍하여 상제님께 드리는 공궤가 소략한 것에 대해 죄송스러워하는 한편 8월 추석을 맞이하여 쇠솥을 팔아서 까지 상제님을 공양하고자 할 정도로 성심이 지극하였다. 뿐만 아니라 고부화액 때 많은 종도(從徒)들이 두려움과 상제님의 권능에 대한 의심으로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순간에도 김형렬과 김 자현 만은 끝까지 남아 한결 같은 마음으로 상제님을 모시는 등 순진하고 진실된 모습으로 상제님의 천지공사에 참여를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김형렬에게도 복에 따른 화(禍)의 관문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나약하고 우유부단한 마음이었다. 한결 같은 마음으로 추종한 김 형렬에게 상제님께서 화천을 얼마 앞두시고 “네가 나의 사무를 담당하겠느냐.” 하시며 큰 임무를 맡기고자 하였으나 그 중요한 순간에 그는 자신이 없었다. “재질이 둔박하와 감당치 못할까 하나이다.” 하며 주저했던 것이다. 상제님께선 읍참마속(泣斬馬謖)의 고사(故事)를 인용하시며 크게 꾸짖었으나 그는 나약하고 우유부단한 성품 때문에 상제님의 화천 후 처사에 있어서 큰 실수를 하게 되었다.

 


5. 결론
  위의 차 경석, 문공신 그리고 김형렬의 경우에서 고찰해 보았듯이 지극한 성심(誠心)의 결과로서 복을 받기 전에 복마의 발동으로 화(禍)가 선행됨을 알 수가 있다. 그것은 도인들에게 복을 받기 위한 하나의 관문 즉 복감내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성ㆍ경ㆍ신이 지극한 차 경석은 복을 받기 전에 음양도수를 보시는 공사에서 천자를 도모하고자 하는 야심에 빠지게 되었으며 또한 음양도수의 공사를 잘 받들어 정음정양의 도수를 맡은 문공신은 곧 바로 고부화액에서의 고난을 극복하지 못해 상제님을 원망하게 되었으며 시종일관 진실된 마음으로 공사를 받든 김형렬은 상제님께서 중요한 일을 명하시는 순간에 마음이 나약하여 주저했던 것이다. 

  이것은 지금의 도인들에게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나는 해마를 위주하므로 나를 따르는 자는 먼저 복마의 발동이 있으리니 복마의 발동을 잘 견디어야 해원(解冤)하리라.”(교법 2장 15절)고 하신 상제님의 말씀처럼 운수가 오기 전 시련이 없기를 바랄 수는 없다. 차경석처럼 허영과 야망을 가져서도 안되며 문공신처럼 수도하면서 겪는 고초로 인해 원망하는 마음을 품어서도 안된다. 또한 김 형렬처럼 중요한 순간에 우유부단해서도 안될 것이다.

  오로지 도인들은 진실된 마음과 지혜와 용력을 가지고 원하는 바 도통진경의 자리까지 나아가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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